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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가도 사람이다

존 크라카우어의 산악 논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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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아서 200여 년 전, 알프스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산을 오르내렸지만 산꼭대기를 등정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등산의 역사는 생각보다 짧아서 200여 년 전, 알프스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은 산을 오르내렸지만 산꼭대기를 등정한다는 개념은 없었다. 1786년 8월 8일 미쉘 가브리엘 파카드 박사가 몽블랑 정상에 오름으로써 등산의 시대가 열렸다. 산이 위협적이고 험악하며 여행과 교역의 큰 장애물이자, 산 안에서 혹은 가까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형편없게 만들어버리는 존재에서, 단지 거기 있기에 가봐야 하는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파카드 박사의 몽블랑 첫 등정은 고전적 등반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당시 파카드 박사에겐 동반자가 있었다. 그는 샤모니 지역의 토박이 순록 사냥꾼 자끄 발마와 함께 몽블랑을 올랐다. 등반을 마치고 나서 발마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내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었고 얼굴은 새까매졌으며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웃음을 터트리거나 하품을 할 때마다 부르튼 입술과 뺨에서 붉은 피가 솟아났다. 더군다나 나는 반쯤은 시력을 잃은 상태였다.”

발마와 파카드는 훗날 프랑스의 샤모니를 먹여 살릴 중요한 소득원을 발굴해낸 공헌에 대해 60달러에 해당하는 포상을 받는다. 또,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광장과 거리 이름으로 삼았다. 이런 점은 에베레스트 초등(初登)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1953년 5월 29일 이른 새벽, 뉴질랜드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그의 셰르파 동료 텐징 노르가이는 지구에서 제일 높은 산에 오른다. 다음은 힐러리가 작성한 기록의 일부다.

“정신이 꽤나 혼미해진 상태로 과연 우리에게 정상에 도달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체력이 남아 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었다. 나는 다른 산들을 둘러보았고 눈앞에 보이던 능선들이 어느덧 발아래로 자취를 감춘 것을 보았다. (…) 피켈을 몇 번 휘둘러 설사면에다 꽂고 조심스럽게 몇 걸음을 내디딘 끝에, 텐징과 나는 마침내 정상에 섰다.”

에베레스트에 오르려는 이들의 등반 경비는 네팔 당국의 주요 수입원이다. 미국의 논픽션 작가 존 크라카우어(Jon Krakauer, 1954- )의 『그들은 왜 오늘도 산과 싸우는가』(하호성 옮김, 자음과모음, 2006)는 “등반을 둘러싸고 있는 지나친 신비감을 없애고 그 무게를 조금 가볍게 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원제가 ‘Eiger Dreams’(아이거, 꿈을 꾸다)인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지은이의 집필 의도를 약간 거스른다. 크라카우어는, 실제로 대부분의 등반가들은 대중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미치광이들이 아니라며, 그들은 단지 인류가 가진 치명적인 긴장감에 물들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책머리에’에 나와 있는 그의 삶의 여정만 해도 그렇다.

크라카우어의 등반에 대한 집착의 뿌리는 1962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여덟 번째 생일날 그의 아버지는 작은 크기의 등산 장비를 그에게 선물하고 산에 데리고 갔다. 18살 무렵 등반은 그의 인생의 전부였다. 삶의 다른 요소들은 들러리에 불과했고 공공연히 무시되었다. 1974년에 이르러 등반을 향한 그의 몰입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해 크라카우어는 동료 여섯 명과 알래스카 첫 원정을 떠난다. 1974년 6월의 어느 날 새벽 2시 30분, 열두 시간 동안 등반한 끝에 재너두라는 산의 정상에 오른다. 그의 두 손은 추위로 얼어붙었지만, “나는 그 순간 내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었다.” 이듬해 12월 대학을 간신히 졸업한 그는, 그 이후 8년간 떠돌이 잡역부 생활과 등반을 반복하며 점점 지쳐간다.

그는 등반을 그만두기로 결심하고선 그 사실을 사귀던 여자 친구에게 알린다. 그녀의 결혼 승낙을 받았지만 그것은 등반이 그에게 끼치고 있던 위력을 크게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등반을 포기하는 것은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는 등반 포기 1년이 안 되어 다시 산을 찾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절벽 가장자리 바로 앞까지 억지로 나아가거나 매 피치마다 여전히 목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신께 감사드리거나 매번 등반에 나설 때마다 이전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지 않게 되었다. 최근 들어 나는 일주일 내내 위스키병을 입에 달고 살던 알코올 중독자가 토요일 저녁 시원한 맥주 한 잔만을 들이켜는 평범한 사람으로 바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평범한 산악인으로 ‘거듭난’ 크라카우어는 등반가의 열정을 글쓰기에 쏟아 붓는다. 전업 작가로 활동하면서 관심의 영역이 넓어졌으나, 등반에 관한 이야기는 늘 그의 가슴에 가장 소중하고 친밀한 것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에베레스트 ‘정복’이니, ‘5대륙 최고봉 등정’이니 하는 표현이 과히 달갑지 않다.

그렇다고 조직적인 관리 기구와 공식적인 규칙이 거의 없기 때문에 등산을 진지한 운동이 아닌 여가나 취미생활로 취급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빙벽 등반이라는 스포츠는 지켜보는 심판도 없고 공식적인 규칙도 없고 잘 짜인 대회도 치러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빙벽 등반은 치열하게 경쟁적인 스포츠이기도 하다.”

물론 경쟁의 양상이 무자비할 정도로 치열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등반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세 대륙에 걸쳐 최고의 산악인으로 존경받는 존 길은 오로지 “수직 고도가 9미터보다 낮은 바위들만을 등반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얻었다.” 존 길은 규모가 큰 바위는 전혀 올라가지 않았지만, 헤르만 불, 에드먼드 힐러리, 로열 로빈스, 라인홀트 메스너 같은 이 시대의 위대한 등반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산이란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다. 그곳의 하늘은 언제나 습기 찬 구름과 거센 바람이 장악하고 있다.” 험준할수록 산은 더 위험하며 등반 여건도 몹시 나쁘다. 그런데 고산(高山) 등정을 찍은 산악 다큐멘터리는 대체로 끈기 있고 잘 참으며 역경에 굴복하지 않는 등반가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한다. 하지만 크라카우어는 산악인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예컨대 거대한 빙하가 꿈틀거리는 히말라야의 광대한 위용을 느끼고 싶다면, 혹독한 날씨에 발이 묶여 몇 날 며칠이고 텐트 안에 갇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한다. 또, “무시무시한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 온 전문가들은 동료를 선택할 때 지나치게 활동적인 성격을 지닌 사람은 피하라고 강하게 권고한다.”

가뜩이나 날이 선 텐트 분위기를 쉽게 뒤엎어버릴 수 있어서다. 등반용 텐트의 크기는 고작해야 공중전화부스나 2인용 침대 크기 정도밖에 되지 않기에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 몸을 부딪치게 된다. 이러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골이 생기게 마련이다.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짜증내고 화내게 된다. 뚜둑거리며 손가락 관절을 꺾는 소리나 코 후비기, 코골기 같은 하찮은 일로도 폭력이 발생한다.” 심지어 축축한 발이 자기 자리로 넘어왔다며 주먹을 날리는 사람도 있다.

“단 두 명으로 이뤄진 원정대는 만일 날씨가 악화되어 오랫동안 텐트생활을 해야 할 경우, 십중팔구 서로의 가슴에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기고 파국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어떻게? 며칠째 폭풍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비좁은 텐트 안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이런 망할 놈의 원정에 오자고 한 건 바로 너라고!”

그럼, 이렇듯 험악한 상황을 무엇으로 이겨낼까? “책은 무게가 많이 나가기는 하지만 마약 못지않게 지루함을 달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 된다.” 텐트생활에 가장 적합한 읽을거리는 원정이나 탐험에 관한 이야기다. “만약 대원들과의 불화로 인해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없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책을 가져오지 않았다면 이제 당신에게 남은 선택의 여지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책 뒤표지에는 “전 세계 아마존 독자들의 찬사를 받은 존 크라카우어의 새로운 작품!”이라는 문구가 있다. 그런데 저작권 표시란을 보면, 이 책의 원서는 1990년에 나왔다. 아마도 『희박한 공기 속으로』(김훈 옮김, 황금가지, 1997) 이후, 크라카우어 책의 새로운 번역서라는 의미인 듯한데,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원서도 1997년에 나온 것 같다.

『희박한 공기 속으로』는 등반 역사상 최악의 참사 가운데 하나인 1996년 여름 시즌의 에베레스트 등반 사고를 냉정한 시선으로 다뤘다. 하여 당시 등반을 함께 한 이들과 희생자 가족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존 크라카우어가 아래와 같은 덕목을 지닌 등반가라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들에게는 산 정상에 오르는 일 자체보다 어떤 식으로 그곳에 올랐는가가 훨씬 더 중요했으므로 가장 험난한 루트를 최소한의 장비를 갖고서 가장 대담한 방식으로 도전한 사람들만이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밧줄이나 그 밖의 장비들을 갖추지 않고 맨몸으로 혼자 정상에 오른 몽상가들, 즉 이른바 솔로이스트를 제일 높이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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