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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다음 날 술 한잔 딱 걸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나는 책

꼭 우울한 다음 날 마시는 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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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안산을 떠나 봉천동에 정착했지만 철거민이 돼버리고 서울의 택시 기사가 되어 매달 120만 원의 월급에서 꼬박꼬박 시민단체 회비를 내던, 나이 쉰의 독신이던 남자 허세욱은 하얏트 호텔 앞에서 분신을 감행하고 피부 이식 수술 중에 생을 마감한다. FTA에 반대하던 그에게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 뭘 알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대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고향 안산을 떠나 봉천동에 정착했지만 철거민이 돼버리고 서울의 택시 기사가 되어 매달 120만 원의 월급에서 꼬박꼬박 시민단체 회비를 내던, 나이 쉰의 독신이던 남자 허세욱은 하얏트 호텔 앞에서 분신을 감행하고 피부 이식 수술 중에 생을 마감한다. FTA에 반대하던 그에게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이 뭘 알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대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열두 살에 군산의 소화 권번 기생이 되어 인력거 두 대가 모시러 와야 춤추러 나갔다던 당대의 기생 장금도는 세상에 더러운 것은 기생의 베개라 했다. 술 냄새, 분 냄새, 남몰래 흘린 눈물 냄새. 임 방울이 쑥대머리를 부르면 그에 맞춰 살풀이춤을 추던 그녀는 아들이 커가자 죽은 것처럼 자취를 감춰버렸다가 50년 만에 온천 관광 간다며 집을 나서 서울에서 공연을 한다. 그 뒤풀이 자리에서 장사익이 소주병에 수저를 꽂고 ‘봄날은 간다’를 부르자 그녀는 답가로 육자배기를 불렀다. ‘꿈아 꿈아 무정한 꿈아….’ 그 육자배기 가사를 생각하다가 난 또 눈물을 흘렸다.

누렁소를 기르는 내 아빠는 FTA 타결 뉴스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작은 운명은 항시 큰 운명에 속하는 것이다.’ 난 그 말에 또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아렸다. 이 감정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건 명백히 슬픔에 속하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슬픔과 우울은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가? 내 일상의 소소한 잔물결 같은 감정들은 무엇인가? 우울에 대해서 지금까지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해서 금세 외로워진 결과로서의 감정은 우울이라는 것. 두 번째는 인간이 아니라 사물들이 나의 기대를 저버릴 때의 감정도 우울이라는 것. 그러니 우울은 차마 다른 인간에게 화낼 일이 못 되는 감정인 것 같다.

내 우울 때문에 다른 인간을 할퀴고 싶지 않은 날에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거나 아니면 재빨리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의 토성 편을 펼쳐든다. 토성 편에는 파이오니어 11호 발사 후 5년 정도 경과한 시점인 1979년 8월 29일에 찍은 토성의 고리 사진이 실려 있다. 토성의 가장 큰 위성인 타이탄을 발견한 하위헌스는 토성의 궤도 특성을 연구한 뒤 이런 글을 쓴다. “토성이 태양을 30년에 한 번씩 공전하기 때문에 토성과 그 위성에서의 계절의 변화는 지구에서보다 훨씬 느리게 진행된다. 토성의 생물들은 그 생활양식이 우리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의 겨울은 지루하게 길지 않겠는가?”




수잔 손택은 그녀의 책 『우울한 열정』에서 (우울과 열정이란 단어를 같이 써줬다는 점에서 그녀는 심리 치료사 그 자체다) 토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한 슬픈 학자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바로 발터 벤야민이다.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자신의 우울을 토성적 기질 때문이라고 설명한 발터 벤야민은,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본질적인 외로움, 인생에서의 성공에 대한 공포, 우유부단, 둔감, 느림, 실수를 잘하는 것, 고집,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것, 눈에 들어오는 것의 3분의 1밖에 보지 못하는 시선, 사람에 대해선 신의가 없지만 사물에 대해선 신의가 있어 열광적인 수집가가 되는 것, 내성적 성향을 의지박약 탓으로 돌리는 것, 사물적인 지배에 항상 위협을 받는 것,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데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그래서 결정적인 일격은 항상 왼손으로 날린 주먹이라 생각하는 것,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끌어내기 등등으로 정의한다. 수잔 손택은 특히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끌어내기’란 표현에 대해 아주 멋진 해석을 붙여 주었는데 이런 행위야말로 바로 우울함을 쾌활함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눈을 내리깔고 구석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척하고 있다가 이런 글을 읽고 나서 ‘오늘 난 토성의 영향 아래 있는 거야. 난 오늘 토성의 영향 아래 있는 거야!’ 이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 변덕스럽고 구차하고 열대의 습기처럼 치덕치덕 붙어 있는 내 우울의 이유들이 전 우주의 비호 아래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으로서 정당성을 얻게 되고 그 다음 날은 다소 회복되어서 최대한 사랑스럽게 꾸미고 간단히 술 한잔 마시러 외출할 정도의 상태는 되는 것이다.

그런 날의 행동 강령은 이렇다. 독주는 피해야 하고 대화 상대는 오랫동안 호감을 유지해 온 사이되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을 택해야 한다. 술 역시 이국적인 술이 좋다. 새로운 호기심을 부여하고자 한 번도 먹어 보지 않은 술과 안주에 도전한다. 나도 며칠 전 계란 노른자에 비빈 낫토와 겨자소스에 비빈 냉동 낙지와 가쓰오부시를 얹은 튀긴 두부를 먹었다. 우울한 다음 날 외출해야 하는 이유 역시 벤야민의 사례를 들어서 수잔 손택이 알려준다.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 감각과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시간은 많은 여유를 주지 않는다. 시간은 뒤에서부터 우리를 뚫고 들어오고 좁다란 통로를 통해 우리를 과거에서 미래로 밀어낸다. 그러나 공간은 넓고 가능성 위치, 교차로, 통로, 우회로, 유턴, 막다른 골목, 일방통행로 등이 가득하다. 실제로 너무 많은 가능성이 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

길에 관해서는 모든 귀갓길이 오디세우스의 귀향인 것처럼 요란한 일인, 대단한 길치인 나에게는 길을 잃고 헤매는 능력이 여행자를 만들어 준다는 말이 눈물나게 고맙다. 일단 길만 나서면 수많은 다른 사람이 될 천부적 자질을 갖고 태어났다는 말이니… 왜 아니겠는가?

그렇게 한잔 걸치고 돌아오는 날에 어김없이 생각나는 건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의 주인공 폴이다. 폴은 한때는 영민해 에드거 앨런 포우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비교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따서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우선 생활비라도 마련하려고 택시 기사가 된 사람이다. 그는 체중이 20킬로그램쯤 평균치를 초과한 올챙이배를 가진 비만남이고, 최근 일 년 동안 여자와 자본 적이 있기는커녕 한 번 이상 만나주는 여자도 없는 고독한 사나이며, 남들이 자기를 평범한 택시 기사로 알까봐 끊임없이 궤변을 늘어놓는 떠버리형 인간이다. 생일날엔 만날 사람이 없어 새벽 두 시가 넘어 간이식당에 가서 초콜릿셰이크와 감자튀김, 햄버거를 시켜 자축하는 그가 자신을 스카우트하려는 헌책방 주인 앞에서 애써 자기가 택시 기사 일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 있다.

“토사물과 정액과 똥과 오줌, 눈물까지 범벅된 택시 뒷좌석을 치워야 하는 신세지만 신의 은총과 자그마한 심적 고양과 예기치 않은 기적을 경험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순간이 있지요. 새벽 세 시 반에 타임스 광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다 보면 모든 통행이 다 끊어져서 문득 세상 한복판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은 때가 있어요.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는 찰나에 아치 사이로 막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그런 순간이면 보이는 거라곤 밝고 둥근 노란 달 뿐인데 그 달이 너무 커서 놀라게 되고 내가 여기 지구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날고 있는 중이라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몸은 뒤로 남겨 놓은 채 충만함과 고요함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들어가는… 극도의 피로감과 지루함, 정신을 멍하게 만드는 단조로움, 그러다가 뜬금없이 문득 느끼게 되는 일말의 해방감? 잠깐 동안의 진정하고 절대적인 희열, 하지만 그 순간을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하지요.”

나는 그렇고 그런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인간들의 이런 말도 안 되는 너스레가 솔직히 말해서 눈물나게 좋다. 이것이야말로 토성 아래 있는 인간이, 우울함을 쾌활함으로 바꾸려고 사소한 것에 의미 부여하는 초현실주의적 행위가 아니고 뭐겠는가? 이게 가능한 사람은 토성과 평생에 걸친 사랑을 시작해도 좋고, 우울증을 평생 자신의 자질 중 하나로 안고 살아도 좋다. 우울한 다음 날 한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의 달을 보게 된다면 나 또한 이런 비슷한 너스레를 떠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이다.


‘달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어. 언젠가 벳부로 여행을 갔을 때 일이야. 호텔이 무료로 제공하는 반딧불이 투어에 갔는데 말이야. 깊은 숲 속에 맑은 냇물이 흐르는 곳이었어. 그 투어의 가이드는 그 마을에서만 평생을 산 아저씨였지. 그 아저씬 그 온천 마을의 깊숙한 곳까지 알고 있다고 자랑을 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하늘의 보름달을 향해 플래시를 비췄어. 그때 뭐가 보였는지 알아? 보름달 위로 날아가는 부엉이 한 마리였어. 보름달을 향해 직선으로 날아가는 크고 검은 부엉이의 그림자를 난 본 거지. 그 순간 내게는 그게 내 영혼 같아 보였어. 미래를 향해 날아가는 내 영혼의 그림자. 과거와 미래에 대해 가장 아름다운 말이 뭔지 알아? 과거는 출발점이고 미래는 목표라 생각하지만 그건 틀렸어. 과거와 미래는 공통점이 있어. 과거와 미래의 공통점은 둘 다 가능성!이란 것이야! 아까부터 이 말을 너에게 속삭여주고 싶었어. 우리의 우울은 의지박약 탓이 아니고 기질이니까 너무 기를 쓰고 애쓰지 말고. 잘 자’

자의식이란 건 우리가 그 무게에 짓눌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해석해야 할 대상이고 만들어 나가야 할 대상일 뿐이니, 지금의 우울로 둔갑한 자의식 역시 우리를 지배하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날은 제대로 술 한잔 마신 날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한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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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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