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폭설과 한파가 몰아치고 칼바람에 옷깃을 여며야 하는 날씨지만, 지금은 분명히 3월이고 새봄의 첫머리쯤인 시기입니다. 이 매서운 꽃샘추위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들겠지요. 황사가 심해진다는 우울한 소식이 먼저 들리지만, 그래도 봄 소식은 여전히 새 희망이며 나른한 설렘입니다.
새봄의 소식을 전하는 나비와 꽃, 그리고 그 애벌레의 성장 이야기를 담은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책 『꽃들에게 희망을』은 화사하고 따스한 봄의 동화며, 그 품은 의미와 상징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라기보다는 바쁜 경쟁사회에서 자신을 잃어가는 이 시대 사회인들에게 다가오는 ‘어른을 위한 동화’입니다.
주인공인 ‘줄무늬애벌레’는 알에서 깨어나 화창한 세상을 바라보며 즐거워합니다. 반짝이는 햇살과 신선한 바람은 갓 태어난 애벌레의 식욕을 자극하고, 애벌레는 자기가 태어난 나무의 모든 잎사귀를 먹어치우며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줄무늬애벌레는 먹는 걸 멈추고 생각합니다. 나무 위에서 그저 먹고 자고 먹고 자는 일의 반복… 그보다 더 나은, 뭔가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줄무늬애벌레는 그동안 살던 나무에서 내려와 새로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새로운 세상의 모습에 경탄하다가, 줄무늬애벌레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자신과 비슷한 애벌레 여럿이 어느 높은 기둥 위로 우르르 기어오르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그 기둥은 알고 보니 그 꼭대기로 올라가려는 애벌레가 뭉친 모습이었습니다.
꼭대기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줄무늬애벌레도 그 꼭대기에 가보기로 합니다. 막상 올라가 보니 애벌레 기둥은 정신없고 비정한 세계입니다. 서로 먼저 꼭대기에 가려고 밟고 밟히며, 그 경쟁에서 밀려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애벌레도 종종 생깁니다. 그렇게 올라가던 도중, 줄무늬애벌레는 노랑 애벌레를 만나는데, 노랑 애벌레는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두 벌레는 차마 서로 밟지 못하는 사랑의 감정을 알게 되고, 이 지독한 경쟁의 기둥을 벗어나 조용한 곳에서 기대어 살기로 하고 내려옵니다.
두 애벌레만의 공간은 따스하고 행복했습니다. 둘은 그저 열심히 기어다니고, 포옹하고, 함께 풀을 뜯어 먹으면서 다시 또 무럭무럭 자랍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줄무늬애벌레는 아직도 기둥 꼭대기에 대해 미련이 가득합니다. 다시금 그 평화로움이 지겨워지자, 줄무늬애벌레는 다시 기둥을 향해 떠나겠다며 노랑 애벌레를 등 뒤에 남겨둔 채 여행을 떠납니다.
넓고 한적한 곳에서 잘 먹고 힘을 키운 줄무늬애벌레는 기둥에 올라서는 힘이 남달라졌음을 느낍니다. ‘오직 꼭대기!’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줄무늬애벌레의 단호한 결심은 행동으로 드러나 모든 애벌레를 제치고 그 꼭대기에 마침내 도달합니다. 그러나 꼭대기는 허무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 기둥은 애벌레뿐이었고, 게다가 그런 기둥은 꼭대기에 와서 둘러보니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 수십 개도 넘게 있었습니다.
좌절한 줄무늬애벌레는 그 애벌레 기둥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노랑나비 한 마리를 봅니다. 자유롭고 아름다운 노랑나비 한 마리. 노랑나비는 유독 줄무늬애벌레 주위를 빙빙 돌면서 뭔가를 애써 말하려는 듯합니다. 줄무늬애벌레는 무언가를 느끼고 다시 기둥을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의 첫 페이지를 넘기면 늘 그렇듯 ‘'XX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헌정하는데, 그 문구는 책 전체 주제를 포괄할 만큼 의미심장합니다.
“혁명을 추구했던 나의 아버지에게 바칩니다.”
이 헌정문구를 읽고 책을 다시 들여다보면, 책은 혁명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목표조차 모른 채 앞만 보며 서로를 짓밟고 달려가는 사회, 그 사회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그 흐름에 역행하여 진정한 삶을 위해 실천하는 줄무늬애벌레의 모습은 고민하는 혁명가입니다. 줄무늬애벌레는 그런 자신의 깨달음을,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모두가 쉬쉬했던 ‘꼭대기에 아무것도 없음’이란 사실을 아래쪽의 모든 애벌레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그러나 그 혁명은 일반적인 의미로 쓰는 넓은 범주라기보다는 혁명가, 혹은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혁명’으로서의 의미가 더 맞을 겁니다. 세계의 존재 양식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개인이 더 나은 삶을 살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에 옮긴 것이 두 애벌레의 모습이고, 이는 내적 혁명입니다.
내적 혁명이라는 단어가 어색하다면 ‘스스로 깨달음’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주인공인 줄무늬애벌레의 연인 격으로 등장하는 노랑 애벌레는, 줄무늬애벌레가 다시 기둥을 향해 떠나고 나서 혼자 남아 살다가 나뭇가지에 걸린 번데기를 봅니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 번데기를 구해주려고 하다가 번데기에게 ‘나비가 되려면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노랑 애벌레는 발도 날개도 없는 자신의 몸속에 과연 나비로서 자질이 있을지를 의심하지만, 그 의심의 끝을 넘어 결국 스스로 고치를 만들어 내 기나긴 명상에 돌입합니다.
어찌 보면 이는 불교적 관념에도 맞닿아 있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고자 고치 속에서 침묵과 명상으로 수행하며, 그를 통해 자기 안에 있는 더 큰 가능성을 발견해 낸 것이 바로 노랑 애벌레입니다. 그는 나비가 되어서 줄무늬애벌레에게 새로운 길이 있음을 알려주려고 노력하며, 자신의 삶에 머물지 않고 꽃과 꽃 사이를 오가며 새로운 생명 탄생을 위한 자연의 큰 걸음에 이바지합니다.
책 첫 페이지의 헌정 문구에서 아버지를 언급한 것은 저자가 이러한 참 혁명가의 모습을 아버지에게서 봤다는 의미입니다. 혁명을 꿈꾸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자신의 삶 또한 여러 가지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으로 채워나갔던 저자는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삶의 방향과 목표에 대해 많은 가치를 전해 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롤 모델로서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을 동화에 투사해 냈다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은 사실 동화로 널리 보급되었지만, 이런저런 의미를 따져볼 때 어린이보다는 오히려 어른에게 큰 감동을 줍니다. 당장 저 자신도 중학교 때 분명히 이 동화를 봤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 다시 봤을 때 흘렸던 눈물 이상의 감동은 아니었음을 기억합니다. 당장 그 의미 없는 애벌레 기둥 속에 한 번쯤 몸을 담가 본 사람이라면, 하루쯤 하늘을 보며 생각해 봤을 주제를 포근하게 다루는 동화가 따스하게 다가오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림동화다 보니 텍스트 자체는 많지 않고, 펜과 2도 채색 덕분에 간결하면서도 여운이 남는 삽화 톤은 전체 스토리가 주는 분위기와도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감동을 더합니다. 특히, 말을 아끼고 오직 삽화로서만 마무리 짓는 결말의 잔잔한 여운은 간만에 삶의 소중함을 머리가 아닌 감성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봄의 즐거운 조언자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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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