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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날아온 메일 한 통. 한 고등학생이 이 세상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여행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라며, 자퇴를 할 예정인데 조언을 해달라는 얘기였다.
아, 그걸 보는 순간 난감하면서도 가슴이 찡했다. 과거의 내가 생각나서였다. 나 역시 고등학교 시절 종로에 있는 학교를 가면서 ‘여기는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다’, 북한산성에 오르며 ‘여기는 페루의 마추픽추다.’ 이렇게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 세상과 학교생활이 너무 갑갑해서 그런 상상으로 하루하루를 견뎠고, 집에 돌아오면 동네 뒷산의 숲과 나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여기는 아프리카의 정글이다.’라고 자기 암시를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에 동네와 산을 맨발로 돌아다니는 빡빡머리 고등학생이라니! 그 모습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해서 길 가던 여학생들이 피할 정도였다.
실제로 나는 반쯤은 미쳤었다. 그래서 아프리카에 가서 타잔처럼 살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아침이면 일어나 과일을 따 먹고 저녁이면 물고기 잡아 구워 먹고, 치타와 놀고 제인 같은 예쁜 여자와 뒹굴면서 살아가는 낙원, 나만의 왕국을 꿈꾸었다. 물론 아프리카에는 밀림보다 초원이 많다. 그리고 영화 <타잔>의 촬영지는 아프리카가 아니라 태국의 어느 정글 지역이며, 타잔이란 순전히 서구 중심적인 관점에서 만든 인물로 그 자체가 허구의 세계였다. 그러나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고등학생에게 그런 사실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심지어 어느 날은 밀항선을 타려고 인천 항구를 어슬렁거리기까지 했던 나로서는 자퇴를 하겠다는 그 고등학생의 메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해줘야 하나….’
워낙 바쁜 와중이어서 간단하게 답변하고 우선 블로그에 쓴 글들을 참고하라고 했지만 그날 내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당장 떠나지 않으면 몸살이 나고 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라면 당장 떠나야 한다. 정신 건강상 떠나야 하고 남은 인생을 위해서도 떠나야 한다. 내가 그랬다. 난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자마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났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토록 나가고 싶어했고 직장에 다닐 때는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현실이 답답해 자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 밤거리를 달리던 내가 뭘 망설였겠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돈이나 시간도 문제겠지만, 자신의 이기적인 열망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에 만난 30대 직장인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대기업의 샐러리맨으로 내 눈에는 아무 문제없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얘기를 나누던 중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긴 한데, 내 삶에 나는 없고 일만 있어요.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면 당장 떠나고 싶은데, 아내와 딸아이를 보면 차마 그럴 수 없고….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떠나고 싶지만 주어진 현실과 상황 때문에 그 마음을 접어야 하는 사람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사람에 따라 나이 앞에서 용기를 내지 못할 수도 있고, 나이 든 부모를 보면서 떠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를 수도 있으며, 돌아온 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쉽게 결정을 못 내릴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당장 떠나지 못하는 삶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때를 늦추며 여행에 대한 꿈을 키워가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오랜만에 후배를 만났다. 그 후배를 안 지 벌써 16년이 흘렀다. 1990년도에 조그만 여행 모임을 만들어 한 대학 강당에서 여행 설명회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그걸 들으러 온 학생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 누구보다 열심히 여행을 했지만 직장에 들어간 후 평범한 회사원의 길을 걸었고 벌써 40대 초반의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아직도 여행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남아 있다. 결혼한 후 아내와 딸과 함께 주말마다 근교 여행을 다니고 틈만 나면 짧은 해외여행도 즐긴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지난 여행담을 글로 옮길 때, 일상의 고단함을 잠시 잊은 채 행복해한다. 그는 언젠가 퇴직하면 긴 여행을 떠날 꿈을 꾸며 열심히 생활하고 돈을 모은다. 여행은 그에게 세상을 이겨나가는 원동력이다.
또 이웃 블로거 중의 한사람은 성실한 직장인으로, 일하는 틈틈이 커피 뽑는 것을 연구하고 빵도 직접 굽는다. 젊은 시절에 해외여행을 많이 했고, 한때 모든 걸 그만두고 여행이나 할까 하는 충동도 느꼈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 그의 꿈은 퇴직한 후 부부가 손을 잡고 여행을 하는 것이며, 태국의 치앙마이 같은 곳에서 빵과 커피를 팔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게 꿈이다. 지금은 매주 도보 여행을 하면서 그걸 꼼꼼하게 정리하고 블로그에 올린다. 떠나는 용기 못지않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여행에 대한 꿈을 키워가는 모습이 듬직해 보인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의 길이 있다. 어느 방향이든 남의 흉내를 내지 않고 자기 속도로,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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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이지상의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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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여행길에서>는 ‘중앙books’와 제휴하여, 매주 수요일 총 10편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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