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빈치 코드』 이후로 한동안 소설계에서는 팩션Faction이라는 장르가 인기를 끈 바 있습니다.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사실Fact에 작가의 고유한 상상력Fiction을 덧붙여 쓴 소설을 통칭하는 말이 팩션인데, 이 팩션 소설의 붐 속에 가장 많이 거론된 사람은 의외로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입니다.
“움베르토 에코도 울고 갈 소설!” “움베르토 에코가 깜짝 놀랄 소설” 등의 광고 문구에서 팩션의 원조로서 화려하게 그 이름을 뽐내는 이 사람은, 사실 소설보다 기호학 분야에서 더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단 한 편의 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비유럽권에서는 기호학자의 타이틀보다는 소설가로서의 필명이 더욱 알려졌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바로 그 팩션의 원조격인 『장미의 이름』입니다.
『장미의 이름』이 갖춘 소설 장르로서의 기초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추리 소설입니다. 르네상스의 기운이 막 태동하기 시작할 때쯤, 한 고색창연한 수도원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연쇄살인이 발생합니다. 수도사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과정은 누군가의 말대로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천사가 내리는 재앙의 모습과 같은 순서, 같은 모양새입니다. ‘악마가 나타났다’며 공포에 떠는 수도사와, 마을에 등장한 이단 심판관이 가져다주는 공포 속에 영국에서 건너온 수사 윌리엄은 연쇄살인의 배경에 무언가 다른 음모가 숨어있음을 느끼고 특유의 지식과 관찰력으로 사건에 접근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소설이 가져다주는 첫 번째 재미는 바로 이 추리에 있습니다. 주인공격인 영국 수도사 윌리엄은 영국의 경험론적 추론에 큰 영향을 받은 수도사입니다. 주로 ‘신으로부터 내려받은 지식’에만 집중하던 중세의 지식 체계와 달리 경험론적 추론은 실제 존재하는 사건과 사물에서 진리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100마리의 까마귀를 관찰한 결과 까마귀는 검은색이다’ 라는 예시로 많이 볼 수 있는 이 방식을 통해 윌리엄은 사건에 접근해 갑니다. 처음 도착한 수도원의 화장실을 찾아내는 센스나, 당나귀의 발자국을 보고 이름을 추론하는 모습에서 명탐정의 추리를 따라가는 추리소설 특유의 재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소설의 두 번째 재미는 서로 다른 사상의 충돌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윌리엄은 영국 경험론의 세례를 받은 수도사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무대가 되는 수도원에서 가장 연장자인 눈먼 수도사 호르헤는 지식이란 ‘신으로부터 내려받은 단 하나의 진리’가 계속 여러 가지 가시적 형태로 겉모습만 바뀔 뿐임을 꾸준히 강조하는 전통적인 지식에 대한 입장을 취합니다. 이 두 입장은 소설 속에서 윌리엄과 호르헤라는 대리인을 내세워 신학이라는 테두리를 치고 논쟁을 벌이는데, 이 논쟁은 소설 속의 명장면으로 손꼽히기도 합니다.
|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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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미의 이름』이 주는 재미의 핵심은 역시 그 주제에 달렸습니다. 수도원의 도서관은 정칠각형 구조 안에 전 세계(당시의 전 세계란 유럽과 아프리카 북부, 근동지방을 포함하는 지중해 근역을 가리킵니다)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한 도서관인데, 윌리엄은 도서관에 가보자마자 그 규모에 비해 공간도 좁고, 장서도 적다는 사실을 눈치챕니다. 옛 건물이 늘 그러했듯이 도서관 어딘가에 비밀의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윌리엄은 기하학에 기대어 사람의 눈을 속이는 도서관의 구조를 간파하고는 숨져진 방대한 지식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이 숨겨진 지식은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과도 연관이 있음이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 8장의 일곱 천사가 불러오는 재앙과 유사한 형태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살인극에 사람들은 악마의 소행이라고 혀를 내두르지만, 윌리엄은 그동안 죽은 이들이 모두 어떤 책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그 책은 바로 대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입니다.
처음 살해당한 수사 아델모는 책에 그림을 그려넣는 필경사였습니다. 그는 창세기편에 들어가는 삽화를 매우 우스꽝스럽게 그려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그 때문에 엄격한 호르헤로부터 크게 책망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 뒤로도 살해당한 이들은 모두 웃음, 희극, 유머 등으로 통칭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에 눈독을 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웃음에 관한 한 당대까지의 최고 명저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시학Poetics』은 인류 최초의 예술이론서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로 총 두 권으로 구성되었습니다. 1권은 비극을, 2권은 희극을 다루었는데, 경건함과 진중함을 신에 대한 최고의 경의로 생각했던 중세였던 만큼, 2권은 당연히 금서로 치부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중세 특유의 지식관(智識觀)도 한몫합니다. 마틴 루터 이전까지의 모든 성서는 일반 대중이 접하기 어려운 라틴어로만 적혀 있었습니다. 이는 성스러운 말씀이 자칫 세간에 이 언어 저 언어로 번역됐다가는 저급한 지식을 가진 대중에 의해 오염되거나 잘못 번역되어 수많은 낭설을 만들 수 있다는, 이른바 바벨탑에 대한 경계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모든 지식은 개방적이었다기보다는 폐쇄적이었으며, 특정 계층 –수도사 등– 에 의한 전승만이 목표였습니다.
그나마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기독교를 접목해 ‘철학과 종교가 서로 다르지 아니함’을 세운 스콜라 철학이 중세 기독교 사회의 핵심 논리가 되면서 지식에 대한 전승이라도 이뤄진 것이 당시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회가 고대 그리스의 이단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받아들였다 해도, 그가 웃음과 희극에 대해 말한 내용까지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절대 진리를 향해 바치는 경건함을 한순간에 뭉개는 대중적이고 저열한 유머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면 신마저 우습게 알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습니다.
호르헤가 바로 그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호르헤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보수적 태도를 취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편을 비밀의 도서관 어딘가에 감춰 놓고 공개하지 않으며, 그 비밀에 접근하려는 젊은 수도사들을 살해합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론적 인식론에 근거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윌리엄은 젊고 새로운 새 시류에 익숙하며, 과연 웃음이 그토록 통제되어야 할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 숀 코너리 주연의 영화 <장미의 이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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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람은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아델모의 우스운 성경삽화를 두고 크게 논쟁을 벌이는데, 단순히 두 사람의 논쟁이 아니라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의 거의 모든 가치가 충돌하는 과정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확립된 중세 스콜라 철학이 오컴 윌리엄에 의해 철학과 종교가 함께 서는 것이 어려움을 입증받는 변화, 경건함과 신성성에 기초한 신성(神性)이 세계의 중심이었던 시대에서 인간과 사물로 그 중심이 옮겨가는 변화,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 집중 등 새 시대로 접어들기 위한 모든 변화가 시작되던 시기였고, 고색창연한 어느 산골의 수도원은 그 변화라는 거대한 저항에 맞닥뜨리면서 사실상의 위기를 맞습니다.
결국 소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은 언제, 왜, 누구에 의해서 없어졌을까?’라는 주제를 연쇄살인극이라는 추리소설 장르를 통해 풀어냅니다. 그 주제를 풀고자 소설은 방대한 인식론, 미학, 신학적 주제를 아우르며 유럽의 지적 전승 전반에 걸친 폭넓은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그렇기에 한국의 독자에게는 개개인의 지적 수준을 떠나 그 내용이 어렵고 생소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중세 이전의 유럽 설화에 대한 묘사나 약초학에 대한 이야기는 생뚱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난점만 넘기고 본다면 세간의 평대로 ‘지적 만족’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독후감으로 남겨주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절대 에코의 소설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치 진짜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정말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이 그렇게 없어졌는지에 대한 사료는 하나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그럴듯한 이야기’일 뿐이지요.
게다가 에코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매우 관심을 두는 작가입니다.
『장미의 이름』이
『시학』 2권의 실종을 그럴듯하게 다룬 바 있고,
『푸코의 진자』에서는 프리메이슨, 카발라 등의 비밀 전승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그럴듯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전날의 섬』은 위도와 경도를 만들어내던 시대의 이야기, 최근작
『바우돌리노』에서는 발바롯사 전설, 성배 전설, 토리노 수의와 같은 유럽의 전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이른바 ‘구라꾼’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중세 유럽의 전승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꾸며’냅니다. 심지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대 문헌을 인용한 내용도 사실 상당수가 허구라고 하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중성과 지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보기 드문 소설가인 에코의 소설은 한국에서도 상당한 권위가 있습니다. 어디 가서 에코 소설쯤은 봤다고 하면 순식간에 독서가로서의 품위가 사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유럽이라는 지역적, 문화적 특성이 가득 반영된 소설이 한국에서 쉽게 읽힐 리는 없으며, 대부분의
『장미의 이름』 해설서도 기호학자인 에코의 특성을 반영한 기호학적 접근에서만 그칠 뿐 그가 문학 장르에서 보여주는 중세 유럽의 코드 활용에 대해서는 아직 만족할 만한 해설서가 드문 편입니다. 진정 에코의 소설(그의 학문적 영역은 예외로 합니다)을 즐기고자 한다면 중세의 여러 기호 –기독교의 코드, 중세의 민간신앙과 전설 혹은 민담 등– 에 대한 취미 혹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번역자 이윤기 씨의 풍부한 각주가 많은 부분을 보충해 주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각주가 지나치게 학구적으로 달리는 바람에 소설 특유의 맛은 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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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