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황후화>에 대한 변호

얼마 전에 장예모의 <황후화>를 봤어요. 원래 신작을 보기 전엔 영화에 대해 사전 지식을 될 수 있는 한 줄이려고 하는 편이어서 인터넷에 예고편이 뜰 무렵에도 이 작품이 조우의 『뇌우』를 번안한 영화라는 걸 몰랐죠.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얼마 전에 장예모의 <황후화>를 봤어요. 원래 신작을 보기 전엔 영화에 대해 사전 지식을 될 수 있는 한 줄이려고 하는 편이어서 인터넷에 예고편이 뜰 무렵에도 이 작품이 조우의 『뇌우』를 번안한 영화라는 걸 몰랐죠. 그걸 알게 된 건 우연히 한 잡지에서 주윤발이 원작 이야기를 꺼낸 걸 읽었기 때문이에요.

알고 영화를 보면 참 괴상해요. 물론 원작의 시대나 공간 배경을 옮기는 일은 흔해요. 가까운 예로 로이 리에게서 아시아 영화의 판권을 사서 만든 할리우드 리메이크 영화가 바로 그런 짓을 하고 있지요. 셰익스피어의 희곡도 현대 마이애미에서 19세기 유럽, 중세 일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배경으로 공연되고요.

하지만 이런 변형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어요. 『햄릿』은 캐네스 브래너가 그랬던 것처럼 19세기 말을 무대로 할 수도 있고 마이클 앨머레이다의 영화처럼 현대 월 스트리트를 무대로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시대나 그리스 시대로 가는 경우는 전혀 없지요. 고전 원작의 무대를 옮기는 각색자나 연출자는 대부분 배경을 현대 관객에게 더 가까운 시대나 공간으로 옮깁니다. 이는 원작에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도 하고 원작의 보편성이 현대에도 먹힌다는 걸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예모는 거꾸로 갔어요. 20세기 초반의 중국을 무대로 한 현대극을 당나라쯤으로 추정되는 과거의 황궁으로 끌고 갔지요. 덕택에 광산 재벌의 가족이 집 안에서 벌이는 꽈배기 멜로드라마는 한 나라의 운명을 뒤흔들고 수만 명의 목숨이 날아가는 가상의 역사로 탈바꿈합니다.

이런 변형은 무척 천박해 보입니다.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죠. 조우의 『뇌우』에서 시대 의식은 작품의 핵심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20세기 초 격동기 중국의 사회적·계급적 변화 과정을 떼어버리면 말 그대로 콩가루 집안 멜로드라마밖에 남지 않지요. 주제가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장예모가 이 빈자리에 쏟아 부은 건 엄청난 돈을 들여 꾸민 가짜 당나라 의상과 호사스러운 세트니, 결국 스펙터클을 만들려고 현대 고전 하나를 망가뜨렸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황후화>의 공리
그래도 전 머리를 굴려서 장예모를 변호해줄 구석이 없나 생각해 봅니다. 못할 것도 없어요. 조우의 『뇌우』가 시대 배경으로 삼은 1920년대의 중국은 벌써 한참 과거입니다. 지금의 관객에게 『뇌우』는 역사극이죠. 원작의 세계관이 띤 역사 인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자본주의 냄새를 풀풀 풍기는 지금의 공산주의 국가에서 그렇게까지 모험적인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세계관을 현대 중국에 그대로 이식하는 것도 여러모로 어색하고요.

당나라 시대로 옮기면 장점이 있을까요? 흠… 이런 게 있습니다. 20세기는 중국 역사에서 아주 특별한 시기입니다. 나라와 문화의 모양이 완전히 뒤바뀐 시대였지요. 하지만 당나라는 그보다 보편적인 중국을 보여주는 시대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문화나 나라를 규정하는 것은 결국 과거니까요. 아무리 영화 속의 시녀가 코르셋 입은 서양 귀부인처럼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복장과 행동과 대사의 고증이 맞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죠.

그렇다면 영화는 20세기라는 시대 배경을 버림으로써 원작보다 보편적이고 중국적인 주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반동적인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그리면서 희망찬 미래를 암시하고 한 시대를 종말을 예고하는 대신, 중국이라는 나라의 절대 권력과 과대망상적인 사고에 대해 한 번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기회를 얻는다는 거죠. 그렇게 본다면 노란색 물량공세로 범벅이 된 <황후화>의 요란한 스펙터클도 또 다른 의미를 부여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지금의 중국을 바라보는 더 정확한 틀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정말 그게 장예모의 의도였을까요? 모를 일이죠. 전 그냥 그가 주번의 캐릭터를 이용해 공리에게 휘황찬란하고 근사한 비극의 여자 주인공 역할을 선사하려고 원작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스펙터클을 그냥 요란한 스펙터클로 바라보는 것도 심심한 일이죠.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8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오늘의 책

산업의 흐름으로 반도체 읽기!

『현명한 반도체 투자』 우황제 저자의 신간. 반도체 산업 전문가이며 실전 투자가인 저자의 풍부한 산업 지식을 담아냈다.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반도체를 각 산업들의 흐름 속에서 읽어낸다. 성공적인 투자를 위한 산업별 분석과 기업의 투자 포인트로 기회를 만들어 보자.

가장 알맞은 시절에 전하는 행복 안부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는 사람, 작가 김신지의 에세이. 지금 이 순간에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들, ‘제철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다. 1년을 24절기에 맞추며 눈앞의 행복을 마주해보자. 그리고 행복의 순간을 하나씩 늘려보자. 제철의 모습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2024년 런던국제도서전 화제작

실존하는 편지 가게 ‘글월’을 배경으로 한 힐링 소설. 사기를 당한 언니 때문에 꿈을 포기한 주인공. 편지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모르는 이와 편지를 교환하는 펜팔 서비스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성장해나간다. 진실한 마음으로 쓴 편지가 주는 힘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소설.

나를 지키는 건 결국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물질적 부나 명예는 두 번째다. 첫째는 나 자신. 불확실한 세상에서 심리학은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무기다. 요즘 대세 심리학자 신고은이 돈, 일, 관계, 사랑에서 어려움을 겪는 현대인을 위해 따뜻한 책 한 권을 펴냈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