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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PD의 그들은?>을 시작하며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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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새로 연재를 시작하는데 연재의 제목은 <그들은 무슨 책을 읽어왔나?>란 제목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책이 있을 것입니다.

안녕! 안녕! 여러분 모두 안녕!

이제 새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연재의 제목은 <정혜윤 PD의 그들은?>이란 제목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책이 있을 것입니다. 나 역시 몇 시간 차분하게 앉아서 생각한다면 몇 권의 책과 수많은 장면과 수백 개의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 속에서 그보다 훨씬 많은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

어느 해 추석, 나는 실크로드에 있었다. 리비아나 쿠바 같은 곳에서 각 나라 언어로 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젊은 깐수 정수일의 개인적 삶과 실크로드 이야기에 매료돼 있기도 했었고 우루무치 박물관에 있다는 미라 ‘누란 미녀’가 보고 싶기도 했었고 ‘당신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란 뜻의 이름을 가진 타클라마칸 사막이 보고 싶기도 했었다. 하여간 난 한 번 보면 눈에서도 가슴에서도 씻어낼 수 없는 해질녘 풍경을 선사한 명사산에서 놀다가 밤늦게 둔황에서 투루판으로 가는 침대 열차에 뛰어올라갔다. 그 밤 짜디짠 건조 두부를 안주 삼아 이름도 알 수 없는 미지근한 병맥주를 마시며 이탈리아 작가 칼비노의 『우주만화』를 읽었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길을 갔답니다. 세상이 변하는 가운데에서 나 역시 변화하면서 말입니다. 때때로 나는 살아있는 존재들의 수많은 형태 중에 나보다 훨씬 더 <하나>에 가까운 누군가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알에서 깨어 나온 어린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오리너구리나 아직도 키 작은 식물들 한가운데서 사는 비쩍 마른 기린처럼 미래를 예고하는 <하나>도 있었고 혹은 신생대가 시작된 후에도 살아남은 공룡들처럼 돌아올 수 없는 과거를 증거하는 <하나>도 있으며 아니면 악어처럼, 오랜 세월 속에서 요지부동으로 자신을 보존하는 방법을 발견하여 과거를 증거하는 <하나>도 있었습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어딘가 나보다 우월하고 고귀해 보이며, 또 그들과 비교할 때 내가 보잘것없게 보이도록 하는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나 자신을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 중 누구와도 나 자신을 바꾸지 않았을 것이란 구절을 읽었을 때, 난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할머니는 시집 온 그곳, 그 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70년을 꼬박 살다가 곡기를 끊는 방식으로 스스로 죽음을 마련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은 정갈한 미라 그 자체였다. 장례식장의 곡은 한 가지 내용이었다. “죽어서야 이 땅을 떠나는구나.” 난 그 말이 너무나 슬퍼서 “불쌍한 할머니 불쌍한 할머니,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가신 불쌍한 할머니” 하면서 거의 기절할 듯이 통곡했다. 하지만 그날 밤 칼비노의 그 문장 “나는 그들 중 누구와도 나 자신을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란 문장은 결국은 내가 그날 장례식장에서 했었어야 할 말을 제대로 알려줬다. 죽는 순간에 깨끗한 미라가 되길 원했던 할머니에게 어울리는 문장은 불쌍한 할머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책과 관련해 나에게 개인적으로 즐거운 기억은 우리 집의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코너에서 여름에 바다에서 쓰려고 사뒀지만 사실은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고무보트를 발견해 고무로 된 노를 저으며 보트 속에 콕 박혀서 책을 읽던 일들이다. 그땐 『톰 소여의 모험』『허클베리 핀』『메리 포핀스』『빨강머리 앤』『15소년 표류기』『철가면』『걸리버 여행기』『몬테크리스토 백작』과 전집으로 산 계몽사판의 위인 전집, 명작동화들 그리고 농민신문 같은 걸 읽었을 것이다. 그런 걸 읽다가 ‘밥 먹어라’ 소리를 들으면 ‘조금만 더요!’라고 몇 번 소리치다가 요트 밖으로 나갈 때 어쩐지 나 자신이 남과는 다른 특별한 아이라는 흐뭇한 기분이 들어서 맛있게 밥을 먹는 형제들을 측은하게 바라보곤 했던 일들이 떠오른다. 특히, 좋아했던 『메리 포핀스』의 아무 때나 흥! 흥! 거리는 건방지고 퉁명스러운 말투를 한동안 따라하다가 엄마에게 등짝을 맞았던 일도 생각난다. 또 『메리 포핀스』가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집에 있을 건가요?’란 아이들의 질문을 받자 ‘바람이 변하기 전까지’란 대답하고 정말로 하늬바람이 불던 날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장면엔 너무나 압도돼서 바람의 방향은 어떻게 변하나 보려고 손을 내밀 때 내 인생 최초로 서해안의 하늘에 노을이 빨갛게 지는 걸 봐버렸고 그게 어쩌면 내가 지구의 아름다움과 제대로 직면한 첫 순간이 아닐까 싶다. 『톰 소여의 모험』을 읽으면서 톰이 사랑하는 예쁜이 베키가 선생님한테 혼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이 했다고 나서서 대신 매를 맞아주는 장면을 보곤 고자질로 날밤 새우는 우리 반 남자들을 한동안 경멸하기도 했다. 나중에 인디언 조의 황금을 동굴에서 꺼내와 부자가 된 허클베리 핀이 양복과 넥타이를 풀어 던져버리고 다시 부랑자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나 혼자 가만히 ‘허크! 나는 너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줄게.’라고 되뇌기도 했는데 세상의 외로운 아이의 단 하나의 진정한 벗이란 모티브는 고등학교 때 더 강화되어 나는 헤르만 헤세의 남자 주인공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농민신문은 나에게 신 농약 정보와 벼멸구의 종류, 씨앗의 세계에 대해 알려주었는데 그런 기사를 읽으며 어른들의 흉내를 내면서 근심스런 표정을 지었을 나를 생각하면 좀 우습다. 그러다 가을이 되어 추수철이 되면 농약이나 씨앗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염원이자 실속이란 생각을 했었다.

6학년 때 우리 반에 전학 온 얼굴이 하얀 남학생. 그가 내 인생 최초로 나에게 책을 선물한 아이일 거다. 그 아이의 엄마와 우리 엄마는 여고 동창이었는데 행복은 성적순이라고 굳세게 믿는 우리 엄마 입장에선 반에서 꼴찌에 가깝던 그 아이 엄마의 근사한 결혼 생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아이 엄마의 입장에서도 툭하면 여기저기서 여고 때 성적 이야길 꺼내는 우리 엄마가 싫기는 덜하지 않아서 우리 둘의 우정은 가문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어른들의 유치한 음모를 몇 번 지난 뒤 어느 날, 그가 나에게 책을 한 권 선물했는데 바로 놀랍게도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가문의 운명 때문에 비극적 최후를 맺는 두 연인의 이야기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난 그때 처음 셰익스피어를 알았고 나중엔 셰익스피어를 꽤 열심히 읽는 여학생이 되었지만 4대 비극은 싫어했다.

 나의 독서 생활에 획기적인 사건 중 하나를 꼽으라면 그건 바로 내 친구 중 한 명이 초경을 했던 것 아닐까 싶다. 성교육이란 걸 받지 않은 우리는 서로 더 나을 것 없는 상식으로 머리를 맞대고 대책회의를 했는데 결론은 ‘비밀스럽고 무서운 어떤 일이 당신들 모두에게 어느 날 반드시 일어난다. 그 일은 여자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였다. 완벽한 공포영화의 플롯이었다. 그때 난 세 가지를 굳게 결심했다. 첫째, 함부로 풀숲에 오줌을 누지 않는다. 개구리나 뱀의 알을 낳으면 안 되니까. 둘째, 남학생들과는 옷깃도 스치지 않는다.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란 책에는 남자랑 실컷 키스와 애무를 나눈 날 생리를 하고 공포에 사로잡히는 여자애 이야기가 나오는데 난 그 장면을 읽고 꼭 내 일인 것처럼 깔깔깔 웃었다.) 셋째, 성숙한 여자의 세계로 공포 없이 진입하기 위해 멋진 여자들이 나오는 책을 읽어둔다. 그래서 엄마의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가장 큰 서점에 가서 전과나 문제집을 살 때 여자가 나오는 소설도 같이 사기 시작한 것이었다.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은 임어당이 여자인 줄 알고 산 책이고 『여자의 일생』이나 『댈러웨이 부인』은 읽는 걸 깨끗이 포기했고 『제인 에어』도 당시엔 아무 재미를 못 느꼈었다. 사실 그 나이 땐 얼굴이 그다지 예쁘지 않은 여자가 잘 되는 것도 선뜻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었으니깐.

 폭력과 타락, 잔인함, 비관주의 없이도 무조건 비극적이고 싶은 사춘기. 장 콕토가 말한바 “인생의 진짜 비극은 한 인간이 미리 품고 있던 생각과는 관계가 없다. … 내면에 자리 잡은 이상야릇한 요소들 때문에 늘 어쩔 줄을 모른다.” 딱 그런 시기인 사춘기가 나에게도 와서 당시의 나는 10대의 영원한 속성이라 할 만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눈동자를 하고 매일매일 쫄면을 먹으러 가던 여학생이 되었는데 존재의 불안감 때문인지 그때부터 책 속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책의 많은 요소 중에서 캐릭터에 주목하게 된 것인데 이를테면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에 나오는 니나(예쁘진 않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청춘의 대범함을 두 눈동자에 가득 담고 있던 니나)와 평생 그녀를 사랑하다가 자살해버린 정신과 의사 슈타인.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나오는 모범생 한스 기바란트와, 시를 좋아하고 위악적이고 내 눈엔 너무나 멋져 보였던 하일너 (한스 기바란트가 하일너에게 자신은 공부밖에 모르는 범생이지만 그것보다 더 나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을 참 좋아했다. 나도 누군가 나에게 지금의 인생에서 공부보다 더 나은 것에 대한 힌트를 준다면 즉시 따라나설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릴케의 『말테의 수기』. 시인 지망생 말테가 많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마다 이 모든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라고 대답을 달아놓는 장면 등은 몹시 좋아했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어디 있어?’란 말을 들고 사랑의 카운슬러로도 활동했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인생을 결정했다고 할 만한 최초의 책은 엉뚱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 그건 초봄이었을까? 집 옆의 거머리가 들끓는다는 소문이 있는 미나리강을 따라 걸으면서 오빠가 서울에서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다리가 맥없이 풀려 버렸다. 그건 『전태일 평전』이었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부제를 달고 비닐에 쌓여 있던 책.

 내가 그 책을 읽던 그 미나리강엔 오래전엔 누더기 비닐하우스에서 살던 꼽추 가족이 있었다. 비닐하우스 집 아들과 딸은 동네의 좀도둑이었는데 우리 형제는 그 집 형제와 어찌어찌 친해져서 동네의 소문과는 관계없이 꽤 즐겁게 놀았고 나중엔 함께 과일 서리를 하러 다니곤 했었다. 특히 엄청나게 비가 내리던 날 바구니를 들고 우박처럼 떨어지던 과일을 주우러 빗속을 뛰어갈 때 꼽추의 큰아들이 내 손을 꼭 잡아주었던 그 느낌은 꽤 괜찮았다. 그런데 그들의 아버지인 꼽추가 추운 겨울밤에 술 한 잔 하고 돌아오다가 얕디얕은 미나리강으로 미끄러져 떨어졌다가 꼽추의 몸이라 빠져나오지 못해 동사한 비극적인 사건 뒤에 그 형제는 어디론가 모조리 떠나버렸다. 꼽추가 죽은 그 며칠 뒤에 꼽추의 아내와 어린 딸이 버스 정류장 입구에 앉아서 미나리를 파는 걸 본 게 내가 그 가족을 본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날 우리는 저녁 식사자리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미나리무침을 할당받아 먹었다. 미나리강에서 읽은 『전태일 평전』은 그날 내가 할당받아 먹던 미나리무침과 꼽추 가족을 뒤늦게 생각나게 했다. 어쨌든 난 『전태일 평전』을 읽은 이후 처음으로 쓸모 있는 직업을 떠올렸는데 기자가 되기로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고향을 떠나던 날은 어땠을까? 정확히 이랬다. “그는 돌멩이들을 걷어찼네 / 발을 질질 끌고 거리를 내려가는 꼬마처럼 / 그는 가로등 기둥 아래 멈춰섰네 / 그리고는 어깨를 펴고 /모퉁이를 돌아섰네 / 그렇게 그는 떠나갔네” (『제임스 딘』 중에서) 그 가방 안엔 『전태일 평전』이 있었고 곧 나는 만나게 되었다. 영도다리를 걷다가 바닷물에 둥둥 떠 있는 양배추잎을 주워 먹으러 바다로 뛰어드는 땟국 처덕처덕한 앙상한 소년의 숱한 이미지들을.

*

앞으로 쓰는 칼럼은 어떤 이의 인생을 책으로 엮어 본 작은 전기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한 개인이 책과 만나는 지점에 관한 이야기가 주축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쓰다 보면 책에 대한 헌사가 움직이는 정신에 대한 헌사가 될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에서 관능적인 여인은 다리 건너편에서 큰 소리로 연인을 부릅니다. 어서 오라고. 나랑 몸을 섞자고. 다리를 건너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관능적인 여인이 책이었던 사람들, 그들 앞엔 어떤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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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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