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5년 해방을 축하하고자 전남 광양서국민학교 교정에 모인 군민들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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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와 해방 이후 한국현대사에 젊은이들이 폭발적인 관심을 보여주면서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연구하는 ‘운동’은 힘을 얻었지만, 정치권력에는 사갈시되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2』가 어느 날 ‘판금’ 목록에 들어 있었고, 최장집 교수가 편집한 『한국현대사 I』(열음사)과 송남헌 선생의 저서인 『해방 3년사』(까치) 등이 같은 조치를 당했다.
더 나아가, 집권당의 고위간부가 이런 ‘운동적 연구·출판·독서현상’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오늘의 정치·사회·경제·문화적 현실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책’에 그 책임이 있다는 식이었다. 1985년 11월 하순, 정부와 민정당은 날로 격화되고 있는 학원사태의 발생이 일반적으로 8·15 이후의 현대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문교부·문공부 등 관계부처와 국사편찬위원회·정신문화연구원 등 관계기관과 협의하여 현대사를 ‘전면 재기술’한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11월 26일 정부와 민정당은 민정당사에서 열린 당정정책조정회의에서 이같이 결정했는데, 이 회의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일부 대학생들이 8·15 이후의 현대사를 독재·부정선거·장기집권 등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고 기성세대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고 “역사가 야사·비사·소문에 의해 오염되고 흥미 위주로 왜곡되는 것도 사회혼란의 근본요인이 되고 있으니 현대사를 시대별·정권별로 재정립하는 일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노 대표위원의 주장에 따라 정부 측은 8·15 이후의 현대사를 획기적으로 재조명하여 대학생을 포함한 청소년들의 역사의식 강화에 초점을 두어 다시 기술한다는 것이었다. 자유당 시대와 1960년대 초반까지 군사정권에 대해 강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던 <경향신문>은 발행인이 정부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바뀌면서 정부의 입장을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보도 태도를 보였는데, 1985년 11월 28일자 사설 ‘재정립해야 할 역사관-자기비하적 역사기술 청산하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나왔다.
“사실상 지난 몇 해 동안 이른바 민중사관이 확산되면서 제1공화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인하고 마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정권’인 것처럼 기술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버렸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때 단정으로 독립정부를 세우지 않았더라면 통일된 독립정부가 설 수 있었을 것이라는 식의 논리야말로 지나치게 감상주의적인 재단논리(裁斷論理)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정부가 발족되기 이전에 이미 북한 전 지역엔 각급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사실상의 행정기능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논의가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인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 사설은 이어 “역사의 기술이 지나치게 국수적인 경향으로 흘러 종족우월을 강조하는 것이어서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자기 역사를 비하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단정하고 있는데, 특히 ‘춘추사관’ ‘식민사관’ ‘민중사관’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었다.
“유교적 대의명분만을 지나치게 앞세웠던 조선왕조 시대의 춘추사관, 한민족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던 식민지사관, 그리고 국가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는 오늘날의 민중사관 등에 의해 그동안의 우리 역사는 잘못 기술된 부분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따라서 특정사관을 세우기에 앞서 민족이 걸어온 길을 하나의 경험사로 받아들이는 객관적 기술이 앞서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특정사관에 지배되어 민족사의 참모습을 왜곡하고 국가의 정통성을 위태롭게 하는 자기비하적 역사기술이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 여당의 우리 현대사 전면 재기술 방침이 지금까지의 이지러지고 훼손된 광복 40년사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크나큰 디딤돌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궁형 겪으면서 쓴 『사기』는 왜 오늘에도 읽히나”
한편 <동아일보>는 ‘역사를 쓰는 자세’라는 같은 날짜의 사설에서, 정부 여당이 직접 현대사를 쓰겠다고 나선 사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우리는 집권당이나 그 세력이 자기들의 안목으로 본 사실을 되도록 긍정적인 시각에서 풀어 가겠다는 것을 굳이 마다하지는 않는다. 사실의 축적으로서의 역사는 언제나 표리를 이루는 법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적어도 ‘역사의 이름’으로 서술하려는 발상은 매우 위험하고도 염려스러운 점이 예견된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의 당사(黨史)나 정권사의 수준에 머무른다면 몰라도, 그것을 국민들에게 이것이 바른 역사라고 내세우는 건 매우 온당하지가 않다. 역으로 야당이 그런 식의 관점에서 역사를 엮어 간대도 마찬가지다.
우선 어느 개인의 논문형식이라면 몰라도, 역사라는 말을 덮어씌우기에는 그 역사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무리가 아닐 수 없으며, 역사기술의 필수조건인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판단을 결여하기 쉽기 때문이다. 더구나 역사가 야사나 비화나 소문에 오염되는 걸 바로잡기 위해서라면, 우리 정치사는 왜 ‘백주의 당당한 논리’가 은폐되고, 그런 골목에서만 맴돌았는가를 반성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궁형(宮刑)을 겪으면서도 바른 역사를 쓰고자 했던 사마천(司馬遷)의
『사기』가 왜 오늘날도 평가를 받으며, 앙드레 모로와의
『영국사』가 어찌하여 오늘날까지도 명저로 높이 평가받는가를 지금 생각할 때다.”
<한국일보>는 1985년 11월 29일자 사설 ‘우리 현대사를 보는 눈’에서 ‘제3의 시각’으로 “부정을 위한 편향이나 긍정을 위한 편향이 모두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그러나 정부 여당의 ‘현대사 기술’이 ‘관찬(官撰)현대사’나 ‘정권안보’ ‘당정차원’이 안 되어야 한다고 주문하면서 “우선 해방전후사에 관련된 정보·자료의 대담한 공개부터 선행시켜 민간의 각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국민적 차원의 해방전후사 조명 및 편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정부 여당은 그 후 ‘현대사의 재기술’을 위해 국사편찬위원회의 예산을 증액하는 한편 그것의 구체적인 작업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한편 민주언론운동협의회는 간행물 <말>(1986년 3월)의 ‘논설’을 통해 정부 여당의 현대사 재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첫째, 해방 40년에 대한 관심이 사학계가 아닌 집권당이나 정부당국에서 먼저 나타났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연구는 일부 독재국가를 제외한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한결같이 민간 사학자들의 자유로운 연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로 인식되어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도 지난 수백 년간 역사서술은 왕도 관여하지 못하는 엄정한 기록으로 존중되어왔다. 그런데 8·15 이후 우리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관에 관여한 일부 사학자들에 의해 지도받아왔고 그간 국사를 전공한 학자도 수백 명이 넘을 것으로 짐작되나 이들은 신생국에 있어 가장 주요한 해방 40년사의 연구를 고의로 외면하고 현대사는 역사학의 대상이 아닌 듯 강변하고 심지어 학사논문이나 석사논문이 현대사를 테마로 잡는 것조차 심히 못마땅하게 여겨온 것은 오늘날 세상이 다 아는 바와 같다.
정부수립 이후 4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또 그간 국사편찬위원회가 설립되고 해마다 막대한 예산을 쓰고 있으면서도 읽을 만한 현대사 한 권 내놓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날 젊은 세대간에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아지고 있으나 사학계가 이 같은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학과나 사회학과 등에서 주목할 만한 현대사 연구업적이 나오고 있는 데 대해 사학계는 우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고 책임을 통감할 줄 알아야 하겠다.
둘째, 집권당이 지난번 개최한 ‘현대사 재조명’ 세미나에서 당국의 견해를 대변하는 대부분의 연사들이 지금까지 나온 현대사 특히 젊은이들의 해방 40년사관이 지극히 부정적이라고 한결같이 비난한 바 있다. 그리고 그간 발간된 몇몇 권의 현대사 관계 출판물이 판금조치 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리는 집권당이 말하는 이른바 ‘부정적인 시각’이 무엇인지 구체적 설명을 못 들어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또 판금조치된 몇몇 권의 현대사 서적이 과연 말 그대로 부정일변도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 현대사 연구는 세 가지 시각에서 출발되어야 하리라 본다.”
10년에 걸쳐 59명이 참여한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 6권
| ▲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선언한 포츠담 회담 장면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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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해방전후사』 기획은 계속되었다. 제3권이 1987년에 출간되었고 1989년에 제4·5·6권이 출간되었다. 제6권은 해방전후사의 저간의 연구성과에 대한 ‘방법론적’인 것이었다.
『해방전후사』가 출간되는 1979년부터 1989년의 10년 동안의 우리 현대사는 ‘혁명적으로 격동하는 시기’였고, 바로 ‘혁명적으로 격동하는 시기’에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 6권이 ‘탄생해서 운동하는’ 것이었다.
책은 한 시대의 소산이라면, 이들 책은 바로 그 시대와 그 시대에 전개된 사회운동 속에서 탄생하고, 다시 그 시대와 그 사회운동과 호흡하는, 살아 있는 이론과 정신과 사상이 된다는 것을 우리의
『해방전후사』 기획은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해방전후사』에는 연 59명의 필자가 참여했다. 해방 후 제1세대 연구자들이 있고, 이들 제1세대들로부터 수학한 제2세대 젊은 연구자들이 특히 제2권 이후부터 대거 가담하게 된다. 한동안 금기시되어 막혀 있던 ‘해방전후’의 현대사가 특히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치열하게 연구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해방전후사』에 실린 절반 이상의 논문이 대학원 석사 논문이었다. 일련의 연구와 글쓰기를 통해 민주화운동과 민족운동에
『해방전후사』는 한국현대사에 관한 광범위한 대중적 ‘시각교정’을 이뤄냈지만, 다시 이들 독자에 의한 연구가 대대적으로 진전되는 ‘책의 역사’가 여기서 실증되는 것이다.
다시 2004년,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을 출간한 지 4반세기 만에 우리는 전 6권을 재간행했다. 학문과 이론은 늘 새롭게 진전되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이미 하나의 ‘역사적인 책’이 되었을 것이고, 이따금씩 요구하는 새로운 독자들에게 부응하자는 것이었다. 뉴밀레니엄의 벽두에서 나는 이미 하나의 역사가 된 ‘책’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재간행사’를 썼다.
『해방전후사』는 우리 함께 손잡고 창출해낸 공동작업
“1980년대는 책의 시대였다. 폭력적인 권위주의 권력과 대응하는 출판문화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엄혹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젊은이들은 책을 읽었다. 80년대에 이 땅의 젊은이들은 인문사회과학적 독서를 통해 스스로의 정신과 이론과 사상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오늘 우리 국가사회와 민족공동체의 민주화와 진보와 개혁은 그렇게도 치열하게 전개된 출판운동 및 독서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 80년대의 한가운데에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서 있었다. 80년대를 힘차게 산 젊은이들은 해방전후사의 애독자였고, 89년까지 전 6권으로 간행되는 ‘해전사’의 필자들이었다. 특히 해전사의 제1권은 우리 국가사회와 민족공동체의 민주화와 통일문제를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정신과 이론과 사상을 공급하는 한 원천이었다. 80년대는 책을 읽는 젊은이들의 시대였지만 또한 해방전후사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권의 책이란 어느 날 하루아침에 창출되지 않는다. 책을 창출해내는 역사적 배경 또는 사회적 정서와 사상이 엄연히 존재한다. 해전사가 그렇게도 한 시대와 더불어 긴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신과 소망이 이미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전사들 또는 80년대의 출판운동을 이끈 일련의 책들은 출판사들의 기획이기도 하지만 80년대를 살아온 우리 모두의 공동의 작업 또는 성과이다. 그 독자들이 오늘 우리 사회를 이끄는 중심세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내는 정신과 이론과 사상, 문화적 힘이라는 관점에서, 해전사는 이미 우리 현대사의 한 고전이라고도 할 것이다. 그 출판기획자와 필자들의 의지와 이론을 넘어서서 해전사는 시대와 더불어 하나의 사회운동이 되었고 한 권의 책으로서 고전이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출간된 해전사는 21세기 벽두에도 한 권의 고전이자 문제적 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젊은이들의 정신과 문제의식으로 늘 새롭게 전개된다는 믿음을 우리는 갖고 있다. 지금 또 한번의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 우리 역사의 정의로운 구현에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새롭게 읽혔으면 한다.”
“『해전사』 500권에 자유의 햇빛을 되돌려 달라”
| ▲ 문화관광부에 『해방전후사의 인식』 1권 500권 반환을 요청한다는 내용의 <한겨레> 기사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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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안타까운 기억 또는 풍경이 나에게 있다. 1979년 10·26사태 직후의 그 계엄령 시기에 문공부에 용달차로 실어다준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 500권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책들이 도대체 어디에 ‘유폐되어’ 있는가 말이다. ‘쓰레기’로 폐기처분되었을까. 그 책의 운명 또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울적해진다.
2004년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 6권을 재간행한 직후, 당시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나는 편지를 보냈다. 그때 책을 실어오라고 한 사람들은 모두 문광부를 떠났을 것이고, 나에게 호통 치던 그 ‘군인’도 지금은 은퇴했을 터이지만, 또 이창동 장관이 무슨 책임을 질 문제도 아니지만, 그래도 책 찾기를 한 번 시도나 해보자는 것이었다. 이창동 장관이라면 진지하게 알아보라고 지시할 것 같아서기도 했다.
“이제 귀 부처가 강제 압수해간 500여 권의 책을 저희 출판사에 되돌려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정부의 조처가 바람직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시대와 국가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출판문화는 가장 기초적인 인프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국가사회가 성취해낸 민주주의와 산업화, 민족의식과 문화적 역량은 저 80년대에 치열하게 전개된 출판문화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책의 시대, 그 출판문화 운동의 한 가운데에
『해방전후사의 인식』, 특히 그 제1권이 서 있다고 생각됩니다. 강제 압수해간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을 되돌려주는 일은 한 시대에 출판문화의 가치와 정신을 정상으로 되돌려놓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권의 책에도 인권이 있을 것입니다. 귀중한 정신의 창작인 책을 저 어두운 창고의 구석에 유폐시켜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시켜주어야 합니다. 본인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을 기획한 출판인으로서 어두운 창고 어딘가에 유폐되어 있을 그 책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답답합니다.
한 권의 책은 살아있는 정신과 지성의 생명체입니다. 정신과 지성의 생명체가 햇빛 아래서 숨쉬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 500여 권을 저희 출판사에 제대로 돌려주는 일은 지난 날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으면서 우리 시대의 고귀한 지성을 존숭하는 상징적인 문화정책의 일환이 될 것입니다.”
문광부는 그런 책을 지금 갖고 있지 않고 찾을 수도 없다는 짤막한 회신을 보내왔다. 그것을 보관해둘 만한 창고도 없다는 것이었다. 문광부 창고 어딘가에 ‘생존’해 있지 않을까 하는 나의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 세상에서 그 존재는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인가.
한 권의 책은 또 다른 책을 창출한다
| ▲ 정신대로 끌려가기 전 신사참배를 하러 가는 소녀들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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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2년이 지났다. 80년대 중반의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개입되는 현대사논쟁’이 다시 제기되었다. 박지향·김철·김일영·이영훈 편으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전 2권)이 ‘책세상’에서 2006년에 간행되면서, ‘해방전후사’ 논쟁이 뉴라이트 멤버에 의해 제기되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좌편향’이라면서 우파 언론의 지원을 받아 공격하는 것이었다. 저 80년대에 그 보수 언론도 사실은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성과와 의미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는 보도를 했다. 그 어떤 ‘필요’에 따라 논조가 달라지는 것인가.
나는 참 황당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한 권의 책은 그 시대의 삶의 ‘운동적’ 소산이지만, 그 책은 또 다른 책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뿐 아니라 모든 책은 또 다른 책으로 탄생하고 새로운 이론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 발전하는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기획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다른 차원의 학문과 이론을 창출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한 시대적 상황을 총체적으로 보지 않고,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틀리고
『해방전후사의 재인식』만 타당하다는 인식과 주장이야말로 학문하는 자세가 아닐 것이다. 이 문명시대에 ‘언론’이 그런 흑백논리로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사상과 이론을 찬성하지 않지만, 당신의 이론과 사상을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당신의 그 권리와 정신을 한사코 옹호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학문과 사상을 키우는 기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저 80년대부터 ‘이런 책 저런 책’의 존재를 주창해왔다. 이런 책은 용인되고 저런 책은 용납될 수 없다는 권위주의적 발상이야말로 학문과 역사의 발전을 위해 극복되어야 한다고 나는 계속 큰소리로 말하고 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어떤 한 방향에서 평가하는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 신문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라고 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나의 ‘출판관’을 밝혔다.
“우리 모두의 역사인식에 전기를 마련한 책”
| ▲ 『해방전후사의 인식』 세트 ⓒ 한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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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 인식이 탄생하는 1970년대 말은 참으로 엄혹한 시대였습니다. 민족적 상황과 정치현실에 대해 문제의식만 가져도 수난 당하던 때였습니다. 그런 속에서 ‘해전사’는 기획되기 시작했습니다. ‘해전사’는 70년대의 유신과 80년대의 군부라는 폭압적 상황을 어떻게 하면 개선시킬 것인가로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학문적 성찰이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는 책의 시대였습니다. ‘해전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책이 고난을 무릅쓴 일련의 지식인과 출판인들에 의해 기획되었습니다. 언론이 제대로 말하지 못할 때 오히려 책이 늘 문제의식을 제기했습니다.
‘해전사’는 우리 현대사를 좀더 민족자주적인 관점에서 살펴보자는 것이 기획의 취지였습니다. 흔히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가 좀 더 잘했더라면 분단과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현대사에 대한 문제제기였습니다.
권위주의 정치를 넘어서는 반듯한 민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지 않았을? 하는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물론 친일한 사람들이 반성하고 새출발하지 않고 득세하는 그런 것도 다루었습니다. 10·26 직후 ‘해전사’의 판금조치를 지시하는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래, 친일 좀 했다는 것이 뭐가 문제냐?’
역사와 현실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해전사’는 그 시절에 기획된 다른 여러 책과 더불어 우리의 역사인식운동에 새로운 전기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 민족국가의 발전이라는 주제를 놓고 수많은 사람들이 토론하고 고뇌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과 성찰과 행동을 토대로 우리 국가사회는 이제 세계와 더불어 발전해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린아이들이 늘 새롭게 탄생하듯이 새로운 연구와 성찰로 새로운 책이 탄생해야 합니다. ‘해전사’ 필자들은 그 후 자기 주제를 계속 연구하고 있고 새 연구서들을 펴내고 있습니다. ‘해전사’ 필자들은 물론이고 많은 연구자들이 ‘재인식’이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인식’의 기획 자체를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재인식’을 탄생시키는 그 방법과 의도에 대해 그리고 일부 언론의 행태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연구자들은 얼마든지 학문적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책을 내놓으면서 편집위원들과 출판사는 지난날 우리가 많이 경험한 공안수사관들처럼 두 책의 내용을 단순 도식화시키고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대비표까지 만들었습니다.
‘해전사’ 열독현상을 시대적·역사적 조건과 더불어 총체적으로 해석하고, 이성적 언설로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면서 오히려 흑백용어를 동원해서 그 내용을 난도질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행태는 70, 80년대에 수많은 책들을 판금시켰던 권위주의 권력의 그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학문연구를 지난 시대로 되돌리자는 것인지, 민족문제와 민주주의에 관심을 두지 말자는 것인지도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도 벌어졌습니다.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언론은 사설까지 동원해서 ‘해전사’에 비판을 퍼부었습니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라면 책의 내용을 치밀하게 검토해서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한 사회의 이성적 인식을 제공해야 할 언론의 사설이 이렇게 한다면 정말 곤란한 일입니다. 정당의 대변인이 논평까지 내놓았습니다. 학문의 일, 연구의 세계를 정치인들까지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몇 년 전 우리 출판사가 ‘해전사’를 재간행하면서 내용을 고치지 않은 것에 대해 ‘재인식’의 어느 편집위원은 뭐라고 했는데, 책의 내용을 출판사가 수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한 시대의 역사적 존재가 된 책을 어떤 방향으로 뜯어고치자는 생각이야말로 참으로 위험한 비학문적 발상입니다. ‘해전사’는 이미 ‘해전사’로 존재할 뿐입니다. 다만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고 새 책으로 간행될 뿐입니다. 이데올로기라는 환상을 넘어서는 지적 성숙을 우리는 기대합니다.
민족자주적인 담론을 펴거나 북한사회주의를 연구하면 좌파로 몰아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전사’ 전 6권에는 60여 편의 논문이 수록되어 있고, 이들 논문의 필자 가운데는 진보적인 인식을 지닌 학자도 있겠지만 보수적인 연구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들의 학문적 인식을 통틀어 한쪽으로 매도하는 일이 안타깝습니다.
‘재인식’ 편집진들이 뉴라이트에 참여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번 사태와 연관되는 일련의 행위는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사코 극복하자는 저 지난날의 행태가 재연되는 듯해서 우려됩니다. 우리 사회도 이제 이데올로기라는 환상을 극복해가고 있지 않습니까.
보수도 존중되고 진보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학문과 지성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러하지 않습니까. 다름이 무슨 문제입니까. 생각이 다른 것이야말로 아름답습니다(Difference is Beautiful). 나는 귀하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귀하의 견해를 존중한다는 정신과 자세야말로 학문의 세계는 물론이고 국가사회의 정책수립에 필요한 덕목일 것입니다. 최근 ‘뉴’(New)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조직과 운동이 자못 왕성하지만, ‘뉴’가 아니라 ‘올드’(old)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책 쓰고, 책 만들고, 책 읽는 행위가 역사 진전시킨다
1979년 10·26에 이어 1980년 봄에 우리는 민주화의 열정과 희망으로 고무되었다. 그러나 5·17 및 5·18광주항쟁과 학살은 우리들로 하여금 역사에 대한 비관에 빠지게 했다.
사람들은 잡혀가고 고문당하고, 자기 일과 자기 일터에서 쫓겨나는 엄혹한 세월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들은 책 쓰기·책 만들기·책 읽기를 진행했고, 그러면서 희망을 추슬렀다. 수다한 책과 이론과 사상을 창출해낸 그 70년대와 80년대는 우리의 ‘역사적 조건’이었다. 그 ‘역사적 조건’을 딛고 우리는 일어섰다.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나는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는다. 아니 그 70년대와 80년대의 ‘역사’를 우리 모두 손잡고 새로운 차원의 역사로 진전시켰다. 그 역사의 진전, 그것을 연구하고 성찰하는 학문과 사상은 다양한 책의 저술·출판·독서, 그리고 실천으로 가능했고, 앞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말하고 싶다. 이는 인류문명 발전사에서 보편적으로 검정되는 역사적 경험이자 진리다!
오늘 우리 사회가 여러 문제를 노정하고는 있지만, 세계로 열려 있는 인식과 실천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진전하고 있다. 책의 80년대에 우리가 경험한 책의 정신과 사상과 이론은 오늘 우리가 구체적으로 만나고 있는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소중하고 유효한 인문정신이다. ‘우상’이 위세를 떨치는 그 흑백의 차원이 아니라, 이제 미래지향적이고 생산적인 성찰과 담론의 인문사상·인문시대를 우리 모두가 손잡고 창출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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