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온달은 공주와 결혼한 덕분에 출세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무공을 세워 왕의 눈에 띈 덕분에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분제가 사라진 요즘에도 재벌 집안의 딸과 평사원이 결혼하면 보기 드문 일이라 하여 뉴스거리가 되는데 하물며 천 년도 더 전인 6세기, 엄격한 신분제가 존재하는 고구려 사회에서 미천한 신분의 바보가 공주와 결혼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설화와 사실 사이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온달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사람이다.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떨어진 옷을 입고 해어진 신을 신고 저잣거리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희롱하기를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대장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하였다. 왕은 매양 그렇게 말하였는데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로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였다.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 고구려에서는 항상 봄철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날 잡은 산돼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온달도 기른 말을 타고 따라갔는데, 그 달리는 품이 언제나 앞에 서고 포획하는 짐승도 많아서,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왕이 불러 그 성명을 물어보고 놀라며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가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치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이산肄山의 들에서 맞아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날쌔게 싸워 수십여 명을 베자,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분발하여 쳐서 크게 이겼다. 왕이 가상히 여기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고, 예를 갖추어 맞이하며 작위를 주어 대형大兄을 삼았다.
|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그려진 사슴 사냥에 열중하고 있는 고구려 무사들. 온달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 |
『삼국사기』 열전의 이 기록은 사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는 설화다. 설화는 글자 그대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의미를 캐내었을 때 비로소 역사적 사실이 된다. 그래서
『삼국사기』의 온달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봐야 한다. 하나는 성인이 된 평강공주가 상부 고씨와 결혼하라는 아버지 평원왕(평강왕이라고도 한다)의 말을 거역하다가 궁궐에서 쫓겨나 온달을 찾아가서 결혼하는 부분이고, 또 하나는 온달이 매년 봄 3월 3일에 열리는 사냥대회에 나가 출중한 솜씨로 왕의 눈길을 끌었으며, 외적이 쳐들어오자 선봉에 서서 맹활약하여 평원왕이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면서 대형 벼슬을 내리는 부분이다.
설화에서는 온달이 공주와 결혼한 뒤 공주의 도움을 받아 무예를 단련하고 무공을 세워 비로소 평원왕에게 인정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설화와는 반대로, 뛰어난 무예를 지니고 외적과의 전투에서 빛나는 공을 세운 온달을 평원왕이 사윗감으로 점찍은 것으로 봐야 한다.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고 한 평원왕의 말은 “나의 사위로 삼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온달은 외적과의 전투에서 빛나는 공을 세운 다음 공주와 결혼했을 것이다.
온달은 어떤 인물?좀 더 따져보자. 온달이 진짜 바보가 아니라는 것은 전장에서 그가 세운 무공만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된다. 흔히 설화에서 바보라든지 외모가 괴이하다든지 못생겼다든지 하는 표현은 특정 집단의 입장에서 볼 때 이방인 혹은 이단자를 묘사하는 표현 방식이다. 처용이나 탈해의 외모가 괴이하게 표현된 것도 그런 경우다. 그럼 온달은 누구의 눈에 이방인 혹은 이단자였을까? 여기서 온달은 과연 어떤 신분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온달이 정말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이었다면 제아무리 출중한 무공을 세웠어도 대형이란 벼슬에 오르진 못한다. 대형은 고구려 관직체계에서 7위에 해당하는 벼슬이요, 고구려에서 관직에 오르기란 귀족 신분이 아니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온달이 명문 귀족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만약 명문 귀족이었다면 두 사람의 결혼은 화젯거리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설화로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온달은 분명 뜻밖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만큼의 뜻밖의 인물 말이다.
명문 귀족은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미천한 신분도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귀족은 귀족이되 하급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어떤 사연으로 몰락한 귀족 집안의 후예일 수도 있다. 아무튼 온달은 공주와 결혼할 수 있는 통혼권에서 한참 벗어난, 명문 귀족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들과 엄연히 구별되어야 할 이방인이요 이단자였던 것이다.
그런 온달과 공주의 결혼이 성사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명문 귀족들의 반대가 빗발치지 않았을까. 평원왕이 공주를 명문 귀족인 상부 고씨와 결혼시키겠다고 한 것은 귀족들의 뜻을 따르고자 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
서울 아차산에 있던 <고구려군 요새 복원도>. 아차산 일대는 고구려 장수왕 때 고구려 영토가 되었으나, 그 뒤 신라 진흥왕 때 신라의 차지가 되었다. | |
그러나 온달은 마침내 공주와의 결혼에 성공했다. 이 대목에서 공주가 적극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신분은 낮지만 용감한 온달에게 마음이 끌린 공주가 아버지를 설득한 건 아닐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당시 평원왕으로서는 구세력인 명문 귀족 아닌 새로운 신진 세력을 등용할 필요가 있었다.
평원왕은 즉위 초, 왕권이 상당히 불안한 상태였다. 귀족 세력들 틈바구니에서 허약해져 있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평원왕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가 자신을 지지해줄 신진 세력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이때 새롭게 등장한 인물이 훗날 살수대첩의 명장이 된 을지문덕, 연개소문의 증조부와 조부, 그리고 온달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첫째 명문 귀족이 아니라는 점, 둘째 무장이라는 점이었다. 을지문덕은 온달처럼 집안 내력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웬만한 벼슬을 지낸 집안이라면 당연히 조상의 내력이 알려졌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을지문덕 역시 새롭게 등장한 신진 세력으로 보아 무리가 없다. 온달 또한 조상의 내력이 알려져 있지 않다. 눈에 띌 만한 관력을 지닌 조상이 없다는 뜻이다.
평원왕 때 등용된 을지문덕과 온달은 평원왕의 아들 영양왕 때에도 왕의 강력한 지지 세력으로 활약했다. 온달이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북쪽 땅을 찾아오겠다면서 출전했다가 아단성에서 전사한 것은 영양왕 1년(590)년의 일이요, 을지문덕이 수나라와 싸운 살수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건 영양왕 23년(612)의 일이다. 한편 평원왕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연개소문 집안은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영류왕 때 일급 귀족이 되었으며,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죽이고 태대막리지가 되어 왕이나 다름없는 최고 권력자 자리에 올랐다.
|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 온달이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싸우다 죽었다는 아단성이 이곳이라고도 한다. | |
‘바보’와 ‘울보’로 격하된 두 사람의 결혼이렇게 볼 때, 온달은 평원왕이 왕권강화를 위해 등용한 새로운 신진 세력이었으며, 무장으로서 공을 세워 평강공주와 결혼하고 처남인 영양왕 대에 이르기까지 왕의 강력한 지지자로 활약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온달이 구세력인 명문 귀족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다. 온달과 공주의 결혼을 두고 명문 귀족들은 ‘바보’와 ‘울보’의 결혼이라고 질투 섞어 비아냥거렸을 것이다.
두 사람의 파격적인 결혼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흥미진진한 요소가 덧붙여졌다. 온달은 우스꽝스런 외모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거렁뱅이로 한껏 격하되고, 공주의 헌신적컀 뒷바라지 덕분에 출세한 것으로 각색되었다.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온달 이야기는 어느 땐가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600여 년이 지난 12세기 고려 때, 김부식에 의해
『삼국사기』 열전에까지 올랐다.
『삼국사기』에서 온달은 을파소, 밀우, 유유, 박제상 등 충신들의 열전에 함께 묶여 있다. 김부식에게 온달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충신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2001년 충북 단양에서 무덤으로 여겨지는 돌무더기가 발굴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돌무더기를 온달 무덤, 또는 장군총이라고 부르고 있다. 무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온달산성도 있다. 온달이 싸우다 죽은 아단성이 바로 온달산성이며. 죽은 온달의 관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자 이곳에 묻었다는 것이다. 온달산성 바로 밑에는 온달이 수도했다는 동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온달이 죽은 아단성은 충북 단양이 아니라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전북 김제에는 봉성鳳城 온溫씨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봉성 온씨는 온달을 시조로 모시고 있으며, 문중에서는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추모제를 연다. 온달의 육신은 죽었으되, 그를 둘러싼 이야기는 지금도 살아 있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한국사 상식 바로잡기>는 ‘책과함께’와 제휴하여, 매주 금요일 2개월간 총 8편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