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여름 친구 따라 갔던 일본의 ‘써머소닉 페스티벌(Summersonic Festival)’이후 필자에게는 매년 여름이면 찾아오는 병이 생겼으니, 바로 ‘페스티벌 증후군'이다. 참으로 희한한 것은 '집 떠나면 고생이요, 문명에서 멀어지면 낭패'라고 생각하는 필자가 그 고생과 낭패를 겪고도 찬 공기가 훈훈해지기 시작하면, 어느새 페스티벌 관련 웹 사이트를 뒤지고 있으니 페스티벌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 록 페스티벌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와는 참으로 인연이 없었던지 1999년 인천 송도에서 처음 열렸던 트라이포트(Triport) 록 페스티벌은 폭우 속에 수많은 록 마니아들의 눈물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올해, 공항(Airport), 항만(Seaport), 정보포트(Teleport)에다 비즈니스(Business-port)와 레저(Leisure-port)까지 2개의 의미를 추가한 펜타포트(Pentaport) 록 페스티벌이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왔다. - 사실 이 이름의 유래는 인천시의 도시 전략 컨셉인 위의 의미가 맞긴 하지만, 실제 페스티벌적인 의미로 보자면 다섯 가지는 음악, 열정, 환경친화, D.I.Y, 우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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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폭우로 진흙바닥이 되어버린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 |
어쨌든 간에 우리나라에 다시 제대로 된 록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록은 정말 사람들의 푸념대로 저주받은 것인가? 아니면 록 페스티벌과 비는 해리포터와 볼드모트같은 관계인걸까? 공연을 목전에 두고 ‘에위니아’는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말았다. 거기에 이놈의 장마는 왜 이리도 오래 가는지, 대망의 페스티벌 첫째 날이 밝아왔음에도 하늘은 맑아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27일 금요일 오전, 서울에서 1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페스티벌 사이트에서는 바다 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아직은 한적한 입구에서 3일 간 페스티벌 사이트에 입장할 수 있는 리스트밴드부터 술과 담배를 살 수 있는 성인 인증 리스트밴드를 손목에 차고 스케줄 목걸이까지 걸고 나니 이제 진짜 페스티벌이 시작된다는 들뜬 기분에 서울에 두고 온 일상의 모든 버거운 것들이 사뿐히 날아가는 듯 했다.
미리 장화와 우비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일행은 진흙길로 변해버린 페스티벌 사이트를 걸어 메인 스테이지인 빅탑 스테이지(Big Top Stage)로 향했다. 저 멀리 스테이지가 보이는 듯싶더니만 어느새 엄청난 볼륨의 사운드가 귀를 사로잡았다. 무대 위에서는‘예예예스(Yeah yeah yeahs)’의 보컬인 캐런 오(Karen O.)의 신들린 듯한 퍼포먼스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국인의 피가 반 정도 흐른다는 그녀의 화려한 무대가 펜타포트의 시작을 한껏 달아오르게 했다. 외국공연의 DVD에서나 보던 대형 깃발까지 휘날리는 객석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공연을 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몸이 신나게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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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사이트에 입장할 수 있는 리스트밴드부터 아티스트, 스태프, 프레스를 위한 리스트밴드들은 페스티벌에 빼놓을 수 없는 소품이다. | |
이제부터는 한국의 넥스트(N.EX.T), 피아(Pia), 슈가도넛(Sugar Donuts)부터 영국의 스노패트롤(Snow Patrol), 미국의 제이슨 므라즈(Jason Mraz), 더 스트록스(The Strokes)의 무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하게도 점점 더 비를 뿌려댔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지난 99년의 악몽 때문인지 만반의 준비를 한 스테이지에서는 문제없이 공연이 계속됐다. 빗속의 관객들? 어떻게 기다려온 공연인데 이깟 비에 굴할쏘냐. 역시 한국 사람들 최고! 월드컵 때 보여준 우리의 열정이 사 년에 한 번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피 속에 뜨겁게 흐르고 있음을 증명했다.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에 무대에 오른 뮤지션들도 "대~한민국!"을 외치며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앨범 엑기스를 총망라하여 2시간 넘게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열정의 무대를 보여준 제이슨 므라즈는 관객들이 그의 노래를 모두 따라 부르는 감동 속에서 자신의 팔목에 I ♡ U 메시지를 새기며 수많은 여성 팬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또 더 스트록스의 보컬 줄리안 카사블랑카스(Julian Casablancas)가 학창시절 한국인 룸메이트에게 배웠다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우리만의 추억'을 너무나도 정확한 발음으로 부를 때는 관객들의 함성이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을 찔렀다.
이튿날, 꼬득꼬득해지기 시작한 진흙길을 지나 빅톱 스테이지에 도착하니 미래의 꿈이 로커인 현 댄스 가수, 싸이(Psy)가 무대에 올라왔다. 자신만의 공연 브랜드로 이미 널리 알려진 공연둥이인 그의 공연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의 무대는 어느 로커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토요일 오후 2만 명이 넘는 관객이 꽉 찬 스테이지에서 우리는 싸이와 함께 "위 아 더 원!"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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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외모와 어울리는 환상적인 공연을 보여준 예예예스(Yeah yeah yeahs)의 캐런 오(Karen O.) | |
모든 관객이 하나가 되어 외쳤던 열광의 무대가 지나가고 이어지는 다음 공연 세팅 시간. 한 무대에 수많은 뮤지션들이 서다보니 각 팀에 맞춰 신속하게 세팅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맨 앞에서 뮤지션의 얼굴을 꼭 봐야 한다는 열혈 팬이 아닌 이상 관객들은 그 시간 동안에 근처의 부스에서 맥주를 마시며 다음 공연을 위해 숨을 고르거나 푸드 존에서 허기를 채우면 된다. 페스티벌 사이트 내에는 자장면부터 피자까지 다양한 음식을 파는 부스부터 피곤에 지친 관객들이 요가와 마사지를 즐길 수 있는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으니 3일 동안 이 안에서 음악만을 즐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는 다 갖춰진 셈이다.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 아래로 무대 뒤편에 커다란 원숭이 그림이 올라간다. 최근 한국 광고계를 주름잡았던 힙합그룹 블랙 아이드 피스(The Black Eyed Peas)의 무대가 준비되고 있다. 홍일점 퍼기(Stacy Ferguson)의 상상을 초월한 매력과 관객을 사로잡는 힘이 넘치는 멜로디, 모든 멤버의 넘치는 열정이 히트곡 행진과 합쳐져 스테이지를 가득 채운 관객들을 모두 춤추게 만들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한국을 떠나기 싫다고 외치고 관객은 떠나지 말라고 소리치며 최고의 궁합으로 다같이 열광했다.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을 끝내고 일본의 후지록 페스티벌에서 다시 만난 블랙 아이드 피스와 프란츠 퍼디난트(Franz Ferdinand)의 멤버들이 열정적인 한국 관객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을 정도라니 말 다했다.
이렇게 한껏 고무된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던 다음 타자는 이번 페스티벌의 최고 헤드라이너로 손꼽히는 플라시보(Placebo)! 이번에 공연한 대부분의 가수들이 한번쯤은 다 했던 "대~한민국!"이나 "I love you!"라는 멘트 하나 없이 이어진 그들의 공연은 이번 페스티벌 중에서 가히 최고라고 손꼽을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을 보여줬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필자는 보았다. 잘 웃지 않기로 유명한 냉미남 브라이언 몰코(Brian Molko)의 꽃미소를!! 그렇게 멤버들은 관객들의 엄청난 반응에 제대로 필 받으면서 예정되지 않은 앵콜까지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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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빗 속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공연을 즐기는 뮤지션들도 인정한 세계 최고의 관객들! | |
이렇게 평생 보기 힘든 공연들이 끝나고 밤은 점점 깊어가지만, 아직 페스티벌 사이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끝나지 않은 밤을 즐기고 있다. 밤새도록 이어질 디제이 파티를 즐기기 위해 다른 스테이지로 발을 옮기는 많은 사람들, 환하게 불을 밝힌 푸드 존의 파라솔을 가득 채우고 앉아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오늘의 공연과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영국과 일본의 그 대단한 록 페스티벌이 부럽지 않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은 다른 복잡한 일상은 잊고 이 시간, 이 공간을 함께 나누고 있는 사람들과 깊어 가는 페스티벌의 마지막 밤을 즐기기로 한다.
2006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2006년 7월 28일 ~ 30일 인천광역시 연수구 대우자동차판매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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