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땡땡입니다. 제 칼럼을 쭉 따라 읽어오신 분들은 제 건강 상태가 요양이 필요한 상태라는 것은 눈치 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다행히도 최근에 제가 운영하는 웹진 CQ가 서버 이전을 하게 되면서 제가 할 일이 허공으로 붕 떠버리는 일이 생겼답니다. 제휴사의 프로그래머 분들이 서버 이전을 도와주시기로 했는데, 넷맹에 가까운 저보다 워낙 탁월한 실력을 갖춘 분들께서 도와주시는 터라 제가 할 일이 사라진 게죠. 엄밀히 말하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거에 가까웠어요. Zone 파일 정보니, DNS 정보니 하는 말은 제가 아는 언어가 아니라서(…) ‘뭐 이래 어려븐 거이 많노’ 하면서 어버버버 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일도 없겠다, 간만에 달콤한 무위도식의 시간을 가졌어요. 비록 지금 놀아버리면 서버 이전이 완료된 다음엔 할 일에 치여 살게 될지라도, 사람은 모름지기 내일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참고로 저 위에 ‘제휴사’라고 적어놓은 곳은, 최근 채널예스에서도 시작한 RSS 서비스의 서비스 파트너 ‘fish’입니다. CQ와 채널예스는 이제 fish를 통해서도 접점이 생긴 셈이네요. 여러모로 유용한 서비스이니만큼 저 역시 기대가 크답니다.)
어쨌거나, 뒹굴뒹굴 굴러다니며 무위도식을 하는 동안 전 <내 남자의 여자>를 ‘다시보기’로 챙겨봤습니다. 워낙에 귀가시간이 늦었던 요즘인지라 드라마를 제시간에 보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머니와는 물론이거니와 가끔은 CQ의 부편집장 까막 님과도 의사소통이 안 될 때가 있었습니다. 아니, 말이야 바른말이지 캐나다에 사는 까막 님보다 제가 더 이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없다니! 그래서 챙겨보기 시작한 <내 남자의 여자>는 과연 명불허전이었습니다. 특히나 소심해서 하고픈 말을 잘 못하는 저와, 말주변이 없으셔서 손해 보시기 일쑤인 어머니에게 이 드라마는 정말 통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김수현 작가 대사야 워낙에 정평이 나있긴 합니다만, ‘튀겨 죽일 년’으로 시작해서 ‘소가 웃다가 토하겠다’에 이르자 정말 십 년 묵은 숙환이 쑤욱 내려가는 것만 같았어요. 완전히 매료된 저는 틈만 나면 CQ 편집회의에서 ‘<내 남자의 여자> 특집을 기획하자’고 말을 맞춰봤습니다. 비록 가정의 달 5월 특집으로 본격 불륜 드라마를 다루자는 것이 좀 찜찜하긴 했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꽃 피는 3월엔 페티시 특집을 감행했던 웹진인 걸요(…). 물론 그 원대한 계획은 다른 웹진에서 먼저 불륜 특집을 감행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어버렸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그 드라마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이 남은 저는 이 지면을 통해 저의 불건전한 애정을 과시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다룰 인물은 ‘튀겨 죽일 년’ 화영을 연기하는, 김수현의 페르소나 김희애입니다.
생의 피로를 온몸으로 표현할 줄 아는 배우, 김희애
처음부터 김희애가 ‘김수현 사단’의 일원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MBC <아들과 딸>에서부터 최고조의 인기를 누리며 한 해도 쉬지 않고 ‘드라마왕국’ 시절의 MBC 간판스타로 활약하던 김희애는 1996년 벤처기업가 이찬진과의 결혼 후 그대로 은퇴를 하는가 싶을 정도로 공백이 길었습니다. 5년간 7편의 드라마에서 활약한 배우에게 3년 공백은 무척 길었어요. 사실 공백 기간이 3년이면, 방송사가 충분히 그 빈자리를 채울 대체재를 구할 수 있는 시간이거든요. 1999년 <하나뿐인 당신>으로 컴백하고 난 뒤에도 한동안 작품 활동은 뜸했습니다. 그다음 작품이 2003년 <아내>였으니 또 4년을 쉰 셈이잖아요. 그 사이 4년간 공백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소리도 없지 않았습니다. 성공한 기업가와 결혼한 여배우들이 종종 듣는, 그다지 유쾌하진 않은 루머도 기억이 나네요. 물론 결혼하기 전이나 결혼한 후나 김희애의 연기력에 대해서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었고, 시청률 역시 높았습니다만 한국에서 결혼한 여배우가 예전만 한 인기를 누릴 수 있을지는 많은 사람의 우려를 낳을 만한 것이었어요. 한국에서 남자배우는 결혼을 한 뒤에도 대체로 그 인기를 유지하지만, 여자배우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줌마’라는 이미지의 굴레에 묶여서 커리어를 유지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잖아요. 2003년 <아내>를 마치고 나서야, 김희애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주말 시청률 1위를 자랑했던 <완전한 사랑>이 그 작품이었죠.
이 작품은 사실 그렇게 흥행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의 작품이었어요. 이런저런 물의를 빚어서 연예계로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도 의문시되던 이승연을 배짱 좋게 기용한 것도 모자라서, 홍석천을 아예 극 중에서도 동성애자로 설정해서 주말 안방극장에 밀어넣은 김수현의 배우 기용은 - 훗날엔 현명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증명되었지만 - 시청자들이 첫눈에 부담 없이 즐기기엔 위험부담이 컸어요. 게다가 이 드라마는 눈뜨고 보기 어려운 여성수난극이었습니다. 극 중에서 김희애는 연상연하, 사제지간이라는 이중의 굴레에 묶여 시집에서 온갖 구박과 멸시를 당해야 했던 것도 모자라서 급기야 ‘특발성 폐섬유증’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희귀병을 앓으며 죽어갑니다. 김희애는 이 작품에서, 한국에서 여자가 겪을 수 있는 수난이란 수난은 다 겪는 것 같았어요. 코에 튜브를 꽂고 나날이 수척해지면서 고통에 몸을 쥐어뜯던 김희애는 수많은 시청자의 눈물을 뽑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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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완전한 사랑>에서 희귀병으로 죽어가는 영애 | |
사실 시한부 연기라는 것이 잘못 연기하면 실소를 터뜨리게 하는, 고난도의 연기잖습니까. 백혈병을 앓으면서도 볼살은 통통하고 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미모의 여배우가 얼짱 각도로 눈물을 떨어뜨리며 예쁘게 죽어가는 연기를 펼치는 걸 우리는 여러 차례 봐왔죠. 하지만 특히나 여성의 고통에 대해서 절절하게 그려내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김수현 작가의 손끝에서 그 뻔하디 뻔한 시한부 멜로는 보는 이조차도 아플 지경인 수난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저러다가 진짜로 죽지’ 싶을 정도로 힘들어하는 김희애와, 몸 안의 수분을 죄다 짜내서 눈물로 쏟아내는 것만 같았던 애처가 차인표의 조합은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웠습니다. 비록 그해 김희애가 SBS 연기대상을 놓치긴 했지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네티즌과 김수현 작가 본인까지도 뭔가 비리가 있다고 항의하긴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완전한 사랑>이 김희애에게 소중한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바뀌진 않습니다. 김수현 작가의 페르소나로 활약할 수 있게 된 중요한 계기였고, 시청자의 전폭적인 애정을 다시 찾은 작품이었으니까 말이죠.
그 이후 김희애의 커리어는 계속 김수현 작가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 이후에 했던 세 편의 드라마 중 두 편(<부모님 전상서> <내 남자의 여자>)은 김수현 작가가 집필한 것이었고, 나머지 한 편(<눈꽃>)마저도 김수현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김수현 작가의 오랜 파트너 곽영범 PD의 작품이었습니다. <부모님 전상서>에서 김희애는 자폐증을 앓는 아들과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그것도 모자라 이혼을 뜯어말리는 답답한 친정아버지까지 더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행인 ‘성실’ 역을 맡았습니다. 두 작품 연속으로 온갖 고난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살아가는, 곡예에 가까운 연기를 펼쳐보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눈꽃>에 이르자 김희애는 두 집 살림을 하던 몹쓸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서 글쓰기로 생을 버텨내는 ‘강애’ 역을 맡게 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심지어 유일한 피붙이인 딸에게도 이해받지 못합니다. 기껏 키워놨더니 하는 말이라고는 ‘엄마 때문에 나는 내 인생이 없었어. 늘 엄마의 딸, 유명 작가의 딸일 뿐이었지!’라고 대들며 일본에 있는 제 아버지한테 가겠다는 것뿐이에요. 일에는 일대로 치이고, 딸은 떠나겠다고 악을 쓰고, 결국 김희애는 시름시름 앓다가 암으로 죽어버립니다. 또, 또, 또 죽어버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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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눈꽃>에서 딸에게 매몰찬 말을 듣고 울먹이는 강애 | |
자, 이쯤 되면 김희애를 ‘수난극 전문 배우’라고 불러도 좋을 지경입니다. 비록 김수현 작가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실종된 남편 대신 7년간 시댁 식구를 부양하며 남편을 기다려 온 ‘나영’ 역을 맡았던 <아내>까지 치면 3년간 맡았던 드라마 4편에서 모두 시름시름 앓고 죽어가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온몸에 생의 피로를 덕지덕지 달고 사는 역할을 맡은 겁니다. 배우는 종종 작품에 너무 몰입하면 실제의 성정이 바뀌기도 하고,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기도 한다던데 김희애는 쉬지 않고 거푸 죽거나, 죽지 않으면 죽기 직전까지 고난을 겪습니다. 제가 어떻게 능력만 된다면 병원에서 정밀검사라도 받게 해드리고 싶을 정도에요(…). 시댁 식구의 멸시, 남편의 외도와 폭력, 자녀의 장애나 반항, 그리고 불치의 병까지… 마치 모든 한국 주부의 고뇌를 온몸에 대신 짊어진 듯했다니까요. 그러고도 CF에서는 언제나 화사하게 웃고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이고 그게 늘 먹히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기할 지경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화제의 본격 불륜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가 도래했습니다. 19억 원을 웃도는 천문학적인 집필료로 제작 전부터 화제가 되었지만, 드라마가 시작되자 김수현 작가가 얼마를 받는가 하는 소리가 쑥 들어가 버렸습니다. 남들이 10회, 20회가 흐르도록 손에서 놓지 않을 패를 1회에서 까발리더니, 급기야 4회에 가자 당사자의 입을 빌려 불륜을 폭로해버리고 본격적으로 파국을 향해 전력 질주하는 드라마의 쾌속전개를 보며 과연 누가 집필료를 떠올리겠어요. 하지만 더 충격이었던 것은, 늘 수난극의 주인공이었던 김희애가 머리를 하늘 끝까지 닿을 기세로 부풀리고, 진한 화장에 강렬한 원색의 옷차림새로 등장해서 자기 친구 남편 준표와 밀애를 즐기는 팜므파탈로 나온 것이었어요. 똑 부러지는 연기로 정평이 난 배종옥이 남편만 바라보고 사는 순진한 주부 지수로 나온 것도 신선한 충격이었지만, 누가 수난극 전문 배우 김희애가 이렇게 악녀로 등장할 거라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육탄전 끝에 멍이 든 얼굴로 술을 마시면서 키들키들 웃는 서늘함이 그녀 안에 도사리고 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확실히 이번 배역은 다릅니다. 이번 작품에서 김희애는 마음껏 패악도 부려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합니다. 계속 하고픈 말 못 하고 속으로 병을 키우다가 급기야 죽어버리던 그간의 배역과는 다르죠. 꼭 김수현 작가가 자기 작품에서 있는 고생 없는 고생 다 시켰던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선물해 준 역할 같아요. 마흔이라는 나이가 안 믿길 정도로 하늘하늘한 팔다리를 놀리며 사랑을 속삭이고, 당장 전세 빼고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은수에게 ‘그 집, 누가 해줬을 거 같아요?’라고 도발적으로 물어보고는 히스테릭하게 웃어젖히는 화영은 그 기세가 하늘을 찌릅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매달릴 것이 사랑밖에 남지 않은 사람의 절망적인 호기가 브라운관을 가득 메웁니다. 한 편 한 편 볼 때마다 잠시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 할 정도로 숨 막히죠.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화영에게 욕을 하고 있다’는 김수현 작가는 물론이거니와, 김희애 본인조차도 ‘내가 내 연기를 보면서도 온몸이 떨리더라’고 하는 이 역은 분명히 김수현 작가에게도, 김희애에게도,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이전에 만나본 적 없는 그 어떤 경지예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악녀’라고 쓰고 나니 극 중 화영에게 좀 미안해지네요. 사실 <내 남자의 여자>의 화영 또한 곱씹어 생각해보면 김희애를 거쳐 간 수많은 수난극의 주인공 못지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피냄새 맡아가며 메스 들고, 친정식구, 시댁식구 돈 대주고 헌신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뿌리 깊은 불신과 배신뿐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처음으로 자신이 모든 걸 던져서 붙잡고 싶은 남자를 찾았는데 그게 하필이면 또 가장 친한 친구 지수의 남편 준표입니다. 게다가 이 남자,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화영과 함께 있을 땐 지수를 그리워하고, 지수와 있을 때는 화영을 그리워합니다. 가정은 깨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화영을 버리기도 싫은 기회주의적인 작태를 보이는 와중에도 교수로서의 위엄과 명예는 잃기 싫습니다. 화영은 이런 갑갑한 인간도 사랑이랍시고 놓치고 싶진 않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불신에도, 동생의 ‘화류계에서도 이런 일은 보기 어렵다’는 모욕적인 언사에도, 은수의 육체적 폭력에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된 바에야 자신의 사랑 앞에 당당해지겠노라고 자기 입으로 지수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충격을 받고 숨도 못 쉬는 지수에게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사람도 결국은 화영입니다. 못내 지수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셋이 살면 안 될까’라는 어이없는 소리까지 할 정도로, 화영 역시 온 가슴팍이 정을 끊지 못해서 생긴 상처로 너덜너덜한 사람이에요. 그렇습니다. 사실 한 겹만 벗겨보면 ‘튀겨 죽일 년’ 화영조차도, 험난한 생을 걸어오며 만신창이가 된 수난극의 주인공인 셈입니다.
김희애의 육신을 빌려 현신한 캐릭터의 공통점을 한마디로 정의해보면, ‘생의 피로감’이에요. 7년간 남편을 기다린 나영도, 시댁식구의 모멸을 견디다 못해 결국 ‘특발성 폐섬유증’으로 죽어버린 영애도, 장애가 있는 아들과 폭력을 행사하는 데 거침없는 남편에게 시달린 성실도, 딸과의 불화와 암에 시달리다가 숨을 거두는 강애도, 심지어는 비교적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팜므파탈 화영까지,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조건을 피하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견뎌내야 합니다. 그 견뎌냄의 지난함, 그 생의 지리멸렬함을 김희애는 온몸을 다해서 표현해냅니다. 목 안으로 씹어 삼키는 듯한 대사 처리와 피로감에 젖은 눈빛, 사지에 납으로 된 추라도 달아놓은 듯 힘겨워 보이는 몸놀림은 위태위태한 캐릭터를 즉각적으로 전달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들(캐릭터)에게 ‘내일’은 피하고 싶은 존재입니다. 대부분은 그들에게 ‘내일’은 죽음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는 날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보다 나을 것도 없을 또 하루에 불과하니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네 삶도 그렇잖아요? 때로 힘을 내보기도 하고, 좋은 일에 웃기도 하지만 대부분 현대인의 삶은 견뎌내야 하는 악조건이 줄지어 늘어선 피로함의 퍼레이드잖아요. 밥벌이를 위해 싫어도 일해야 하고, 남이 보지만 않으면 어디다 내다버리고 싶은 가족?친지와의 불화도 꾹꾹 눌러서 견뎌내야 하고, 몸이 아파도 바쁘고 돈 아까워서 변변한 검사도 한 번 받아볼 엄두도 못 내고, 내일이 온다고 해도 오늘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도 별로 없는…. 김희애는 그렇게 시간에 베이고 현실에 찔리며 무기력한 현대인의 피로감을 표현해내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김희애가 우리처럼 아플 때, 힘들 때, 내가 못 살겠노라 소리칠 때 그렇게 함께 아플 수 있는 겁니다. 브라운관에 수많은 배우가 나와서 세상 고통 모르는 것처럼 연애놀음에만 치중하는 동안, 김희애는 우리처럼 생의 피로에 시달리니까요. 그 시련, 그 아픔이 어떤 건지 우리는 아니까 말입니다. 아니, 뒤집어 말해볼게요. 김희애는 꼭 우리에게 ‘지금 힘드신 게 어떤 건지 알아요’라고 상냥하게 말을 건네는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거예요. 시청자가 김희애에게 열광하는 건 어쩌면 동지애, 전우애인 거 같아요. 삶이라는 전장에서 힘들게 싸우는 사람, 나처럼 힘든 사람에 대한 동질감. 그래서 김수현은 자신의 수난극에 거푸 김희애를 출연시키는 것이고, 시청자는 그 수난극에 매번 시선을 고정하고 우는 거겠죠.
그래서 전 <내 남자의 여자>를 볼 때 지수만큼이나 화영이 불쌍합니다. 지수야 이 싸움을 응원해줄 든든한 가족이라도 있고 준표의 외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이 화목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화영은 여태껏 염치없는 식구를 먹여 살리면서 마음도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는데,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도 가시밭길이고 자신의 사랑은 어쩔 수 없는 불륜이니까 편들어줄 사람조차 없잖아요. 좀 더 솔직해져 볼까요? 전 사실 화영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많은 분이 ‘튀겨 죽일 년’ 화영이 몰락하길 기대하신다는 건 알지만, 전 한 번도 제대로 사랑받아 보지 못한 화영이 모든 걸 다 버리고서라도 매달리는 그 불장난이 온화한 결말을 맞이했으면 좋겠어요. 그것마저 실패하면 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피로한 얼굴 위로 시니컬한 미소를 드리우며 키들거리는 화영의 마음이 어떤 건지 저도 대강은 알 것만 같거든요. 물론 불륜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응징을 아끼지 않는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니까, 제 예상이 맞는다면 화영도 그렇게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진 못할 겁니다. 아니, 호된 징벌을 피할 수나 있다면 다행이죠. 그렇게 또 김희애의 캐릭터는 나름의 수난을 겪고 좌절할 겁니다. 그리고 전 또 그 좌절과 수모에 함께 가슴이 쓰릴 겁니다. 설령 그것이 정당한 처벌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사실 전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는 것만 같아요. 김희애의 몸을 타고 태어난 캐릭터들과 함께 울어줄 준비 말입니다. 오늘의 ‘요주의 인물’은, 생의 피로함을 자기 것인 양 온몸으로 표현해낼 줄 아는 수난극의 주인공, 김수현의 페르소나,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팜므파탈 화영 역의 김희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