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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의 진단서

우리는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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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드라마는 불륜으로 넘쳐나고 정작 사랑하고 지켜야 할 것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세상.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일까?

어느 날 아침 눈두덩이 찢어지고, 양팔과 다리에 잔뜩 멍이 든 아주머니가 진료실을 방문했다. 환자의 표정만으로도 한눈에 상해 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환자를 의자에 앉힌 다음 우선 물부터 한잔 권했다. 환자의 감정이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상해 환자가 병원을 방문하면 의사는 여러 가지로 난감해진다. 범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대개 개인사와 얽힌 일이 많고, 사연을 듣노라면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대를 처벌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진단 기간을 늘려서 끊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 의사는 일단 환자의 격앙된 마음부터 가라앉히고 진료를 시작하게 된다.

그 아주머니도 대개의 다른 환자들처럼 자신의 몸보다는 상대에 대한 분노부터 풀어놓았다. 짐작대로 가정폭력이었다. 진료실에 있다 보면 가정폭력이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이런 일이 세간에 알려지는 것은 100분의 1도 안 되고 대개는 시간이 지나면서 유야무야되기 쉽다. 하지만 의사 입장에서는 가정문제로 흥분해 있는 환자에게 무턱대고 진단서를 발급해주면서 경찰서를 찾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대개는 우선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하지만 이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마음이 착잡했다.

오래전 일이다. 경북 어느 도시의 철길에서 사상 최악의 열차 추돌사건이 나서 많은 사상자가 난 일이 있었다. 그때 그 열차에 젊은 연인이 타고 있었다. 사귄 지 오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짧은 여행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사고 당시 남자는 오른쪽 다리가 짓눌렸고 여자는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 않고 구조되었다. 남자는 발목이 완전히 분쇄되어 비록 절단은 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 보조기 없이는 정상적인 보행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사고가 없었다면 과연 두 사람이 결혼을 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는 함께 여행을 다녀오다 사고를 겪었다는 죄책감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남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로서는 참 아름답기 그지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그 사고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결혼과 동시에 작은 식당을 열었고 여자의 타고난 요리 솜씨 덕분에 식당은 날로 번창했다. 그래도 여자는 미안한 마음에 남편을 늘 성심껏 섬겼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최근 들어 형편이 좋아지고 여유가 생기면서 남편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외박이 잦아지고, 행동에 이상한 기미가 있었다. 어느 날 여자의 귀에 남자가 바람을 피운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고,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여자는 달려들어 상대방 여자의 머리를 거머쥐었다. 그 순간 남편의 무자비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더 충격적이고 마음 아팠던 것은 남편이 “왜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때리느냐”고 화를 내며 그 여자를 싸고돈 것이었다.

여자는 그 길로 병원을 찾았다. 진단서를 끊고, 고소장과 함께 이혼을 하겠다고 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세상에, 나이 오십이 넘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니…….”

흐느끼는 환자의 모습을 보면서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결국 환자는 치료를 받은 후 전치 2주짜리 진단서를 받아들고 병원을 나섰다.

그런데 그 환자가 병원을 나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비슷한 연배의 여자가 보호자로 보이는 남자와 함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환자의 머리는 군데군데 머리털이 뽑혀 나가 원형탈모증처럼 되어 있었고, 얼굴과 팔, 가슴 등에는 손톱으로 긁힌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었다. 사연을 묻기도 전에 남편은 아니지만 보호자라 자처하는 남자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젯밤에 어떤 여자한테 구타를 당했다는 것이다.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한데, 적반하장으로 상대방 가해자가 진단서를 끊어서 고소한다고 해서 맞고소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고 했다. 자기는 이 여자분이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는 것이 불쌍해서 그걸 말렸는데, 가해자가 자기를 고소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황상 아까 눈 부위를 봉합하고 진단서를 받아간 환자의 남편임이 틀림없었다.

의사는 환자의 진료에 대한 비밀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좀 전에 당신의 아내가 내게서 치료를 받고 진단서를 받아갔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환자가 사진을 찍고 치료를 받는 동안 남자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그런 ○은 콩밥을 먹여야 한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사실은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말이요, 우리 마누라가 그걸 알고는 쳐들어온 거예요. 그러곤 사람을 이 꼴로 만든 거지. 보다시피 내가 다리병신이라 지금까지 수십 년을 참고 살았지만 이제는 더 못 참겠어. 오죽하면 이 주제에 다른 여자를 만났겠어요.”

중년의 남자는 스스럼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결국 세 사람은 같은 의사가 써준 각자 다른 진단서를 들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의 연인은 아내를 가해자로 고소하고, 소송하고, 그렇게 법정에서 서로 다투게 될 것이다.

나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판단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증오하고, 또 아무리 말 못할 사정이 있다손 쳐도 50대 남자가 스스럼없이 타인 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감추지 않는 세상이 정상은 아니다 싶었다.

우리는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세상의 드라마는 불륜으로 넘쳐나고 정작 사랑하고 지켜야 할 것은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세상. 이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일까?

착한 인생, 당신에게 배웁니다
박경철 저 | 리더스북 | 2007년 12월

시골의사 박경철이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이후 2년 만에 내놓는 에세이집. 작가가 신문, 잡지 등에 기고한 글과 따로 쓴 몇 편의 글을 모은 것이다. 작가 박경철은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다양한 일 중에서 하나만 택하라면 당연히 외과의사를 하겠다고 할 만큼 ‘의사’로서의 삶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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