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06년도 저물어 갑니다. 슬슬 연말 결산을 할 때가 된 거죠. 전 사실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연말 리스트를 짜는 것도 싫어하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번 이상은 이런 짓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안 하면 또 허전하고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일단 한국 영화가 엄청나게 만들어졌습니다. 백 몇 편이라나 그랬대요. 하지만 극장에서 본전을 뽑은 건 겨우 13편. 한류 유행은 푹 꺼졌고 다들 어떻게 된 거냐고 한숨만 짓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맥 풀릴 것은 없으니 올해 좋은 영화가 안 나온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괴물>이나 <타짜>처럼 흥행에 성공하면서도 본전을 단단히 뽑은 히트작도 있었습니다. <가족의 탄생>이나 <천하장사 마돈나>는 흥행에 실패했고 외국에서도 아직은 그렇게까지 큰 인기를 끌진 않지만, 한국 영화의 스펙트럼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점점 넓어진다는 멋진 증거입니다. 이 넓어진 스펙트럼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국영화’의 틀 안에 받아들여지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겠지만요.
| 2006년 개봉된 주목 받은 영화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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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백전백승을 거두었던 몇몇 스타가 참담한 흥행 실패를 거두었습니다. 차승원과 문근영이 그 사람들이죠. 사실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두 작품 모두 기획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차승원과 문근영이 나오니까 흥행이 될 거야…’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당연히 정신을 바짝 차렸겠지요. 그 결과가 어떨지는 또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빨리 배우질 못하잖아요.
다들 한류 이야기를 하지만 한류 엑스포니 어쩌니 하는 행사는 한류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기반에 서 있는지를 자발적으로 폭로하는 유치한 쇼였습니다. 이런 걸 보면 지금까지 우리가 성취한 것은 이런 걸 만드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진 게 아니라 그들의 유치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이룩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한국영화가 연달아 일본에서 흥행에 실패하는 동안, 요란한 일류의 물결이 닥쳤습니다. 물론
<일본침몰> 같은 번지르르한 영화는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스폰지와 씨네콰논에서는
<메종 드 히미코>나
<유레루>와 같은 작은 영화를 배급해서 짭짤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아오이 유우, 오다기리 죠, 우에노 주리와 같은 배우는 슬슬 일반 관객의 가시권 안에 들어왔고요. 하지만 더 주목할 만한 건 한국 영화나 텔레비전에 침투한 일본 원작의 영향력입니다. 올해만 해도
<미녀는 괴로워>와 같은 흥행 히트작이나
<아주 특별한 손님>과 같은 아트 하우스 영화가 일본 원작을 등에 업고 만들어졌으며 내년에는 <검은 집> <백색거탑> <무지개 여신> <반짝반짝 빛나는>과 같은 작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디에서건 이야기의 소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갑작스러운 열풍은 좀 지나치고 일방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무리 안에서만 겁을 내지 않는 낙타 같기도 하고.
| 점점 자신만의 영역을 개쳑나가는 일본 영화들 그리고 더욱 커지고 있는 일본 원작의 영향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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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호러 영화팬들에겐 2000년 이후 최악의 해였습니다. 그 정도면 사다코 영화를 만드는 게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알았을 법도 한데, 이 사람들은 가차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겨냥했던 흥행 결과도 좋지 않았고요. 그 사람들은 그냥 겁쟁이 바보들입니다. 다행히도 내년엔 진지한 사다코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은데… 또 누가 아나요. 베트남 여자 귀신이 나온다는 <므이>가 좀 걸립니다. 그 영화의 감독이 가장 뻔뻔스러운 사다코 영화인
<령>을 만든 사람이라 더 걱정이 되고. 제발 저번 영화에서 교훈을 좀 얻었기를. 베트남 유령 이야기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맘에 든단 말입니다. 그 영화의 무대인 호치민 시는 저도 한 번 가본 적 있는데, 귀신이 안 나오면 오히려 이상할 곳이더라고요. 별별 귀신 이야기도 다 들었고.
영화 바깥 세계의 이야기를 해보라면, 전 사람들이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그렇게 속물적인 기대를 품고 있다는 것을 올해처럼 확실하게 인식한 적이 없습니다. 몇몇 포털 사이트와 그 동네 댓글로 대표되는 대한민국 인터넷 환경이 점점 저열한 함정에 빠지고 있다는 걸 알았고요. 대중이 간단한 캐치프레이즈에 얼마나 쉽게 넘어가는지, 별 의미 없는 분노와 증오가 얼마나 쉽게 확장되는지 알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한국 대중문화, 특히 케이블 텔레비전이 새로 시작한 천박함의 영역확장은 그 뻔한 부작용에도 오히려 긍정적으로 읽힐 구석이 있습니다.
할 이야기가 더 있을까요? 물론 더 있겠지요. 하지만 시간과 원고량은 한계가 있고 이야기는 언젠가 끝나야 합니다. 며칠 남지 않은 2006년처럼요. 올해가 만족스럽게 맺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2007년이 되면 우린 새로운 이야기를 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