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라면 지금쯤 ‘저놈이 <거침없이 하이킥>은 빼놓지 않고 보겠구나’라고 생각하시리라 믿습니다. 암, 그렇고 말고요. 주문형 TV를 설치한 덕에 소위 ‘어둠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도 놓치는 에피소드 없이 꼬박꼬박 챙겨보는 중입니다. 솔직히 현대판 신데렐라와 재벌 2세가 얼굴을 내밀고 난데없이 신 내림 받은 아가씨가 등장하는 일일드라마보단 이 시트콤이 더 보편적인 현실을 닮은 것 같아요.
세상은 정직하거나 안전하지 않고, 사람은 평등해야 하지만 실제로 평등하진 않으며, 대체로 권력은 경제적 능력을 따라가게 마련이고,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몸을 뉘어 쉴 곳이 되기보단 주로 구성원 사이에 권력 다툼의 장이 되기 십상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정색하고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시트콤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한 회도 빼놓지 않고 <거침없이 하이킥>을 챙겨보시는 걸 보면, 이 시트콤이 자아내는 공감대의 폭이 참 넓구나 싶어요. 심지어 칠순의 이순재조차 요즘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줄 때마다 ‘野東순재’라고 적는다니, <거침없이 하이킥>을 사랑하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닌가 봅니다.
|
<거침없이 하이킥> 제작발표회장에서 | |
제가 가장 애정으로 지켜보는 캐릭터는 최민용이 열연하는 이민용 선생입니다. 기획단계에서
<연애시대>의 패러디로 기획되었던 캐릭터인지라, 묘하게
<연애시대>의 동진을 닮은 듯한 말투로 시작했던 이 캐릭터는, 지금은 온전히 자기 힘으로만 살아 숨 쉽니다. 저는
<연애시대>의 열성적인 팬도 아니었지만, 이혼이라는 사건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낯선 일이 아닌 덕분에 신지와 민용의 에피소드를 보면서 자주 공감했어요.
아직 ‘이혼’을 피해야 하는 일,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탓에 크고 작은 불이익을 겪을 때마다 괜히 자책하고 주눅이 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화면으로 뛰어들어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해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최근엔 민용이 자신의 이혼경력 때문에 서민정과 원치 않는 이별을 겪어 많은 시청자가 안타까워했지요. 그러나 서민정과의 러브라인이 그렇게 평등한 관계는 아닌 데다가 헤어지는 과정에서조차 민정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이 기대 이하여서, 적지 않은 사람이 민용이라는 캐릭터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둘이 헤어지기를 바랄 정도는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건, 민용이 학교에선 ‘미친개’로 통한다는 겁니다. 물론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풍파고등학교’는 판타지에 가까운 공간이라고 제작진도 인정한 바 있지만, 민용은 매질하는 장면도 몇 번 안 보여주고 ‘미친개’라는 별명을 달고 삽니다. 볼 때마다 재미있지 않나요? ‘학교짱’ 윤호는 오토바이를 사려고 아이들에게 ‘삥’을 뜯기는커녕 아르바이트로 착실하게 돈을 모으고, 매타작하는 장면도 별로 없는 민용은 ‘미친개’라는 별명을 얻은 공간. 풍파고등학교는 현실의 고등학교와 비교하면 아주 안전하고 말랑말랑한 판타지의 공간입니다. 적어도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그렇게 안전하지 않았거든요. 현실 세계의 고등학생들이 보기엔 풍파고등학교는 천국에 가까울 겁니다.
제가 이런 생각에 잠기게 된 건, 요즘 민용의 행동에 부쩍 감정이입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오후, 한라봉을 까먹으며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면서 민용에게 잔뜩 감정이입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폭력교사에게 감정이입을 한 건 민용이 처음이라고요. (나한테 이렇게까지 공감을 자아낸 폭력교사는 당신이 처음이야!) 숙제를 안 해오고선 온몸을 배배 꼬며 봐달라고 부탁하는 유미의 손바닥에 매질하는 민용을 보며 통쾌해하는 절 발견하고는 화?짝 놀랐다니까요. 그러니 제가 복잡한 심경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야, 내가 빈약한 인간관계 대신에 TV를 벗 삼아 살다 보니 급기야 폭력교사에게까지 감정이입을 하고 신나게 보고 앉았구나. 저건 맞을 만한 일이네, 하고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에 불안했는데, 주변의 반응을 둘러보니 다들 저처럼 생각하더라고요.
물론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쉽게 주인공에게 마음을 줍니다. 주인공이 살인을 저질렀다거나 도둑질을 한다거나 하는 설정이 나와도, 우리는 주인공이 잡히지 않고 무사하기를 바라지요. 아마 내내 주인공의 행동에 불편함을 느끼고 미워하면서 극을 보는 건 관객으로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기에 쉽게 투항하는 거겠죠. 어쩌면 민용을 보면서 감정이입을 하는 건 민용이 극의 중심에 있는 배역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유미는 극 중에서 무식한 데다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잖아요. 그런 캐릭터가 고난을 겪는 걸 보고 즐기는 데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는 없겠죠.
게다가 민용은 -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얻은 정보만 가지고 판단했을 때 -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선생입니다. 윤호에게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지만 민호가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특별히 민호를 더 아끼지도 않습니다. 자기 조카라고 애들을 더 예뻐하지도, 더 관심 있게 지켜보지도 않고요. 자기 사정이 이러니 좀 봐달라는 유미의 말을 ‘네가 스무 살이 넘었든 스파이든 뭐가 달라져? 넌 학생이고 학생이면 공부를 해야지,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해?’라며 일축하고는 여느 학생과 마찬가지로 대합니다.
촌지를 요구하지도 않고, 여학생을 성희롱하지도 않으며,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인격 모독적인 호칭을 사용하는 일도 좀처럼 없습니다. ‘그저 학생은 엄격한 기준에 따라 매로 훈육해야 말을 잘 듣게 되어 있다’라고 믿는 사람에 불과하지요. 그리고 우리네 학교에 널리고 널린 게 그런 선생입니다. 어쩌면 학창 시절에 민용을 보고 ‘미친개’라고 투덜댔던 학생도 졸업 후엔 민용을 찾아와 ‘사실 선생님 생각이 가장 많이 나요’라며 수줍게 고백할지도 모르죠. (아니, 분명히 그럴 겁니다. 500원 겁니다.) 적어도 민용이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부임한다면 사람 좋은 선생으로 꼽힐지도 몰라요.
그래서 전 사실 <거침없이 하이킥>의 세계관이 조금은 부럽습니다. 아이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지도 않고, 여학생을 성희롱하는 것도 아니고, 촌지를 밝히는 것도 아니며, 애가 걷지 못할 때까지 두들겨 패는 일도 없는 민용이 ‘미친개’라는 말을 듣는 세상이라면, 지금의 우리처럼 육체적 폭력을 교육의 수단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지경까지 전락한 건 아닐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침없이 하이킥>의 이민용 선생 같은 인물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선 폭력교사 축에도 못 낄 거라고요.
하지만 그래도 찜찜함은 남습니다. 아무리 공정한 선생이라고 하더라도 폭력을 쓰는 게 정당화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정직하게 분석하자면 제 안의 폭력성이 민용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 대리만족된 거라고 말해야겠지만, 전 대신에 (뻔뻔스럽게도!) 민용이라는 배역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연기자 최민용 탓으로 돌릴 겁니다. 제가 체벌이라는 형태로 가하는 폭력을 잠시나마 옹호하게 된 건 다 최민용이 연기를 잘해서란 말입니다!!
물론 애 딸린 이혼남에 폭력교사라는 민용의 프로필에서 저와 닮은 점이란 건 남자며 막내라는 것뿐이지만, 전 그가 낯설지 않습니다. 전 그가 원치 않은 이별을 하고 영문도 모르는 엄마 문희의 품에 말없이 안길 때 그 아픔에 함께 아파했습니다. 비록 하루 만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추락하는 결과를 낳긴 했지만, 마지막 순간이라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에 민정에게 최고의 하루를 선사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며, 사람이 모질지 못한 탓에 더 잔인한 결과를 낳았구나 하는 생각에 못내 가슴이 쓰렸지요. 엄마에게 함부로 구는 형수에게 대들고, 이혼한 전 아내에게 느끼는 감정이 의리인지 미련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과장되지 않으면서도 진심이 전달되는 경지입니다.
아마 이렇게까지 감정이입 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민용이란 캐릭터가 사회 초년생이 절뚝거리며 정글 같은 세상을 견뎌내는 보통 모습을 잘 담아내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이 과거에 내린 선택을 자꾸만 회의하고,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걸까’ 하며 현재의 선택을 의심하는 모습. 자기 앞을 가로막은 삶의 조건에 좌절하기도 하는 모습이 남의 일만은 아닌 거죠. 그리고 최민용은 이런 캐릭터를 과장이나 비약 없이 덤덤하고 시니컬한 태도로 잘 소화하고 있어요.
보통 이런 캐릭터를 맡은 배우가 하기 쉬운 착각은 고뇌의 깊이를 더 깊게 표현하면 할수록 그 캐릭터의 감정이 더 잘 전달될 거라는 거예요. 얼굴 근육을 우스꽝스럽게 실룩거리며 눈물을 훔치고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벌려가며 울부짖는 행동이 캐릭터의 내면을 더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아요. 그런 배우에게 쉽게 ‘연기파’라는 호칭을 붙이기 좋아하는 미디어의 잘못도 크지만, 선배 연기자의 연기론을 배우는 게 아니라 그 기교만 따서 활용하는 배우들의 쉽고 얄팍한 연기도 비난을 피하긴 어려울 겁니다.
‘눈물의 여왕’이네 뭐네 하면서 얼마나 빨리 눈물을 흘리는가를 연기력의 잣대로 삼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최민용의 덤덤한 연기는 그렇게 크게 다가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우리가 고난을 겪을 때 겉으로 그 징후가 그렇게 극적으로 드러나는 일은 좀처럼 없죠. 웃고 있어도 속으로 울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말 못 할 아픔을 감춘 채 멀쩡한 척 다시 일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보편적인 고난의 모습에 가깝잖아요. ‘젊은이의 고뇌’를 표현하려고 흔히 쓰는 ‘먼 산 바라보기’ 같은 설정샷 하나 없이, 최민용은 이혼한 아내를 계속 만나야 하는 씁쓸함과 원치 않은 이별을 하고도 나쁜 놈인 척해야 하는 구질구질한 현실에 분개를 표현합니다.
연기자 최민용이 어떤 사람인지 전 잘 몰라요. 대표작으로 꼽히는 <논스톱> 시리즈를 싫어했던 탓에 최민용이 짠돌이로 열연했던 모습 같은 건 기억이 없지요. 하지만 처음엔 그저
<연애시대> 동진의 모사 같았던 민용이 독립적인 캐릭터로 살아 숨 쉬게 된 건 최민용의 자연스러운 연기 덕이 큽니다. 연극조의 하이톤 박해미나 코미디 연기의 느낌을 살린 정준하의 연기도 흠잡을 구석이 없지만, 적어도 이 시트콤에서 제대로 된 정극 연기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젊은) 연기자라는 사실 또한, 캐릭터에 현실감을 불어넣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대본의 공을 잊어선 안 되겠죠. 민용이라는 배역이 크게 망가지는 일 없이 비교적 정상적인 캐릭터라는 점이 시청자에게 편안하게 감정이입할 조건을 만들어 주는데요, 이 점은 앞으로 최민용의 연기 인생에 큰 자산이 될 겁니다. 솔직히 김병욱 시트콤에 등장하는 캐릭터치고 망신살 뻗치는 일 없이 존엄을 지키며 시즌을 마감하는 캐릭터가 몇이나 되겠느냐고요. 앞서 맡았던 배역의 강렬함 때문에 다른 이미지의 역할을 좀처럼 따내지 못하는 박영규나 노주현 같은 배우에 비하면 최민용의 미래는 비교적 밝아 보입니다.
이민용이란 캐릭터는 운이 좋습니다. 폭력교사임에도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나누는 과정에서 공감을 일으킬 수 있어요. 현실 세계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폭력교사에겐 주어지지 않은 특권이죠. 최민용이란 배우 역시 운이 좋습니다. 군 전역 후 처음으로 받은 배역이 이렇게 많은 시청자에게 사랑받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배우가 전역 후 작품 선택을 잘못해서 스스로 가능성을 꺾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마당에, 최민용은 자신이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캐릭터로 존재증명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운이 좋은 건 시청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절제된 연기만으로도 캐릭터의 진심을 전할 줄 아는 연기자가,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해내는 캐릭터를 만나 호연하는 광경을 목격하는 건 큰 행운이에요. 그것도 젊은 연기자가 그러니 말입니다. 요즘 젊은 연기자들의 연기를 싸잡아 평가절하하고 싶진 않지만, 감히 말씀드리건대 눈에 힘주고 먼 산 한번 바라보는 것으로 고뇌를 다 표현했다고 믿는 소년과, 스타 파워를 등에 업은 채 좋다고 말하기엔 민망하기 그지없는 연기력에도 미니시리즈 주연 자리를 손쉽게 따내는 가수가 판치는 드라마 제작 풍토에 이런 배우가 있다는 건 축복 같은 일입니다.
오늘은 왠지 본문 앞보단 뒤에 다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변명 아닌 변명 몇 마디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대로 도올 김용옥 교수의 책
『기독교 성서의 이해』를 구해서 읽고는 있지만,
『요한복음강해』까지 두 권을 합치면 990여 페이지에 이르는 데다가 무게는 1.5kg이 넘어가는지라 아직 뭐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기독교 성서의 이해』도 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한국 기독교계와 도올 선생 간의 갈등양상은 더 재미있게 변하고 있죠? 서강대학교 이사장 박홍 신부는 여느 때처럼 무시무시한 발언 -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 으로 불을 지폈고요, 한신대 김경재 교수는 도올에게 용기 있는 발언을 했다며 칭찬하기도 했죠. 호객은 할 만큼 한 듯해요. 이제 진짜 토론만 하면 될 겁니다.
사실 도올 선생에 대해 제가 쓰고 싶은 내용은 지금이라도 쓰려면 쓸 수는 있지만, 적어도 도올 선생이 뭐라고 주장하기에 문제가 되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짚어보려면 저 무시무시한 분량의 텍스트를 어떻게든 꾸역꾸역 소화하고 나서 쓰는 게 낫겠죠. 그런 이유로 도올 선생에 대한 글은 다음 시간에 찾아뵙도록 할게요.
사실 개인적인 소망으론 그때쯤엔 도올 선생과 기독교계 간의 토론이 상호비방이 아니라 날카로운 지성이 서로 칼을 겨루고 진검승부 하는 자리가 되길 바라지만, 일이 돌아가는 걸 보면 꼭 그럴 것 같지만은 않아요. 어쩌겠어요, 사람이 하는 일인데 다 마음처럼 될 리는 없으니까요. 아무튼 조금만 더 진득하게 기다려보죠. 게다가 지난번에 제가 쓰고서도 유달리 날이 섰다 싶던 김성주 글에 주르륵 달린 리플을 보면서 이번 글은 어깨에 힘을 좀 빼고 쓰는 게 낫겠다 싶기도 했고요. 오늘 도올 선생에 대한 글까지 쓰면 ‘2타석 연속 까칠’의 기록을 세우게 될까 봐 좀 자제하고 싶기도 했어요.
두 시간 연속 도올 선생에 대한 언급을 한 덕분에 많은 분이 크게 기대하실 줄로 알지만, 너무 큰 기대를 하진 말아주세요. 제가 울렁증이 심해서 독자 여러분의 기대가 크면 클수록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으니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