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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의 원조, 과학사를 넘어 지성사 전체를 다루다 - 『과학혁명의 구조』

『과학혁명의 구조』는 그 역사 속 과학혁명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정상과학’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정상과학이란,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과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체계 속에서 현재의 패러다임을 지지하기 위해 일궈 나가는 과학의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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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대선 철이 되면 뉴스에 패러다임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정책 패러다임의 변화, 선거판의 패러다임 변화, 지난 5년간 국민들의 인식 변화… 5년이라는 정기적인 진단을 통해 각 시대의 생각들을 점검하는 대선이라는 행사는 패러다임이라는 말의 활용도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입니다.

지금이야 사회, 문화, 경제, 정치 모든 분야에서 쓰이는 개념이 패러다임이고, 그 의미도 대충이나마 보편화되어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만 패러다임의 첫 시초는 과학철학 분야였고, 무척이나 난해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철학의 역사를 다루는 과정에서 등장한 패러다임 개념은 꼭 과학철학이라는 한 분야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었고, 인류 지성의 변화에 대한 일반적인 흐름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지성과 현상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이 된 패러다임을 다룬 토머스 쿤의 책 『과학혁명의 구조』를 오늘 함께 읽어 봄으로써 새로운 패러다임을 유난히 외치는 시대를 유심히 관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능 지문에 워낙 자주 출제되기에 심지어 ‘수능 필독서’로까지 선정되는 『과학혁명의 구조』는 엄밀히 읽자면 사실 상당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책입니다. 읽는 심도에 따라서 난이도가 제각각인 책이지만, 오늘 리뷰는 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보편적인 수준에서 교양 수준으로 읽는 정도의 접근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기 위해서는 우선 ‘패러다임’개념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보편적 과학철학의 흐름이 어떠했는지를 더듬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철학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고, 또 인류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를 더듬어본 뒤, 그 속에서 『과학혁명의 구조』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이해하면 보다 쉬운 책읽기가 됩니다.

과학철학이란 이른바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생각을 전개해 해법을 찾아내는 이 방식에 대한 연구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른바 삼단논법에 의한 연역적 추론방식입니다. A는 B다, B는 C다, 그러므로 A는 C임을 입증하는 이 논리적 방법론의 함정은 바로 전제가 되는 ‘A는 B다.’가 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귀납적 방법론입니다. 과학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사례인 까마귀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100마리의 까마귀가 검다.’라는 사실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까마귀는 검다.’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도출된 ‘까마귀는 검다.’라는 전제로부터 삼단논법을 전개하면, ‘까마귀는 검다.’ ‘영수는 까마귀를 키우고 있다.’ ‘영수가 키우는 까마귀는 검은색이다.’라는 식의 전개가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귀납법의 한계에서 발생합니다. 100마리의 까마귀를 관찰해서 모두 검은색이라고 하여 모든 까마귀가 검다는 사실이 완벽해지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만약 500마리를 조사했더니 1마리가 흰색이었다면 위의 전제는 거짓이 됩니다. 귀납법으로는 어떤 방식을 사용하더라도 항상 전제가 오류가 될 가능성이 존재하며, 이 때문에 100% 확실한 참이라는 것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됩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이 점을 극복하기 위해 유명한 ‘반증가능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반증가능성이란, 한 명제가 맞는지 틀리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 명제가 참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서만은 안 되며, 그 명제의 ‘반증’이 가능한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까마귀는 검다.’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100마리, 1,000마리의 까마귀를 모두 찾아보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라, 위 명제의 반증인 ‘희거나 붉거나 누런 까마귀가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 반증이 확인되면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명제가 거짓이 되는 것이고, 그 반증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성립합니다.

포퍼의 이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과학적 명제를 영원불멸의 것이 아닌 한시적인 것으로 두는 시간쟀 개념을 포함한다는 점입니다. 포퍼는 과학사 전체를 짚으면서 어떤 이론도 100%는 없으며, 단지 반증을 통해 증명되기까지의 한시적 진리로만 명제를 규정합니다. 이와 같은 포퍼의 작업을 통해 과학은 ‘열린 체계’가 됩니다. 포퍼는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을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느냐’로 판단합니다. 반증을 통해 이론의 역전이 가능하다면 과학의 범주이지만, 애초에 반증이 되지 않는 명제들은 과학의 범주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오늘의 주인공,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 이론은 바로 이 칼 포퍼의 이론과 끝없는 논쟁을 거치며 확립된 이론입니다. 그는 포퍼가 이야기했던 반증을 통한 과학의 점진적 발전을 실제 역사 속 사례를 들며 뒤엎어버립니다.

실제 역사 속에서 존재했던 과학의 대격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이 천동설-지동설로의 전환입니다. 포퍼의 이론대로라면, 최초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던 이론은 그에 맞지 않는 관측 결과들이 나타나면서 바로 지동설로 돌아서야 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갈릴레이는 심지어 천동설에 대항하는 근거를 들고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종교재판에 끌려가기까지 했고, 수많은 지동설 지지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들을 천동설에 맞추어 새롭게 이론을 수정, 보완하는 현상들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단지 반증만으로는 과학이 뒤집히지는 않은 것이 역사입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그 역사 속 과학혁명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정상과학’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정상과학이란,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과 이론들이 가지고 있는 체계 속에서 현재의 패러다임을 지지하기 위해 일궈 나가는 과학의 결과물입니다. 과거 천동설의 시대에 모든 천문 관측들은 바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전제 하에서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모든 관측에 대한 해석은 천동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대의 정상과학은 바로 천동설과 그에 따른 천문 연구였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해괴한 결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정상과학의 위치가 흔들립니다. 처음 몇몇 결과들이야 천동설에 대한 수정과 보완으로 해결 가능했지만, 그래도 설명되지 않는 몇몇 사례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결과로 남으면서 기존 패러다임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지동설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나면서, 지동설을 중심으로 한 결과 해석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를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쿤은 명명합니다. 이 변화를 통해 과학자 집단은 구 패러다임과 신 패러다임 간의 대 논쟁에 휩싸이며, 그 속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승리하면 과학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이제 정상과학은 지동설이 되고, 천동설은 흘러간 구 시절의 패러다임이 됩니다. 당분간 지동설로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나타날 때까지는 우리 시대의 천문학 패러다임은 지동설이 될 것입니다.

토머스 쿤
(Thomas S. Kuhn, 1922~1996)
패러다임이란 결국 포퍼와 마찬가지로 과학과 진리를 영원불멸의 것이 아닌 한 시대의 한시적 지식으로 규정하는 개념입니다. 단 포퍼와 다른 점은, 그것이 결국 ‘사람 집단’에 의해 규정된다는 비결정성 부분입니다. 단순한 논리 선상에서라면 포퍼의 반증이 성공하면 바로 새 진리가 들어서야 하지만, 쉽게 말해 쿤의 관점은 ‘어디 사람 사는 게 그러느냐?’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새로운 진리에 대한 기존 세력들의 반감과 불신은 넘쳐나고, 그 거대한 지식의 세력이 변하기 위해서는 혁명적인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쿤의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의 범주를 넘어서서 일반론으로 접어듭니다. 논리선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집단과 사회성에 의해 과학이라는 진리의 범주가 결정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 무식하게 표현하자면 ‘권위를 가진 과학 지식인들이 만든 체계’일 뿐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패러다임 전환의 개념은 인간 집단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적용 가능한 개념이 됩니다. 한 회사가 비누를 만들어 크게 돈을 벌었는데, 어느 날부터 수익이 저하하기 시작합니다. 회사 일각에서는 소비가 풍요로워지면서 비누를 능가하는 새로운 고기능, 세분화 제품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하지만, 연구개발비가 만만찮다는 반발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까지 연구와 토론을 거치면서 새로운 제품에 대한 의견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면, 한순간에 회사 정책은 ‘개인청결을 위한 비누 생산’에서 ‘세안 전문 클렌징폼’으로 변화하며, 이러한 마케팅의 세분화 전략과 같은 부분도 결국 사내에서의 정책 패러다임 전환에 의해 집행됩니다.

『과학혁명의 구조』가 과학의 분야를 넘어서는 교양서로 계속 손꼽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범용성 덕분입니다.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한 정당한 해석은 어찌 보면 과학사의 범주가 아니라 인간 집단이 만드는 모든 종류의 의사소통을 다루는 범주에서 가능합니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른바 우리가 ‘사조’라고 부르는 한 시대와 공간이 갖는 사상적 트렌드가 어떻게 생성하고 소멸하는지를 보여주며, 이를 통해 인류 지성이 진화 혹은 퇴보하는 모델을 그려냈습니다. 단지 그것이 과학사의 예시를 통해 나타난 것 뿐, 결코 과학철학만의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찌 보면 과학철학이기 때문에 그토록 큰 영향력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과학의 시대, 모든 사고와 판단과 관찰과 해석은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틀 속에서 진행됩니다. 만일 마법을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시대였다면 그냥 과학이라는 분과만을 다루는 책이었을 것이었겠습니다. 아닌가요? 쿤이라면 아예 『마법혁명의 구조』를 썼을 수도 있겠습니다.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메타 서술은 단 하나의 논리만으로도 동시대의 많은 학문들에 공통적으로 적용 가능한 메시지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또한 그런 고전의 범주에 드는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기업, 국가, 사회 모든 분야에서 집단이 만들어내는 사고의 흐름을 이처럼 짚어내는 일반론도 드물 것입니다. 당장 대선을 며칠 안 남기고 또 ‘패러다임 전환’이 후보와 언론의 입에서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는 지금, 그 패러다임의 전환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곱씹어 볼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쿤은 책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일종의 혁명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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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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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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