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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휴머니즘 터치 <검은 집>

한국영화판 <검은 집>에서 제가 가장 어색하게 느꼈던 건 영화의 휴머니즘 터치였어요. ‘휴머니즘’은 참 좋은 말이긴 한데, 이 영화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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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원작소설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하시고.)

신태라의 <검은 집>을 얼마 전에 봤는데,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나쁜 영화라는 건 아니고 못 만든 장르 영화였던 것도 아니었죠. 주연배우의 명성에 비해 연기가 약했고 설정이 조금 설득력이 없긴 했지만 그것에 불만이었던 건… 아니요. 조금 불만이긴 했어요. 사치코/신이화의 유선은 영화 중반까지는 좋았어요. 분위기 잘 잡고 배우의 목소리도 좋았으니까요. 하지만 이 캐릭터가 남자 주인공에게 칼을 휘둘러대는 후반부에서는 영 설득력이 떨어지더군요. 유선은 대사 센 여성을 전문으로 맡는 배우지만 그래도 평균보다는 마른 편이고 이 영화에서도 거의 청순가련에 가깝거든요. 머리를 길게 기르고 마른 여자가 맨발에 다리까지 절면서 걷는데, 칼 하나 들었다고 무서워 봐야 얼마나 무섭겠어요? 오히려 보호본능이 마구 일어날 정도라고요.


하지만 지금 이야기는 그게 아니죠. 한국영화판 <검은 집>에서 제가 가장 어색하게 느꼈던 건 영화의 휴머니즘 터치였어요. ‘휴머니즘’은 참 좋은 말이긴 한데, 이 영화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죠.

문제는 이래요. 기시 유스케의 소설에서 사치코는 소통 불가능한 괴물로 설정되어 있어요. 인간의 감정과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외계인과 같은 존재죠. 이 소설이 무섭다면 (전 그냥 편하게 봤지만) 그건 소설에 묘사되는 끔찍한 범죄 때문이 아니라 그 사치코 캐릭터의 인간과 무관한 공허함 때문이지요.

그런데 신태라의 영화에서는 사치코에 대응하는 신이화 캐릭터를 그렇게 만들지 않고 있어요. 끊임없이 자잘한 인간성을 부여하지요. 고통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를 혐오하고 눈물을 흘리는 인간으로요. 처음부터 그러는 건 아니고 후반부에 조금씩 그런 티를 흘리는 거죠. 이를 통해 우리가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존재에게도 사실은 마음과 영혼이 있다는 걸 관객에게 알리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나쁜 태도일까요? 우리와 다른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타자화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하지만 특별히 아주 좋지도 못해요. 우선 이들이 추구하는 장르인 호러 영화에 맞지 않지요. 공포심이 날아가버리니까요. 게다가 그건 거짓말이에요. 사치코 캐릭터에게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면 그걸 탐구할 일이지, 존재하지도 않았던 걸 억지로 추가해 넣고 “저 봐, 저 여자도 인간이야!”라고 말한다면 그건 불필요한 감상주의를 첨가한 사기죠.

그런 면에서 소설이 낫긴 해요. 소설도 나름대로 이 캐릭터에 대해 공정하려 하는데, 영화처럼 쓸데없는 감상주의로 캐릭터를 더럽히는 대신 같은 대상에 대한 다른 의견과 이론을 첨가하면서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지요. 여전히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에 대해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접근하는 책이긴 하지만 그래도 공평하려 노력했고 그 과정이 정직한 건 부정할 수 없어요.

영화판 <검은 집>의 실수는 사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식의 인정주의가 흔하니까요. 그 때문에 이 흔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는 좋은 교훈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이런 식의 인정주의적 접근법이 겉보기엔 사람 좋아 보이긴 해도 결코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툭하면 진실을 왜곡하며 종종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검은 집>에서 그건 좋을 수도 있었던 영화의 점수를 까먹는 것에 그쳤죠.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그보다 더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수도 있어요. 마음 편해지려고 진실을 외면하는 건 정말 위험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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