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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가을 천변풍경

새로이 곧게 뻗은 천변길을 따라 무연히 걸었습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떠오르기도 했고, 속으로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읇조리기도 하면서, 뒤에서 온 몸으로 시대의 어둠을 밝혀주었던 전태일 열사가 내려다보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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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책 나누는 사람들’과 함께 성프란시스대학 수강생 선생님들(참고, 수강생 평균연령이 50세 가까이 되는 관계로 호칭을 ‘선생님’으로 통일하기로 했습니다)에게 『전태일 평전』을 나눠드렸습니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이어 두 번째 지원도서였습니다. 이번 주에도 지난주에 이어 감상문을 받아 제 나름의 감평을 해볼 작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누군가 “가을 다 가는데 단풍구경 한번 안 가느냐.”는 의견을 내놓는 바람에 급기야 이번 주 강의를 북한산 등산으로 대체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바로 선생님들과 산행을 하기로 한 날입니다.

속절없는 단풍은 이미 남쪽으로 멀찌감치 달아났을 줄 압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눈앞의 단풍만 단풍은 아닐 테지요.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었던 그 자리, 그 쓸쓸한 뒤안길에서 떨어져 나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지나간 단풍의 형형색색을 마음으로 새겨보는 것, 그 역시 가을산행의 또 다른 멋과 맛이 아닐는지요.

선생님들의 감상문은 다음주에나 받게 될 듯합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책을 나눠드린 뒤 제 마음은 공연히 부산해졌습니다. 왠지 다음 강의 전에 해두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책을 다시금 꼼꼼히 읽어보는 건 기본일 겁니다. 더불어 열사에 대한, 그리고 노동운동사에 대한 자료를 취합·정리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숙제처럼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한번쯤 열사가 누워있는 모란공원에 다녀와야 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일정에 쫓겨 모란공원 추모는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 평화시장 옆 청계천변에 열사의 동상이 세워졌다는 데 착안, 그곳을 방문해 보기로 했습니다. 복원공사를 끝내고 새물맞이 행사를 거창하게 치른다는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도 둘러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그곳을 결국 열사의 동상 덕분에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늦은 오후 시간, 거리는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버들다리를 앞뒤좌우로 오가며 연신 사진을 찍고 있는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시민 한분이 무슨 생각에선지 대뜸 동상 옆에 서보라며 사진기를 채어갔습니다. 그 바람에 얼떨결에 열사 옆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버들다리 바닥의 동판들도 꼼꼼히 들여다봤습니다. 동상 제작을 도왔던 시민들, 각급 노동조합, 그리고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각종 단체에서 동판을 새겨 노들다리의 바닥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바닥의 누런 동판과 은회색으로 서 있는 동상이 얼핏 어울리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동상과 같은 방향에 서서 열사의 시선을 따라 천변의 물 흐름을 관조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정녕 어울리지 않는 것은 동판과 동상의 색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평화시장의 낡은 상가건물 뒤에 우뚝 솟아오른 일군의 마천루들, 그것들이야말로 불균형과 부조화, 불평등의 극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마천루의 주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지금껏 그 더러운 돈다발을 놓고 형제간에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지.’

다시 고개를 숙여 시선을 천변에 두고 담배에 불을 붙여 상념을 좇아볼까 했습니다. 그러나 가뭇없이 내달리기 시작한 상념들은 저들끼리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하염없이 내달리기 만합니다.

한밤에 일어나
얼음을 끈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보라, 얼음 밑에서 어떻게
물고기가 숨쉬고 있는가
나는 물고기가 눈을 감을 줄 모르는 것이 무섭다
증오에 대해서
나도 알 만큼은 안다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나의 친구는 왜 눈을 감지 못하는가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봄이 오기 전에 나는
얼음을 꺼야 한다
누구는 소용없는 일이라지만
나는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한다


-정희성 시집『저문 강에 삽을 씻고』중 「이 곳에 살기 위하여」 전문


전태일 열사는 “이곳에 살기 위해 온갖 굴욕과 어둠과 압제 속에서 싸우다 죽은” 우리 모두의 친구였습니다. 더불어 그 역시 “자유를 위해 증오할 것을 증오”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열사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건 증오가 아닙니다. 증오할 것을 증오하되 그것은 사랑을 이루기 위한, 세상을 사랑으로 물들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하여 열사는 사랑의 화신입니다. 결코 증오의 표상이 아닙니다.

열사가 사랑했던, 자신의 몸을 불사르면서도 끝끝내 그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쳤던 그 삶의 현장, 문득 그곳이 보고 싶었습니다.

평화시장의 상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입구 반대편에서 화들짝 밀려드는 것이 있습니다. 답답함입니다. 좁은 공간, 좁은 통로를 덕지덕지 붙어 늘어서 있는 상가의 매대들, 하물며 상가가 그리 답답할 정도이니 그 상가의 위층에 자리 잡은 공장의 작업환경은 어느 정도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초로의 상인을 붙들고 물었습니다. “아직도 이곳의 위층에 봉제공장들이 들어서 있느냐”고. 상인은 예의 딴전을 피웁니다. “어휴, 요즘은 ‘두타’니 뭐니 하는 빌딩들만 수지가 맞을까 여그는 통 장사가 안 되여. 예전하고 다르게 미싱사들도 다들 야리끼리(일 한만큼 버는 일종의 도급제)로 일하기 때문에 여기서 붙어먹으려고 안 허고. 장사하는 우덜만 죽을 맛이제.”

상가 밖으로 나서자 어느덧 어둠이 낮게 내려앉아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비로소 은회색의 동상이 빛을 발합니다. 마치 저 6, 70년대 칙칙한 봉제공장의 불빛 아래서 야근과 철야에 시달리며 청춘을 죽여 왔던 우리네 누님들과 형님들의 삶을 온 몸으로 보듬고자 했던 열사의 밝고 따뜻한 마음을 상징하듯.

새로이 곧게 뻗은 천변길을 따라 무연히 걸었습니다. 박태원의 『천변풍경』이 떠오르기도 했고, 속으로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읇조리기도 하면서, 뒤에서 온 몸으로 시대의 어둠을 밝혀주었던 전태일 열사가 내려다보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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