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가 거세한 성 불구자라는 것은 조선시대의 내시에 관한 한 옳은 얘기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내시는 전혀 달랐다.
조선시대의 내시는 맡은 업무의 성격상 궁중에 상주하면서 왕비, 후궁, 궁녀들과 가까이 있어야 했는데, 궁중의 여인들은 왕비부터 최하층 궁녀인 무수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왕의 여인, 즉 왕의 예비 신부들이기 때문에 왕 아닌 다른 남자를 가까이하는 것이 일절 금지되었다. 거세한 성 불구자로 내시를 삼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내시는 과거 급제나 음서로 벼슬에 오른 문벌 집안의 아들들, 또는 전쟁에 나가 군공을 세웠거나 학식이 뛰어난 젊은이들 가운데 장래가 촉망되는 자를 선발하여 왕의 측근에 둔, 최고 엘리트 집단이었다. 내시로 뽑히는 것은 탄탄한 미래와 부귀영화를 보장받는 지름길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거세한 성 불구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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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내시는 왕 측근의 최고 엘리트로서 성 불구자가 아니었다. 여진 정벌로 이름을 떨친 윤관의 아들이요, 문장가 윤언이의 동생인 윤언민도 내시였다. 사진은 윤언민의 묘지명. | |
고려시대 내시는 엘리트 집단고려시대 내시의 면면을 보면 그 실체를 실감할 수 있다. 고려에 성리학을 들여온 유학자 안향安珦,
『삼국사기』 편찬자이자 첫손 꼽히는 문벌 집안인 경주 김씨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金敦中, 구재학당이라는 사학을 열어 문헌공도를 배출한 해주 최씨 최충의 손자이자 권신 이자겸의 장인 최사추崔思諏, 최영 장군의 5대조로서 평장사 벼슬을 지낸 최유청崔惟淸, 의종의 태자 시절 스승인 정습명鄭襲明, 여진 정벌로 이름을 떨친 문하시중 윤관의 아들이자 문장가 윤언이의 친동생인 윤언민尹彦旼,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충헌의 사위 임효명任孝明, 이들이 모두 내시였다. 내시 출신으로 재상에 오른 자만 해도 수십 명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고려사』 열전이나 죽은 이를 위해 쓴 묘지명을 보면 주인공의 관력을 설파하면서 “내시에 발탁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내시를 하다 쫓겨난 뒤 잃어버린 내시 자리를 되찾기 위해 고위층에게 아부한 이도 있었다. 고려 때 내시 자리가 얼마나 선망의 대상이었는지 알 만하다.
고려의 내시는 왕의 최측근으로서 왕을 수행하고 국정 전반에 걸쳐 주요 업무를 맡아 하는 특수 집단이었다. 이자겸의 반란이나 무신정변 때 피살된 이들 중 상당수가 내시였다는 사실은 이들이 왕의 최측근이었음을 웅변한다.
내시는 지방이나 전쟁터에 왕명을 받든 봉명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하고, 외국으로 가는 사행에 참여하기도 했다. 특히 왕의 돈줄을 맡아 관리함으로써 왕의 수족 노릇을 했다. 왕실 재정을 관리한다든지, 국가 재정의 중추인 경창京倉 관리를 맡아 전곡錢穀의 출납을 관장한 것이다. 한 예로, 의종 때 내시 박회준朴懷俊은 왕실의 원찰인 흥왕사 관리를 맡아 했다. 왕의 돈줄을 관리하다보니 부정부패도 뒤따랐다. 의종 때 경창을 관리하던 내시 조강실趙剛實은 매일같이 뇌물을 챙기다가, 앞집 사는 관리 이공승李公升에게 들켜 혼쭐이 났다.
내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즉 고려 전기에는 오로지 문신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후에는 자기네도 내시가 되게 해달라는 무신들의 요구에 따라, 명종 16년부터 무신도 내시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내시가 소속된 관청은 내시성內侍省이 개칭된 내시원內侍院이었다. 천정天庭, 천원天院이라고도 불렸다. 일단 내시가 되면 내시 명부에 이름이 오르는데, 그만두거나 쫓겨나면 명부에서 삭제되었다. 내시적內侍籍 또는 금적禁籍이라 불린 이 명부는 내시들의 인사 기록부였던 셈이다.
내시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지금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문종 때는 20여 명이었다가 인종 때는 41명, 의종 때는 57명으로 차츰 늘었다고 한다. 고려 건국 초부터 무신정변이 일어난 의종 때까지 약 230여 년을 통틀어 내시의 총수는 114명이었다는 최근 연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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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직후에 한국을 여행한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조선의 내시. 그는 구한말 왕을 섬기던 내시였는데 키스는 “이 사람이 자꾸 안절부절 못해서 재빨리 스케치를 끝내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
내시와 환관, 그 차이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거세한 남자’ 내시는 고려 때는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달라서, 환관宦官 혹은 환자宦者라 불리었다. 환관은 액정국掖庭局(전 이름 액정원)이라는 관청에 소속되어 궁중의 잡역을 담당했다.
내시가 최고 엘리트인 데 비해, 환관은 노비 출신이거나 무녀나 관비 소생, 혹은 특수 행정구역인 부곡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벼슬도 문무 양반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남반南班에 속했다. 남반은 제아무리 높아봤자 7품 이상으로는 오를 수 없는 한품직限品職이다.
이렇게 내시와 환관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내시 하면 으레 거세한 남자를 떠올리게 된 것은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권에 들면서 내시와 환관이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을 보자.
무신정권기와 원 간섭기에 왕의 신임을 얻은 환관이 내시로 임명되는 예가 생겨났으며, 환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큰 원나라를 본떠 고려에서도 환관이 득세하게 되었다. 환관으로서 내시가 된 최초의 인물은 정함鄭?이다. 의종은 자신을 젖 먹여 키워준 유모의 남편이요, 의종이 친동생에게 밀려 하마터면 왕위를 놓칠 뻔했을 때 보호자로 활약해준 환관 정함을 내시에 임명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강력히 반대했고, 심지어 최숙청崔淑淸 같은 이는 정함이 “세를 믿고 권력을 남용”한다면서 몰래 죽이려다가 발각되어 외딴 섬으로 귀양을 갔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의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내 정함은 환관이 내시가 되는 데 물꼬를 텄다.
공민왕 5년(1356) 환관의 관청이 새로 설치되었는데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내시부內侍府였다. 그 뒤, 내시부 소속인 환관과 본래의 내시는 혼동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최고 엘리트 집단을 지칭했던 내시는 환관의 별칭이 되고, 본래의 내시는 이름은 물론이요 고유의 역할과 지위까지 잃어버렸으며, 조선 세조 12년(1466) 내시원 폐지로 영영 사라졌다. 그 후 내시는 환관의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내시라는 이름으로 환관을 기억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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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시는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으므로 족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이들도 족보를 만들었다. 왼쪽은 최석두 『가승家乘』, 오른쪽은 『이사문공파 가승』. | |
내시라 불리게 된 환관, 그들은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존재했다. 조선시대에 환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자리는 종2품 상선尙膳이었으며, 『경국대전』이 정한 환관의 수는 모두 140명,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말한 환관의 숫자는 335명이다. 환관이 법률상 완전히 폐지된 것은 19세기 말인 1894년 갑오개혁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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