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채널예스 운영자입니다.
채널예스에서 새 코너 '다시 보고 싶은 책'을 열었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 선을 보이는 책들이 매일 매일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그 가치와 진가가 시간이 흘러도 바래지 않는 책들이 있습니다.
'다시 보고 싶은 책'은 바로 그러한 책들을 이 주에 한 권씩 선정하여 여러분께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다시 보고 싶은 책'이 진정한 독서 마니아의 소중한 길동무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
혹시 예전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림책
『월리를 찾아라!』 시리즈를 기억하십니까? 널찍한 페이지를 펼치면 온갖 인물들이 동물원이나 박물관 같은 사람 와글거리는 공간에서 보기만 해도 정신없어 보이는 광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잠자리 안경에 촌스런 복장을 한 주인공 월리를 찾아내는 게 목적인 그림책이었습니다. 처음 그 책을 접하는 이들은 ‘월리가 어디 있나’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찾는데, 가만 들여다보면 사실 월리 외의 등장인물들이 참 재미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사자에게 쫓기는 인물도 있고, 눈사람과 권투를 하는 인물이 있기도 합니다. 한 페이지에 수백 명 정도가 와글거리는데, 그 인물 하나하나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월리를 찾던 눈을 멈추면, 그 수백 명의 이야기가 들리는 책이었지요.
이번 2006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은 다 읽고 나면 옛날의 ‘월리’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화자가 각 장마다 매번 달라진다는 점에서입니다. 첫 시작은 무려 죽은 사람입니다.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 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제1장 <나는 죽은 몸>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그림 속의 개, 나무 한 그루, 화가 주머니 속의 금화, 그리고 책의 제목인 빨간색까지도 각자 소설 전개에 끼어들어 한마디씩 하는 독특한 형태의 서술 구조를 보여줍니다. 사건은 분명 한 줄기의 시간을 타고 흘러가지만, 그 시간의 주변에 둘러 서 있는 여러 등장인물과 소품이 각자 자신의 시각에서 독자에게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소설은 마치 ‘월리’ 시리즈에서의 그것처럼 등장하는 모든 것들의 이야기를 함께 품고 갑니다.
십여 명의 화자가 다 함께 독자에게 풀어내는 이야기는 그리 유쾌한 내용은 아닙니다. 오스만 튀르크 말기의 이스탄불, 서서히 쇠락의 그림자를 더해가는 이슬람 왕국의 수도에 사는 이슬람 전통 세밀화가들에게는 큰 근심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사실적인 화풍이 이스탄불에서도 자꾸 유행이 되는 것이었지요. 실제 눈에 보이는 사물의 모습을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유럽의 원근법을 더한 화법은 이슬람인들의 눈 또한 사로잡습니다. 특히 그중의 초상화란! 종교와 정치를 모두 한 손에 쥐고 통제하던 술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유럽풍의 화법은 큰 매력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전통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이슬람 문화에서 아무리 술탄이라 해도 쉽게 그러한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을 옹호하기는 어려웠나 봅니다. 왕은 비밀리에 유럽풍의 그림을 풍부하게 담은 책을 제작하고자 몇몇 유럽화풍을 구사하는 화가들을 불러 모아 은밀한 작업을 진행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한 화가가 살해당합니다. 바로 제1장에서 “나는 죽은 몸이오”라고 독자에게 하소연하던 인물, ‘엘레강스’입니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사건을 풀어나갑니다. 엘레강스와 함께 일하던 세 명의 궁정 화가는 매우 중요한 용의선상에 올라 있는 상황이고, 이 살인 사건을 조사하려고 주인공 카라가 이스탄불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이스탄불에는 카라가 과거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러나 지금은 결혼해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름다운 여인 세큐레가 있습니다. 소설은 살인 사건의 조사와 옛 사랑과의 관계를 함께 끌고나가는 카라를 중심으로 이야기의 수레바퀴를 밀고 나갑니다. 카라가 살인 사건의 주변을 수소문하고 다니고, 옛 연인 세큐레의 주변에서 세큐레를 둘러싼 남자들의 복잡 미묘한 관계 속에 얽혀가는 과정을, 소설은 작가나 제3자의 눈이 아닌,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사물의 시선으로 보고 이야기합니다.
살인 사건이 궁정 화가들 사이에서 벌어졌고, 그가 은밀한 작업을 하다가 죽은 것이기 때문에 소설은 이슬람 세밀화라는 주제를 놓지 않고 이어갑니다. 이슬람 세밀화는 사실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부분인데, 아마 책 표지에 살짝 등장한 그림만 봐도 대강 어떤 그림을 세밀화라고 부르는지는 감을 잡으실 수 있습니다. 이슬람 전통의 회화 양식으로, 부분 부분의 무늬와 패턴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그려내고 화려한 색채와 금박이 두드러지는 양식이지요. 소설에서 이슬람 세밀화는 새로운 유행의 흐름인 베네치아풍 사실화와 대립하는데, 이 두 회화 양식의 대립은 미술사조의 흐름이 그러하듯 단순한 화풍의 차이만은 아니며, 소설 안에서도 그 차지하는 의미가 남다릅니다.
이슬람 세밀화는 그 시점이나 양식을 볼 때 르네상스 이후의 서양 화법과 큰 대조를 이루는데, 아주 쉽고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느냐 아니냐의 여부입니다. 종교적 관념의 영향이 예술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강대한 힘을 행사했던 유럽의 중세나 이슬람 제정일치 사회에서, 그림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기보다는 시각 너머의 관념을 그렸습니다. 중세 종교화들에서 가장 크게 그려지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다음 크기 순서로 세우면 천사와 성자, 목회자 등이 뒤를 잇습니다. 이슬람 세밀화 또한 마찬가지여서, 술탄이 화면의 뒤에 있든 앞에 있든, 술탄은 제일 커야만 한다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자칫 생각하면 억지스러울 수 있지만, 이는 원근법에 익숙한 시대의 생각일 뿐입니다. 인간의 시점에서 볼 때는 먼 것이 작아 보이고 가까운 것이 커 보이지만,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이 이슬람 세밀화에 깔린 기본 바탕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으로서는 멀고 가까움의 차이란 없습니다. (이는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같습니다.) 오히려 한낱 인간의 눈에 비치는 세상을 그대로 그린 그림이 신의 전지적 관점에서 세상을 표현하던 사람들에겐 ‘거짓’, ‘좁은 소견’인 것이지요.
언제나 코란의 가르침과 전지자의 시점에서 진리를 그려 오던 이슬람 세밀화가들에게, 새로운 스타일이라 불리는 베네치아식 화풍은 배척의 대상일 뿐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화가 개개인의 스타일이라니!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고 그 가치를 따르는 것이 최우선인 시대에 스타일이란 ‘진리에서 어긋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의 색을 그때마다 다르게 표현했던 유럽의 인상파 화가들 작품을 보면 아마 이슬람 세밀화가들은 기절초풍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에겐 태양은 불변하는 모습 단 하나였을 테니까요.
이 차이는 단순히 미술에서의 시점 차이만은 아닙니다. 제정일치의 유럽 중세 / 이슬람 왕정이 유럽의 확장과 르네상스 등으로 서서히 변하면서, 신본주의 사회는 인본주의 사회로 서서히 바뀝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오스만 튀르크 말기의 이스탄불은, 동서양이 가장 접경에서 맞닿는 곳이기에 그러한 유럽의 변화와 확장이 가장 큰 변화로 다가올 수 있는 시공간이었습니다. 새로운 변화가 사회 전반을 휩쓸고, 그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으며, 전통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하는 어떤 인물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쯤 되면 어디서 많이 본 구성입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기반을 둔 스콜라 신학이 지배하던 중세 시대는 엄숙함을 강요하던 때였는데, 그런 시대에 대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는 것은 세상에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없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엄숙주의 수도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 중 희극을 다룬
『시학』 1부를 도서관 깊은 곳에 감춰두고 비극만 다룬
『시학』 2부만을 공개했다는 가설로 시작하는
『장미의 이름』은 금서인
『시학』 1부에 접근하는 이들이 연쇄적으로 죽음을 맞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단순 살인극의 범주를 넘어, 소설은 미학의 희극론과 비극론, 신학에서의 웃음에 대한 견해 차이, 대륙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의 충돌 등을 다채롭게 풀어낸 바 있는데, 이슬람 세밀화와 유럽 르네상스 화풍의 충돌을 다룬 터키 소설
『내 이름은 빨강』 또한 그 변화의 시대에 일어났던 수많은 가치의 충돌을 다양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장미의 이름』이 주로 이성과 합리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내 이름은 빨강』은 보다 예술과 직관 쪽을 탐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 다 제목은 빨간색과 연관이 있네요.)
| 오르한 파묵 (본명 : Orhan Pam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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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소설은 하나의 특정한 화자 혹은 시점에 얽매이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하나하나의 시점을 모두 이용해 이야기를 그려내며, 그 다루는 내용은 이슬람 세밀화의 전통이 유럽의 신경향을 만나 겪는 변화의 시대에 벌어진 살인극입니다. 그리고 유독 세밀화에 관련된 다양한 묘사가 두드러집니다. 이쯤 되면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이슬람 세밀화의 예술 양식을 복원하려는 것입니다. 이슬람 세밀화가 추구했던 전지적 시점을 글에 투영하여 마치 처음에 이야기했던 ‘월리’ 시리즈를 보는 듯한 느낌을 살려내고, 그를 통해 문화의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던 한 시대를 동서양 어느 특정한 입장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알라의 시각이라 해도 좋을 법한 입장에서 그려냅니다. 아주 쉽게 정의하자면,
『내 이름은 빨강』은 글로 시도하는 작가의 이슬람 세밀화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고많은 장 중에서도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장이 전체 소설의 제목이 된 이유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 장은 전체 세밀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한 가지 색을 가리킵니다. 살인사건의 피, 동서양 문명의 충돌, 카라와 세큐레의 열정적 사랑…. 소설 전반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의 이름이 카라(검정색)임을 생각할 때, 소설은 검은색과 빨간색이 중심 색채가 되어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한 폭의 이슬람 세밀화고, <내 이름은 빨강>이라고 명명된 장은 전체 소설의 색감 중심을 조율해 나가는 시각적 무게중심이 됩니다. 쭉 시간의 흐름을 따라 이어지는 소설 중간에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한 장의 제목이 <내 이름은 빨강>. 이슬람 세밀화를 보다가 한편에 칠해져 있는 도드라진 빨간색을 보고 한참을 바라보게 되는 감상과 유사한 흐름인 것입니다.
이스탄불의 이국적이고도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이슬람이라는 한국인에겐 분명 생소한 문화를 다루고, 더군다나 그 주제가 이슬람 세밀화라는 만나보기 어려운 예술 장르라는 점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분명 접근하기 어려운 장벽입니다. 그럼에도
『내 이름은 빨강』은 많은 이들의 추천과 입소문 속에 널리 읽히고 있고, 최근에는 드물게 노벨 문학상 수상 바람을 업고 베스트셀러에 등극했습니다. 문학상 수상이라는 거창한 어깨 힘을 빼고도 소설적 재미가 엄연히 남아 중심을 잡을 수 있다는 점이 요즘 일고 있는
『내 이름은 빨강』 붐의 원인일 것입니다. 휴일 하루쯤을 잡아 천천히 하나하나의 장들이 이야기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사망자, 탐정, 길가의 그림, 주요 용의자와 탐정의 연인, 심지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며 “내가 궁금하지?”라고 말을 거는 살인자의 이야기까지…. 다 읽고 나서 눈을 감으면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이스탄불 전체의 세밀화스러운 풍경이 상상이 될 것입니다. 안 그럴 것 같다고요? “알라 아을람!”
* 알라 아을람: ‘오직 알라만이 알 일이다’라는 의미로 이슬람권에서 관용구로 쓰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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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아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되어버린 책 읽기가 어느 날부터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고, 그 뒤로는 어디 가서 취미가 책 읽기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책보다 좋은 것은 먼지 날리는 시골 비포장도로에서 하루 두 번 오는 버스 기다리며 담배 한 대 피우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가 좀 더 들고 감성과 지성이 경륜으로 불릴 쯤이 되면 포크 가수로 전업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