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한울의 그림으로 읽는 책
'더는 골탕 먹지 않겠어!', 무라카미 류의 『69』
눈은 책을 읽고 있지만 머릿속엔 잡생각이 가득 차 있을 때면 바로 전 페이지에서 주인공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지금 상황이 벌어지는 곳이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어 페이지를 거꾸로 넘기며 계속 곱씹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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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책을 읽고 있지만 머릿속엔 잡생각이 가득 차 있을 때면 바로 전 페이지에서 주인공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지금 상황이 벌어지는 곳이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어 페이지를 거꾸로 넘기며 계속 곱씹게 됩니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독서를 한다는 게 무리긴 하지만 매우 따분한 책을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현상인지라 눈으로 글자를 쫓고 손끝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아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내리긴 귀찮고 인스턴트라도 한 잔 타 마실까?’로 시작해 ‘요즘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 가격이 많이 내렸던데 이참에 하나 구입할까?’란 고민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그날의 독서는 ‘여.기.까.지’의 상태로 마무리되어 버립니다. 반대로 무척 흥미진진한 내용이거나 평소 관심이 많던 분야의 책을 읽을 때면 납덩이를 안고 바다에 뛰어든 것처럼 책 속 깊숙이 빠져들어서는 지금 여기가 어디며, 지금이 몇 신지, 오늘 하기로 마음먹었던 계획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몇 시간은 책에서 손을 못 놓는 일도 많지만 말이죠. 뭐 이런 평범한 루트와는 다른, 묘한 감정으로 책을 읽어 내려가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요. 저한테 무라카미 류의 『69』은 ‘더는 골탕 먹지 않겠어!’란 다짐으로 긴장하며 읽은 책으로 기억됩니다. 다른 무라카미 류의 책과는 다르게 매우 유쾌하고 밝은 소설로서 약간은 익살스러운 주인공이 등장합니다만, 초반을 진행하며 독자를 상대로 계속 허풍을 치는 주인공에게 계속 속아 넘어가면서 ‘아, 이번엔 당하지 않겠어!’라며 눈을 크게 뜨고 주의 깊게 읽지만 조금 지나서는 ‘어이쿠 맙소사, 또 뻥이었네’ 하곤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이지만 오토리버스되는 워크맨처럼 ‘다짐’과 ‘실패’를 반복하다 결국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곤 백기를 들어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처음 『69』의 표지를 보고는 제목만으로도 사춘기 소년의 가슴은 쿵쾅거리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냉큼 구입했습니다만, 비틀즈와 롤링스톤스, 히피 문화가 꽃피우던 1969년을 가리킨단 의미를 알고는 실망했다면 거짓말이고 ‘과연 69란 숫자를 보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라며 궁금해 했습니다. (아마 90퍼센트는 다 비슷하지 않았나요?) 지금 판매되는 작가정신의 『69』은 평범한 표지 이미지에 숫자 ‘69’란 글자는 거의 보이지도 않고 ‘sixty nine’의 영어만 크게 강조합니다만,(아마도 포르노그래피적인 제목의 선정성을 조금 줄여보고자 하는 출판사의 의도 같습니다) 제가 가진 예문의 96년 판형은 작가정신의 책과는 반대로 ‘sixty nine’은 거의 보이지도 않고 빨간 바탕에 ‘69’를 매우 크게 강조했습니다. 디자인 자체도 기묘한 느낌으로 책과 굉장히 잘 어울리고요. 개인적으론 최근 양장본은 너무 밋밋해서 제 취향엔 안 맞거든요. 무라카미 류의 열혈팬까지는 아니지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무척 좋아하고 『69』은 마치 즐거운 소풍이라도 다녀온 것 같은 유쾌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던 소설이라 좋아합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께선 제가 한 ‘다짐’이 어떤 것인지 한 번 경험해보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표지에 있는 문구를 제 경우에 맞춰 단어만 조금 바꿔보자면…. “열아홉 살의 나를 키운 것은 랭보, 너바나, 펄잼, 도스토예프스키, 트루게네프, 체 게바라, 홍대의 블루데빌과 잼머스, 그리고 위노나 라이더를 닮은 한국산 누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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