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사진을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
요즘은 장기 여행 전성시대다. 한 달, 두 달 정도가 아니라 1년, 2년 혹은 그보다 많은 세월을 돌아다니거나 5년, 10년씩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채 길 위에서 사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그럼, 그 돈은 다 어디서 나지요?”
배낭여행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종종 그런 질문을 한다. 물론 쾌적한 호텔에서 묵고 맛난 음식을 먹고 다닌다면 엄청나게 돈이 들겠지만 장기 여행자들은 그런 여행을 하지 않는다. 이 넓은 세상에 물가 싼 나라들은 매우 많다. 장기 여행자들은 유럽 등을 제외한 나라에서는 1박에 몇 천 원 하는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고, 거기서도 더 싼 도미토리를 찾아다닌다. 음식은 몇 백 원 정도에 해결하고 몇 십 원도 발발 떨며 아끼고 또 아낀다. 그래서 장기 여행자들은 대개 물가 비싼 나라들은 빠르게 통과하고 물가 싼 나라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데, 한 달 생활비로 약 30만~40만 원을 쓴다면 1년에 400만~500만 원이 든다. 물론 이보다 더 싸게 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 쓰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얘기를 학생들에게 해주면 모두들 “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부푼 꿈에 젖는다. 그러나 그들이 겪어야 할 열악한 숙소와 인내심, 그리고 오랜 시간 속에서 그것이 계속될 때의 어려움과 피곤함에 대해 얘기해주면 긴장한다.
장기 여행은 단기 여행과는 좀 다르다. 한두 달 미만의 단기 여행은 아무래도 즐겁고 흥분되는 경험들이 많다. 그런데 몇 달 혹은 해를 넘기는 장기 여행에서는 온갖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즐겁고 희망찬 것뿐만이 아니라 어려움, 슬픔, 지겨움 등까지 모두 겪으면서 삶에 대해 조금씩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사유의 폭이 깊고 넓어지면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가 점차 변한다.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과 거리를 두면서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찾으려 하며, ‘작은 철학자’가 되어간다. 이 부분은 단기 여행자들이 누리지 못하는 값진 경험이다.
장기 여행의 형태는 일찍이 서양과 일본에서 나타났다. 서양에서 여행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부터이다. 19세기부터 중산층 사이에서 여행 붐이 일다가 1960년대에 들어오면서 젊은이들에게까지 대중화된다. 특히 산업화에 반발하면서 반문화 운동의 선두에 섰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비판하고 일하기 싫다며 인도로, 동남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히피들도 있었고 평범한 젊은이들도 있었으리라.
그들의 여행 행태는 일반 여행자들과 달랐다.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게 노닥거리며, 노래 부르고 사유하며, 때로는 대마초를 피우면서 세상에 반항하고 자신들의 세상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들은 복귀할 날짜도 없었고 돌아갈 곳도 없었다. 최소한의 경비를 지출하며 넘치는 시간 속에서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 여행의 바람이 한국에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다. 1980년대 후반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이후 먼저 용감하게 여행하고 돌아온 이들이 금쪽같은 여행 정보를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시작했다. 이런 활동에 힘입어 1990년대 중반부터 해외 배낭여행은 점점 대중화되었고 점차 수많은 장기 여행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휴학계를 내고, 직장인들은 사표를 내고, 삶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은 세상에 등 돌리고 기약 없는 길을 떠났다. 이들에게 여행은 삶 속에서 기획된 이벤트가 아니라 궤도를 따라가던 삶을 뒤엎는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누구나 희열로 시작한다. 낯선 문화와 수많은 볼거리에 흥분하고 자신이 여행한 나라의 수, 세계 일주, 횡단, 종단 등의 실적에 집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행이 길어짐에 따라 점점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이런 여행자들은 바쁨을 멈추고 한군데 머물며 달콤한 시간 속에서 지금까지 누려보지 못한 평화와 끝없는 자유를 맛본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도 있다. 나는 여행하며 마약에 빠진 이들을 종종 보았다. 마리화나나 하시시 정도는 흔했고 케미칼, 즉 필로폰까지 손댄 이들도 보았다. 파키스탄에서 필로폰을 맞는 젊은 일본인을 보았는데 그의 눈빛은 덜덜 떨리고 있었고 아마 지금쯤 죽었을 것이다. 바라나시에서 마약을 너무 하다가 죽어서 화장터에서 태워진 이탈리아 여행자 얘기도 들은 적 있다.
무한한 자유가 이끄는 또 다른 함정은 섹스다. 세상의 중심을 벗어나 방랑하는 이들은 규정되지 않은 경계인이라는 해방감 속에서 성적인 쾌락에 탐닉하기도 한다. 특히 물가 싼 동남아나 인도에서 그런 사람들을 가끔 보는데, 결국 무절제한 생활 속에서 점점 생기를 잃고 추락한다. 이런 여행은 훗날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장기 여행은 자유가 넘치는 길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이 무너질 수도 있는 아찔한 모험이기도 하다. 몸보다 정신이 어렵고, 여행보다 길게 이어지는 삶이 어렵다. 언젠가 여행은 끝이 나고, 그때부터는 또다시 진짜 삶이 기다린다. 그러니 황야의 검객처럼 늘 깨어 있는 사람만이 먼 길을 갈 수 있다. 마약에도, 섹스에도, 어설픈 깨달음의 노래에도, 유유자적에도 쉽게 머물면 안 된다.
자신을 믿고 먼 길을 갈 용기와 확신을 가진 이라면, 장기여행은 일생에 한 번 해볼 만한 일이다. 이 시대에 장기 여행은 ‘성인식’처럼 인생의 통과의례와도 같다.
고대 신화 속 작은 영웅들을 보면, 어느 날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면서 자신의 근원을 알기 위해 익숙한 세상을 용감하게 등진다. 그리고 이곳저곳 떠돌면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히고 성장한 후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성장은 그렇게 단절로부터 시작된다.
* 저자 이지상의 블로그 - 이지상의 여행카페
※ 운영자가 알립니다.
<낯선 여행길에서>는 ‘중앙books’와 제휴하여, 매주 수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