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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 잊힌 풍경,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성탄’ 무렵의 청계천에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청계천의 밤은 낮보다 환하다. 복원된 인공하천 주변에 심은 나무와 주변 건물을 장식한 꼬마전구의 불빛을 받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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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무렵의 청계천에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청계천의 밤은 낮보다 환하다. 복원된 인공하천 주변에 심은 나무와 주변 건물을 장식한 꼬마전구의 불빛을 받아서다. 늦은 밤 데이트 나온 연인들의 발걸음은 캐럴보다 경쾌하다. 아빠와 엄마 손을 잡은 아기의 털모자 위로는 아기 예수의 축복이 내리는 듯하다. 세상은 온통 웃음뿐인 듯, 청계천의 밤은 가난도 소외도 없는 듯 그렇게 평화롭게 우리 앞에 있다.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 칠흑 같은 밤이 술렁거렸고, 땀에 찌든 막벌이꾼들의 치미는 근육덩어리들이 // 반짝였다, 어물전에 산더미처럼 쌓인 생선의 비늘들이 // 진압치 못해 축축한 성욕처럼 온 세상 위를 꿈틀대며 기어갔다 // 그리고 밀어닥친 홍수처럼, 아님 밀려난 흥남부두처럼 // 사람들이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마구 건너갔다

보따리가건너갔다비틀거리는어깨들이건너갔다물샐틈없는크리스마스캐롤들이건너갔다생계유지걱정무겁게매달린자식새끼들이덕지덕지건너갔다큼지막한헤드라이트불빛들이사방에서마구덮쳐얼굴을갈겼다도대체숨쉴틈을주지않는이땅은누구땅이냐핏발불끈솟아오른리어카군의험상궂은욕질이그틈을비집고건너갔다김이모락나는순대가건너갔다홍어찜이건너갔다이조시대민중의수탈을절인오줌냄새가건너갔다그북새통을쫓겨나못비킨다못비켜이자리는죽어도못비킨다아낙네가보따리를움켜쥐고길을건너갔다차량의홍수가흐르는밤거리희미한백열등밑에서맹인여가수의마이크목소리가축축히젖어들었다오늘도걷는다마는청계천6가내가쫓겨나는것이아니다좀더끈끈한삶그래도우리들의희망은희미한가로등과비린내내일의가난을어쩔수없을지라도성시반빡이는것은살아있는것들일뿐산다는것은얼만위대한가물샐틈도없이사람들이횡단보도를넘쳐흘러갔다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가난의 뱃속에서 희망의 씨앗이 잉태됐고 // 나는 온통 시끄러운 아수라장 속에서 알았다 // 반짝이는 것은 비참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을 // 목숨은 어떤 비참보다도 끈질기다는 것을 // 현실은 어떤 꿈보다도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 성스러움의 끈적끈적함을, 끈적함의 견고성을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청계천 6가”에서 살았던 시인에게 청계천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칠흑 같은 밤이었다. 맹인 부부가 노래를 부르던 거리였다. 생계유지 걱정으로 고민하는 사람들로 빽빽한 이곳은 “축축한 성욕”과 “생선 비린내”와 “욕질”과 “땀”과 “오줌냄새”로 아수라장인 세상이었다. 캐럴은 경쾌하지 않았고, 아기 예수의 축복도 당연히 없었다.

이 시 <성탄>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20대의 대부분을 감옥과 강제 징집된 군대에서 보내야 했던 젊은 시인 김정환의 것이다. 그는 1982년에 출간된 첫 번째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창비)에 이 시를 실었다. <성탄>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시어가 거칠고 두 번째 연에 띄어쓰기가 없어서지만, 무엇보다 이 거친 시어 안에 시인이 새겨 넣은 연민과 희망의 정서가 체험적이어서다. 체험 속엔 슬픔이 가득하다. 청계천을 거닐면서 만난 수많은 목숨의 비참함에 슬퍼하는 시인은, 그러나 “목숨은 참 끈질기고 현실은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 물샐틈없는 인파로 가득 찬 // 땀 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 어느 핏발 서린 리어카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 어느 맹인 부부 가수의 노래도 //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어느새 텅 빈 거리여 //칠흑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김정환의 <성탄> 이후 청계천을 연민과 희망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는 록그룹 ‘천지인’이다. 천지인은 청계천의 밤 풍경과 희망을 노래한 <청계천 8가>를 1993년에 발표한 1집에 실었다. 천지인은 당시에 한국 사회를 강타했던 “신세대”라는 유행어를 빌려와 “민중 음악의 신세대”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패기만만한 20대 청춘들이었다. 민중 음악의 지향이 그러하듯, 이들도 자신의 노래가 카페의 화려한 조명 빛 아래에 앉아 입맞추는 연인을 위한 배경음악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노래가 공장과 거리, 황토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노동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를 바랐다. 그 덕에 천지인은 10년 넘게 대학가 축제나 집회 현장 등에서 열심히 노래를 불렀지만 일반인에게 여전히 낯선 그룹이 되었다.

<청계천 8가>과 <성탄>에 그려진 청계천의 정서적 풍경은 청계천 ‘8가’와 ‘6가’만큼이나 가깝고 닮았다. 그것은 가난이고, 연민이고, 그러나 희망이었다. 10년의 차이를 느낄 수 없을 만큼 둘은 청계천의 정서를 공유한다. 청계천을 통해 얻는 깨달음, 그러니까 <청계천 8가>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같은 아름다운 깨달음은 “반짝이는 것은 비참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을 // 목숨은 어떤 비참보다도 끈질기다는 것을 // 현실은 어떤 꿈보다도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 성스러움의 끈적끈적함을, 끈적함의 견고성을” 같은 구절 속에서 오랫동안 잉태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년을 사이에 두고 청계천을 노래하는 시인과 천지인의 정서적 풍경이 닮은 것은 ‘청계천’에는 지리적 명칭을 뛰어넘는 ‘시적 울림’이 있어서다. 청계천은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구와 중구의 경계를 흐르는 도심 하천이다. 그런 까닭에 일찍부터 이곳엔 가난한 사람들이 빨래하고 멱을 감으려고 모여들었다. 박태원이 1936년 <조광>에 발표한 소설 『천변풍경』에는 청계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그려져 있다. 포목전 주인, 한약방 주인과 양약국 약사, 금은방 주인, 카페 여급, 기생, 미장이, 첩, 여관 주인, 사법 서사, 노름꾼, 이발사, 행랑살이 어멈, 당구장 보이 등. 서민이라면 서민이고 민중이라면 민중일 이들의 삶은 아버지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어머니 모습, 그러니까 한국인 삶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하고, 욕심 많고, 그러나 절망이 가까이 있었던 만큼 저마다 가슴속에는 삶의 이유와 희망 하나씩은 품고 사는 사람들. 그 힘으로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연결해준 그 사람들의 모습이 청계천에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전쟁을 거치고, 1960년대의 가난을 버티고, 1970년대 근대화에 밀리고, 1980년대 개발 바람에 휩싸이고, 1990년대 선진화에 쫓겨도 청계천의 그런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한국 현대사의 거친 풍랑 속에서 청계천은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버지의 집이었다가, 동생들 학비를 대려고 학교를 중퇴한 누이의 일터였다가, 성공을 꿈꾸는 젊은 디자이너의 꿈이기도 한 곳, 심지어 음란비디오 상인이 생계를 유지하던 곳이 청계천이었다. 그러니까 청계천은 삶이다.

청계천은 또한 한국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압축성장 신화의 그늘이었다. 봉제 공장에서 ‘시다’로 일하며 동생의 학비를 대야 했던 누이의 눈물을 먹고 자란 한국자본주의의 가장 슬픈 모습이 여기에 있었다. 누이들은 열다섯 시간이 넘게 일을 했고, 미싱을 밟는 발은 퉁퉁 부었고, 실밥을 뜯는 손끝에서 지문은 사라져갔다.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작업을 견뎠다. 그러니까 청계천은 노동과 소외의 현장이었다.

전태일. 그는 노동을 위해 그리고 사랑을 위해 이곳 평화시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 모두를 변화시켰다. 그가 죽은 것이 아니다. 사회의, 우리 안의 죽음을 그가 태워버린 것이다. 그의 삶으로 피 비린 눈물과 찬란한 전망의 비극적인 관계가 극복되었다. 그의 불꽃으로 가장 촉촉한 눈물이 태어났다. 그의 죽음으로 가장 위대한 노동이 태어났다. 그의 사랑으로 가장 실천적인 지도력이 태어났다. 그의 귀환으로, 가장 아름다운 미래전망이 태어났다. 그의 삶과 죽음은, 생각할수록, 희망의 규모를 거대하게 하고 아름답게 한다. 그의 빈자리는 검고, 그의 자리는 빛난다. 전태일. 그의 이름은 희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청계천은 희망이었다. 평화시장이 바라다보이는 청계천 6가에 세워진 전태일 기념상에 김정환은 이렇게 새겨 넣었다. “전태일. 그의 이름은 희망이다.놡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헤집고 다닌 후 25년 만에 다시 청계천을 찾은 김정환에게 여전히 청계천은 희망이다.

1970년 11월 13일 ‘어느 청년 노동자’가 분신한다. 그의 이름은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스물세 살의 재단사 전태일.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과 함께 제 몸에 불을 붙여 가난을 외면하는 사회를 불 질렀다. 그리고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으로 남은 자들에게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에 나설 것을 재촉하였다.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상아탑에 갇혀 있던 지식인과 학생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였다. 많은 사람이 거리로, 공장으로, 농촌으로 나갔다. 시인은 순수를 버리고 참여를 택했고, 노래는 사랑을 버리고 투쟁을 선택하였다. 그렇게 세상의 이쪽과 저쪽이 만났다. 그 속에 전태일을 만난 김정환이 있고, 청계천을 만난 천지인이 있었다. 청계천, 그것이 궁핍한 삶과 힘든 노동과 소외를 딛고 희망으로 시와 노래에서 살아났던 것은, 그곳에서 사람들 사이의 연대를 위한 자기희생의 불꽃이 가장 먼저 피워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청계천은 누군가의 치적이 되었다. 청계천에서 가난과 노동의 풍경은 사라진 듯하다. 휴일이나 점심시간의 짧은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웃음으로 가득하다. 풍경이 바뀌면 기억도 변한다. 사람들은 벌써 지난 세기 100년 동안 청계천에서 목숨 줄을 이어왔던,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였을 그들의 자취를 서서히 잊고 있다. 깔끔한 초고층 빌딩이나 주변에 분양될 수십 층짜리 아파트로 향하는 우리의 눈엔 바로 얼마 전까지 고가도로 아래의 칙칙한 거리와 낡은 건물에 모여 일했던 작은 개미들의 삶을 기억할 시간이 없다. 청계천은 지금의 모습이었던 시간보다 몇십 배나 오랫동안 삶과 노동의 공간이었지만, 더 이상 오랜 노동과 연대의 결과로 만들어왔던 청계천의 시적 울림은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청계천은 언제나 변해 왔다. 1958년 복개공사에 착수한 이후, 수십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고, 2005년 10월엔 다시 인공하천으로 변해 도심을 가로지르고 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여전히 산다는 사실이다. 청계천은 누군가의 치적도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세월을 어느 한 시점으로 붙들어 매어놓을 수는 없다. 도시도 변해가고, 그래서 사람들이 사는 거리의 의미도 변해가겠지만, 삶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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