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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왜 사랑하지 않을까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과 만화 『올훼스의 창』

사랑은 판타지다. 꿈꾸지 않고 환상을 쫓지 않으면, 결코 사랑은 없다. 대상을 향해 다가가는 설렘, 대상에게서 느끼는 그 미세한 울림, 나와 대상 사이에서 떨고 있는 그 미묘한 자장을 우리는 다만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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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는 제목부터 도발적인 물음을 던진다. 두 커플의 ‘크로스 스캔들’이라는 카피처럼 영화는 네 남녀의 어긋난 사랑 이야기다. 부부라는 사회적 신분으로 맺어진 그들은 상대방의 배우자에게 강한 감성적 이끌림 혹은 성적 충동을 느낀다. 영화 속에서 한 남자는 다른 남자의 배우자와 뜨거운 성애를 나누고 한 남자의 아내는 다른 남자의 거만한 사랑에 빠져들어 갈등한다.

부부로 맺어진 신분의 남녀가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는 과연 악하기만 한 것일까. 영원히 한 배우자만을 사랑하기란 종교적이거나 관념적인 사변 속에서나 가능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랑은 종교적 수행이 아니라 감성의 떨림이기 때문이다. 일처다부의 복혼을 주장하며 우리의 박제화된 정신에 통쾌한 역전골을 쏘아 올렸던 『아내가 결혼했다』를 ‘불륜’이라는 사회적 통념에 갇힌 채, 읽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사랑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성이 윤리를 우선할 때라야 우리는 내 안의 진실한 ‘나’와 대면할 수 있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다름 아닌 사랑의 진정성, 계속성이다. 우리 사회의 윤리적 가치의 준수와 일탈이라는 측면에서는 영화의 두 커플이 벌이는 성애나 감정의 스와핑은 분명 불륜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그런 불륜의 미화에 있지 않다. 영화가 문제적인 것은 사회적 제도와 개인의 감성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인가?’하는 결코 간단치 않은 물음을 던지는 까닭이다.

“당신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하는 이 황당한 물음에 “예.”라고 단숨에 말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처지다. ‘첫사랑’이라는 낱말은 이미 ‘다음’의 사랑, ‘나중’의 사랑이 엄연히 존재함을 내포하고 있다. 결혼이란 결국 이후로는 ‘다른 어떤 사랑도 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금기요 사회적 서약이다. 사랑에 있어 결혼은 무덤인 것이다. 사회적 책임과는 별개로 감성의 영역에서는, 그러므로 결혼에 따르는 사랑의 맹세는 허위다. 어찌 한치 앞도 못 보는 인간이 앞으로 일어날 감성의 변화까지를 예단하여 단언할 수 있을까.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는 어느 광고의 카피는 그야말로 어떤 철학적 사유보다 직설적이며 정직한 고백이다. 그래서 우리들 모두는 지나간 사랑을 아쉬워하기도 하고 다가온 사랑에 불안해하기도 한다. 결혼한 사람들은 그 사회적 합의의 무게와 시선을 감당하기가 버거워 그늘진 곳으로 숨어든 사랑을 하고 은밀한 욕망을 꿈꾸기도 한다. 기혼자이거나 미혼이거나 우리가 첫사랑에 대해서 아릿한 그리움과 가슴 찌릿한 안타까움으로 못내 아파하는 것은 우리들이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린 바로 그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움직일수록 잊을 수 없고 가고 싶은 곳, 지금은 갈 수 없어 사무치게 그리운 그곳에 첫사랑이 있다.

운명의 첫사랑을 만나는 학교

기습한파에 우리네 가슴까지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에 필자는 언 가슴을 녹여주는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그것이다. 영화는 누구에게나 아련하고 가슴 뭉클한 첫사랑의 추억을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에 실어 들려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들은 누구에게나 처음인 그 사랑의 순수와 열정과 슬픔 속에서 사랑을 한다. 또한 누구에게나 비밀인, 그럼에도 애틋한 그 비밀을 털어놓고 싶어 안달해야 했던 그 젊은 날의 철부지와 만나 솔깃한 사랑을 듣는다.

빛이 필름을 투사하여 영화 속 세상을 만들어내듯, 내 안의 시선은 낡은 시간을 거꾸로 꿰뚫어 기억의 지면에 가닳는다. 영화 속의 학교는 내 기억의 어느 학교와 꼭 같다. 『올훼스의 창』의 무대인 음악학교다. 20여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그때에, 이제 막 사춘기를 벗어나 사랑이니 이성이니 하는 것에 괜스레 가슴 설레던 소년은 소설 한 편을 읽었다. ‘창’을 통해 맨 처음 보게 되는 이성과 운명적인 사랑을 하고 끝내 비극적으로 사랑을 끝내야 하는 그 전설의 사랑이 그려진 소설을 읽으며 얼마나 울었으며 가슴 아파야 했던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소년은 그 소설을 잊지 못했다. 책은 비록 조악하기 그지없는 문고판이었으나 그 감동은 대극장의 스크린으로도 채울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제목을 기억할 뿐, 저자도 주인공의 이름도 다 잊은 그 소설이 일본의 여류작가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가 원작인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검색사이트에서 만나는 그 주인공들은 낯설기 짝이 없지만, 젊은 날의 기억 속에서 감동은 여전히 물비늘처럼 반짝인다.

프랑스 대혁명기를 그린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작가는 『올훼스의 창』에서는 러시아 혁명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남장여인으로 키워진 명문 마이야가의 상속자인 유리우스, 혁명의 전운을 피해 독일로 망명한 러시아 귀족가문의 크라우스(알렉세이),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 고학생인 이자크를 중심으로 그들 사이의 사랑과 이별, 시대와 혁명 속에서 꿈틀대는 인간 군상들의 저마다 다른 삶을 파노라마처럼 그려낸다. 그들 운명의 세 남녀가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레겐스부르크 음악학교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두 주인공 상륜(저우제룬 분)과 샤오위(계륜미 분)가 만나는 곳은 단강예술학교다. 단강예술학교에 전학 온 상륜은 우연히 오래된 음악연습실을 지나다 귀가 활짝 열리는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듣는다. 그 피아노 소리에 끌려 들어간 연습실에서 상륜과 샤오위는 운명의 조우를 한다. 스스럼없고 깜찍한 샤오위를 보자마자 상륜은 자신에게 첫사랑이 찾아왔음을 직감한다. 둘은 곧 사랑에 빠지고, 이름을 묻는 상륜에게 샤오위는 대답한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야.”

상륜이 샤오위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녀는 더욱 신비스럽기만 하다. 함께 피아노를 치고 자전거를 타며 아름다운 사랑을 키어가지만, 상륜이 아는 것은 너무나 적다. 왜 수시로 결석을 하고 곁에 있는듯하지만 늘 그 부재감 혹은 존재의 가벼움이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들을 한 감정으로 옭아매주는 음악이 있고 피아노가 있다. 그들은 피아노의 흑백 건반과 같이 이미 한 영혼으로 이어져 있다. 사랑을 하는 연인들이 사랑하면 할수록 더 많은 비밀을 만들어내듯, 그들의 비밀은 자신들의 악보 위에서 음악이 된다. 마치 피아노 건반의 요동처럼, 악보 위에서 스스로 춤추는 음표의 몸놀림처럼.

각본, 연출, 주연까지 그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낸 중화권의 문제아 저우제룬은 영화의 마지막에 놀라운 반전을 준비해 놓고, 진부한 사랑 이야기에 식상해할 관객들을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진정한 ‘비밀’은 여기에 있다. 상륜과 샤오위의 사랑의 비밀은 그들이 만들어가는 순수한 사랑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연히 발견한 악보 한 장, 오로지 운명 또는 숙명의 안배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그 사건으로 인해 그들은 만나고 사랑을 한다. 위대한 음악이 한 천재의 예술적 영감에 의해 태어나듯, 그들의 사랑 또한 영혼의 교감을 통해 시간의 격리를 뛰어넘는다.

어른들이 사랑을 못하는 이유?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누구나 해봤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잊지 못하기에 첫사랑은 아름답다. 그 사랑은 처연하기에 더욱 애틋하다. 사랑에 있어 시행착오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랑하고 있는 ‘나’가 이미 어제의 꼭 같은 나와 대상이 아닌데, 어떻게 지난 과오를 밑거름 삼아 좀 더 나은 결과를 이루는 뜻의 시행착오를 유의미한 낱말로 만들 수 있을까. 사랑은 언제나 현재적이며 현재진행형이다. 사랑에 완성형이 있다면, 불륜이란 애초부터 있을 수 없다. 사랑이 아플 까닭도 없다. 불행하게도 사랑은 언제나 미완의 부정형(不定型)이다.

때문에 사랑은 판타지다. 꿈꾸지 않고 환상을 쫓지 않으면, 결코 사랑은 없다. 대상을 향해 다가가는 설렘, 대상에게서 느끼는 그 미세한 울림, 나와 대상 사이에서 떨고 있는 그 미묘한 자장을 우리는 다만 느낄 뿐이다. 확신이란 진실로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의 객기이거나 스스로를 부정하는 거짓 수사에 불과하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꿈과 환상을 현실의 조건들과 맞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순수와 열정과 심지어는 광기이기도 한 감정의 소용돌이, 그 무분별한 파동이 첫사랑이다.


저우제룬은 그 첫사랑을 바로 판타지 멜로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랑이 판타지란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그리고 묻는다. 왜 그렇게 정신까지 늙어 버렸느냐고? 샤오위가 낡은 피아노에서 우연히 발견한 악보(“SECRET”)의 마법에 걸린 것은 결코 정신병이 아니다. 누구나 사랑할 때는 마법에 걸리듯, 샤오위 역시 사랑의 마법에 걸렸을 뿐인 것을 어른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선생님(상륜의 아버지)이나 샤오위의 어머니나 다 같이 사랑을 잃어버린 어른들이다. 산타클로스를 잃어버린 어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동화 속 세상일 수 없다.

비밀은 지켜질 때에라야 비밀인 것이다. ‘공공연한 비밀’이란 말은 논리적으로 이미 틀린 말이다. 비밀이 누설되어 소문이 될 때, 누군가에게 그것은 참혹한 형벌이 된다. 하물며 동화를 잃어버린 어른들의 편견이 순수한 영혼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부정한 사회에서 사랑이 설 곳은 어디에도 없다. ‘마법’이란 현실에서 실현불가능하기에 마법인 것이다. 신은 믿는 자에게만 존재하듯이, 마법을 믿고 간직할 수 있는 자에만 사랑은 찾아든다.

그러나 꿈과 환상을 잃어버린 어른들은 자신의 사랑은 물론, 순수한 영혼에게서 마법 같은 사랑까지 빼앗아버렸다. 어른들은 자신이 사랑할 수 없음으로 아이가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자신이 꿈을 버렸음으로 아이가 꿈꾸기를 원치 않는다. 환상을 품지 못함으로 환상을 품는 것을 철없어 한다. 그러나 세상은 바로 꿈과 환상으로 살아 움직이고 커가는 것이다. 저우제룬은 바로 꿈과 환상을 잃어버린 세상과 세대들에게 판타지를 가지고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첫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꿈꾸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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