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제벨은 나무랄 데 없는 아이였어요’로 시작하는 『신통방통 제제벨』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 기억이 납니다. 큼직하고 시원시원한 선과 투명하고 경쾌한 색의 그림 아래에 고작 한두 줄의 글이 있었지만 책장을 넘기면서 ‘정말 이런 아이가 있을까? 이런 아이의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엄마일 거야’ 하며 그날따라 방 청소도 안 하고 말도 안 듣고 여기저기 칠칠맞지 못하게 음식을 흘리고 다니는 딸아이가 더 미워졌지요.
그렇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는데 점점 제제벨의 얼굴이 변해가대요. 순수해보였던 눈은 뭔가 오만으로 가득 찬 날카로운 눈으로, 방글방글 웃던 입은 마치 뭔 말이라도 하면 당장 열 배로 갚아줄 거라는 듯 입술을 꽉 깨문 모습이었어요. 그러더니 마침내 맨 마지막 장에서는 악어에게 잡아먹히고 맙니다. 책의 결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지요. 아니, 어쩌면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나 할까요? ‘지금 내가 뭘 부러워했던 거지?’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는 거라고 늘 이야기하면서 ‘내 아이가 제제벨 같았으면’ 하고 바랐던 나의 이중적인 생각에 부끄러워지더라고요.
지난 화요일에 바로 이 책을 쓴 영국의 그림책 작가 토니 로스의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국가 간 다양한 독서문화 체험 및 교류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는 취지의 하나로 영국문화원에서 주최하는 ‘매직 펜슬’ 전시회가 2월 5일부터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어요. 영국의 내로라하는 13명의 어린이 그림책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 60여 점과 200여 권의 도서, 작가 연보 등을 전시하고 대표 작가로 토니 로스를 초청하여 출판계와 일반인, 어린이 등을 대상으로 강연회도 연다고 해서 이번에 만나 보게 되었답니다.
강연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어른과 아이들은 작가의 책을 읽기도 하고 비디오도 보면서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쓰는 작가는 누굴까?’ 하며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강연이 시작되고 영국문화원 직원과 통역을 맡아주실 분과 함께 가벼운 캐주얼 복장의 하얀 머리, 약간 붉은 피부에 상기된 표정의 할아버지가 한 분 들어오셨습니다. 조용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는 그의 표정은 왠지 장난기 많은 소년의 그것, 뭔가 다음 일이 궁금하고 기다려지는 그런 표정이었답니다.
| 토니 로스와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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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어떻게 시작될까 궁금했는데 작가는 매직펜을 하나 들더니 옆에 미리 준비된 커다란 스케치북에 쓱쓱 선을 그리기 시작하더군요.
“제가 여러분께 제 친구인 데이비드 매키와 자동차를 타고 여행을 하다가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마치 종이에 펜을 대기만 하면 자동으로 술술 그림이 나오는 요술 펜이라도 되는 양 무척 쉽게 그림을 그려가며 한 장 한 장 아이들은 물론 조금 큰 아이들(그는 ‘어른’을 그렇게 표현하더군요.^^)까지도 그의 이야기 세계 속으로 쏙 빠져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맛있는 이야기 한 편을 들려준 작가는 강연이 끝나고 질문을 받았는데요, ‘작가가 되기 전 자신의 꿈은 무엇이었느냐?’라는 질문에는 갑자기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스케치북 쪽으로 가더니 단번에 소를 타고 로데오를 하는 소년의 모습을 그리고는 ‘어릴 때 나는 카우보이가 되고 싶었는데 엄마가 미국으로 보내주지 않아서 결국은 카우보이는 되지 못했지만 지금은 승마를 즐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떻게 작가가 되었느냐?’라는 물음에는 ‘공부를 못해서 대학에 갈 실력은 안 되었지만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아서 아트 스쿨에 들어가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어린이 책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시작한 것 같다’라고 했어요. ‘작품의 소재는 어디서 얻는가?’라는 질문에는 싱긋 웃더니 ‘와인 한 잔을 마시죠. 여러분도 와인을 마셔보세요. 생각이 풍부하게 일어나고 또 건강에도 좋답니다’라고 말해서 다들 웃었습니다.
‘
『신통방통 제제벨』에 나오는 주인공은 ?재 인물이냐?’라는 한 아이의 물음에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우리 학교에 정말 그런 아이가 있었다. 공부도 일등, 스포츠도 일등, 뭐든지 일등이었지만 우리 학교 아이들은 모두 그 아이를 미워했다. 나도 그랬다. 나중에 커서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한번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하자 질문을 했던 아이가 ‘그럼 복수하신 거네요’라고 말해서 강연장은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한 여자 아이가 수줍게 ‘저는 동화작가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무엇을 배워야 하나요?’ 하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그 아이를 잠깐 깊이 있게 쳐다본 다음 단호하게 ‘nothing!’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고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끊임없이 세상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아이는 깜짝 놀라며 당황했어요. 보통 어떤 학교, 어떤 과정이 있고 어떻게 하고… 그런 식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아이에게 그가 덧붙인 말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짧은 글이라도 좋은 생각이 났을 때는 열심히 써보고, 그것을 모아서 출판사의 편집부로 보내는 거지요. 아무 데나 보내지 말고 까다롭게 잘 골라서 보내고 이제 연락을 기다리면 되는 거랍니다. 자신을 가지세요!’
어쩌면 그 아이가 미래에 유명한 동화작가가 되어서 ‘내 인생을 변화시킨 한 사람’으로 토니 로스와의 만남을 꼽을지도 모르겠구나, 그 아이에게 지금 이 순간은 무척 중요한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라도 변화와 가능성을 줄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가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스케치하는 토니 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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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이 끝나고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섰는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름을 물어보던 그가 우리 아이들의 이름에 ‘lee’가 들어가니까 갑자기 자신의 옷 안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내 이름도 여기에 lee가 들어가요. 보세요!” 하며 아이에게 보여주면서 마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의 그런 모습에 아직도 어린아이의 시선에서 아이들의 생각을 그대로 담은 그림을 그리는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어요. 마침 바로 다음날 수술을 앞둔 친구의 딸이 있어서 그 아이 이야기를 하며 사인을 부탁했더니 무척 놀라면서 어서 낫기를 바란다며 그림까지 그려서 사인을 해주고 아래에 ‘please please get well soon!’이라고 써주었어요.
낯선 나라에서 온 처음 본 할아버지에게 유머와 재미로 가득 찬 이야기를 들은 우리 아이들은 그날 밤 토니 로스가 그렸던 그림을 기억나는 만큼 스케치북에 옮겨 그리며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재잘재잘 끝도 없이 만들어 가더군요.
“언니, 그 할아버지 진짜 그림 잘 그리지? 쓱쓱 잘 그리지?”
“그래, 그리고 정말 친절하고 명랑한 분 같아. 난 할아버지는 모두 화만 내고 애들을 무시하고 어려운 이야기만 하는 줄 알았거든.”
“우리 나중에 영국에 가서 다시 그 할아버지 만나보자!”
“그래, 그러자, 그때는 내가 그린 그림 가져가야지.”
| 토니 로스에게 사인 받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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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술할 친구의 병문안을 갈 때 꼭 가져가야 한다면서 아까 받은 토니 로스의 사인을 소중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잠들었습니다. 아이들과 토니 로스를 만나러 가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은 꿈속에서 토니 로스와 함께 수학 빵점, 영어 빵점이라 적힌 시험지로 비행기를 접으며 신나게 놀고 있지는 않을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