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빈트 브흐홀츠, 그가 우리 출판계에 이름을 드높이게 된 책은 단연
『책그림책(BuchBilderBuch)』입니다. 이 책은 획기적인 기획을 통해 탄생한 책을 모티브로 한 그의 일러스트 모음집으로 하나같이 상식적인 감각의 선을 넘어 독자들에게 그림과 글 이상의 화두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림은 질문을 하고 시간이 지나면 답도 준다.
바다의 광활함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성, 빛이 나를 사로잡는다.
천천히 느끼고 재생하려는 ‘정적’이라는 것에서도,
‘유일한 정적’은 자신의 동경과 관련이 있으며,
나는 단순히 내가 필요로 하고 있는 특정한 상태를 그림 안에 만들어내는 것이다.
- 크빈트 브흐홀츠와의 인터뷰 중에서
독일 ‘한저(Hansser)출판사’의 편집인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미하엘 크뤼거는 밀란 쿤데라, 미셸 투르니에, 오르한 파묵, 수잔 손탁, 존 버거, 페터 회크, 아모스 오즈를 포함한 마흔여섯 명의 세계적인 작가들에게 크빈트 브흐홀츠의 그림 한 점씩을 보내고 글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책이 무섭도록 고요하고 무섭도록 정교한 고독을 품고 있는
『책그림책(BuchBilderBuch)』입니다.
제가 그의 그림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전에 해외도서전에 참관했을 때 얻어온 ‘Farrar, Straus and Giroux 출판사’의 『The Collector of Moments』를 통해서였지요. 긴 판형의 그림책을 넘기는 순간, 저는 오한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뉴욕 출신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의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실크 스크린 등의 정교한 인쇄물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때처럼 무수한 점으로 표현된 섬세한 면이 이루어내는 몽환적 세계가 어딘지 모를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의 그림책을 접하고 마치 저만의 보물인 양 책장에 꽂아둔 채 비밀스럽게 간직해두었는데, 아주 우연히 그의 다른 책
『호수와 바다 이야기(Am Wasser)』가 번역본으로 나온 것을 발견하고 언젠가 그의 그림책들도 소개해야겠다고 살짝 다짐했었습니다. ‘그림책’이라고 하면, 흔히들 글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독자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본 칼럼에서 크빈트 브흐홀츠를 소개하기까지 망설임의 시간이 길었던 것도 고백해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1998년에 『그림 속으로 떠난 여행』이 세계적인 어린이 도서전인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픽션 부문 최고상인 ‘라가치 상’을 수상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전 그런 망설임을 깰 수 있었습니다.
크빈트 부흐홀츠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1957년생인 독일인으로,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하고 ’82년부터 ’86년까지 아카데미 조형대학에서 그림과 그래픽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88년부터 책의 삽화가로 자리를 굳혀갔습니다. 시적인 상상력으로 현실을 더욱 리얼하게 표현하는 그의 그림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영향을 받은 듯 매우 사실적인 사물들이 등장하면서도 그 사물들의 교묘한 배치를 통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또한 일반 그림책들보다 훨씬 넉넉한 화면에 가득 들어찬 그림들을 감상하노라면 마치 나만을 위한 전시회에 초대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그럼 그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바로 서정성입니다. 그의 시각은 사물에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습니다. 전체를 바라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 속에는 집도 있고, 나무도 있고, 창문이 있고, 이 모두를 담고 있는 풍경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서정적이고 신비로운 자연을 대상으로 여기는 부흐홀츠는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과 위안을 고요하면서도 낯선 터치로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그리는 대상은 자연적인 대상으로서의 달빛과 하늘이지만 그의 붓질을 통해 다시 태어난 달빛과 하늘은 우리가 늘 바라보던 그것이 아니며 약간 생뚱맞기까지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낯선 느낌의 끝에는 반드시 쓸쓸하고도 외로운 여운이 묻어납니다. 동시에 그런 낯선 느낌을 넘어서 우리의 눈길을 비끄러매는 미묘한 힘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시선을 의식의 본질로 향하게 하고 시적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비밀스러운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섬세함입니다. ‘그림쟁이’라면 세밀하고 섬세한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습니다. 그의 표현도 극도로 세밀하고 현실적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감의 표현으로 초현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마치 달리의 그림을 보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달리와 같은 기괴함은 없고, 단지 인간의 일상적인 물음의 끝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어쩌면 지루할 것도 같은, 어쩌면 잊어버린 듯한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들추어내지 않으면서 은근히 자극하고 있지요.
세 번째로, 그는 텍스트를 갖고 있는 화가입니다. 혹자는 “그림쟁이는 그림으로 이야기하고 음악가는 음악으로만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사진가는 사진으로만 말하고, 디자이너는 레이아웃으로 말해야 한다는 바보스러운 말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을 보면 그가 단지 이미지로만 말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인간에 대한 훌륭한 텍스트를 지닌 철학가로서, 훌륭한 텍스트는 음악 이상의, 글 이상의, 이미지 이상의 것을 선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텍스트는 전 세계인이 대체로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며 현대의 문명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부흐홀츠가 말하는 소외된 자의 고독과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무의미해져 가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술 같은 그림 속으로의 여행
그림책
『그림 속으로 떠난 여행』의 주인공 ‘나’에게, 막스 아저씨는 우리가 눈으로는 쉽게 보기 어려운 ‘순간’을 그림으로 그리는 사람입니다. 그 그림 속의 순간은 현실에서 일어나지만, 놓치기 쉬운 어떤 것이거나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저씨는 신기하고 특별한 자신의 그림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는 법이 없습니다.
막스 아저씨는 놓치기 쉬운 순간을 그림으로 남기며 스스로를 ‘순간 수집가’라고 부릅니다. 아저씨가 남기는 ‘순간의 그림들’은 잊히기 쉬운 어떤 순간을 잊히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입니다. 아저씨가 포착한 순간, 그리고 내가 만들어 가는 이야기는 바로 어제 죽어 간 사람이 그토록 간절하게 그리던 오늘,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현재입니다.
사실 이 책의 원제목은 『Sammler der Augenblicke』로서, ‘눈 깜짝하는 사이를 수집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1999년 진명출판사에서 이 책을 출판했을 당시의 제목은
『순간을 채색하는 내 영혼의 팔레트』였는데, 개인적으로 저는 그 제목이
『그림 속으로 떠난 여행』보다는 크빈트 브흐홀츠의 의도인 ‘Carpe Diem(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 - Seize the time)’을 더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음은 제가 영문판 『The Collector of Moments』를 우리말로 거칠게 옮겨본 것입니다. 줄거리를 소개할까 하다가 직접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싶어 용기 내어 올려봅니다.
「새벽녘,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 막스 씨는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구겨진 검정 리넨 재킷을 입고 그는 스튜디오의 창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거리의 반대편의 집 사이로 바다를 볼 수 있습니다. 저 멀리, 항구의 벽 너머에서 등대의 불이 깜빡이기 시작하면, 육지로부터 하루의 마지막 출항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객선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연기로 가는 띠를 그리면서 갈매기들의 비행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막스 씨는 아이의 소리처럼 맑은 소리로 노래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가사가 없었습니다. 육지로부터 하루의 마지막 출항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객선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조용히 편안한 붉은 안락의자에 파묻혀 앉아 듣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막스 씨는 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매일 저녁 그가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내게 연주를 부탁했습니다. 가끔은 단지 내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을 듣기만도 했습니다. 우리가 친해지자 그는, "교수, 자네는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는군"이라고 내게 말했습니다.
막스 씨는 부둣가에 있는 우리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1층에서 철물점을 경영하였고, 우리는 그 위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따듯한 3월의 봄날, 막스 씨는 바로 우리 위층으로 이사 왔습니다. 갈매기들이 남쪽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가득 메울 때, 바람은 흰 구름 사이로 살랑거리고, 소금기 머금은 비릿한 향이 바다 쪽에서 불어올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름을 지내고, 겨울을 지내고, 다음 여름까지 머물렀습니다. 가을로 접어들려고 할 때, 그는 멀리 떠났습니다.
닳아서 삐걱거리는 계단과 세공된 철제 계단 손잡이를 따라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저는 회색의 입구에 서서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았습니다. 가끔은 막스 씨가 그림을 그리며 그랬던 것처럼, 오후 내내 그의 스튜디오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거나, 막스 씨의 커다란 스케치북에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보트와, 용감한 인디언 추장, 중세의 기사, 불을 내뿜는 용을 그려보았습니다. 혹은 로빈슨 크루소, 보물섬을 읽었습니다.
막스 씨의 스튜디오 선반은 그림책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왕과 여왕이 있는 세상 속에 빠져들기도 하고, 야생동물을 쫓아 용맹하게 탐험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무척 낯설고 희한한 나라로 여행을 가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지치면 길거리를 떠도는 낮은 소리가 막스 씨의 창가로 올라오는 것을 소리죽여 듣기도 했습니다. 벽시계가 재깍거릴 때면, 나는 여느 때처럼 막스 씨가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림을 그릴 때 내는 작고 점잖은 소리에 몰두했습니다.
저는 제 붉은색 안락의자에서 막스 씨를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리는 그림을 볼 수는 없었지만요. 그는 그림을 비밀에 부쳤습니다. 일주일 후, 그림이 완성되면 하얀 틀에 끼워져 뒷면이 앞쪽을 향하게 다른 그림들 옆에 벽에 세워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독특한 길이 각각의 그림으로 인도하지”라고 막스 씨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예술가는 그 하나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가끔 막스 씨와 저는 가까운 해변으로 산책을 하기도 하고, 그럴 때면 막스 씨는 빠른 손놀림으로 항상 들고 다니는 스케치북에 스케치를 하곤 했습니다. 바닷가의 카페에 앉아서 멀리 무엇인가를 찾고 있듯이 시선을 고정한 채…. 또 아주 가끔은, 그는 더 멀리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막스 씨를 환송하기 위해 부두로 나가 그가 타고 있는 여객선이 등대 저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그는 여행에서 언제 돌아오게 될지 이야기한 적은 없습니다. 어쩌면 그도 자신이 언제 돌아올지 몰랐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겨울날, 막스 씨는 여느 때보다 일찍 그림 그리기를 마치고 우리는 검푸른 잔에 차를 담아 그의 스튜디오 창가에 앉아 마셨습니다. 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졌고, 그날 저녁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하게 느껴졌습니다. “너는 캐나다에 눈코끼리들이 살고 있는 것을 아니?”하고 막스 씨가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칸 코끼리들보다 훨씬 크고, 두툼한 흰 털을 갖고 있지. 그들은 매우 부끄럼을 많이 타서 심한 눈보라가 칠 때만 숲 밖으로 나온단다. 비록 몸집은 크지만, 조용하고 우아하게 움직인단다. 그리고 대개 사람들이 가까이에서 볼 기회를 잡을 성 싶으면, 눈코끼리들은 불어오는 눈보라 속으로 벌써 사라지곤 없단다.”
막스 씨는 어느덧 우리 집에서 1년하고 반년을 살았습니다. 그때까지도 그의 그림들은 여전히 뒷면이 바깥쪽을 향한 채 스튜디오의 벽에 기대어 세워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막스 씨와 제가 연주를 마쳤을 때, 그는 제게 한 다발의 열쇠를 주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막스 씨는 여름휴가가 시작할 무렵 상쾌한 이른 아침에 떠났습니다. 그가 부탁한 편지함의 편지를 그의 스튜디오에 놓아두기 위해 4층으로 올라갔습니다. 그의 스튜디오는 허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그림들은 길 줄을 이루어 벽에 기댄 채 제 쪽을 바라보며 세워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그가 오직 저만을 위해 마련해준 전시회의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안개 자욱한 등대, 그곳에는 말과 자전거를 가져온 남자들이 있고, 가까운 언덕에는 하얀 창의 성이 있겠지요.
1월 1일. 밤새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저녁 무렵, 서커스단은 마지막 고별 무대를 준비합니다. 다시 한 번 거리는 버려졌습니다. 잠시 후, 택시가 모퉁이를 돌아옵니다. 그들은 해안선을 따라 날았습니다. 깊은 숨소리가 밤을 타고 들려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막스 씨는 첫 여객선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는 여행을 하다가 우리 섬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집 한 채를 찾아냈다고 했습니다. 제가 아저씨가 떠날 것이란 것을 어떻게 눈치를 챘겠습니까. 그는 조용히 그림을 그릴 곳을 찾아 우리 집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스 씨는 자신은 결코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지금 이곳에서는 더 그릴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곳에서의 그의 시간은 다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그는 새롭고, 어쩌면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낯선 장소로 이사를 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막스 씨는 나와 함께 했던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제가 계속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전에 막스 씨는 단 한 번도 제게 그렇게 이야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막스 씨의 따듯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보고 싶을 거야. 교수" 그는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제 신발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가서 겨울이 가고, 다시 따듯한 3월이 왔습니다. 막스 씨로부터 밝은 포장지에 외국의 우표가 붙은 소포가 왔습니다. 그 안에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갈매기들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비상하고 있고, 조용히 저 멀리서 보트들이 떠다니고 방파제 위의 붉은 안락 위자에 한 소년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옛 스타일의 은색 테 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의 뒤에는 친근한 글씨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교수, 알고 있나? 내 그림에는 언제나 자네의 그림이 있었네.”」
밤 못 드는 밤을 위하여
사과 바지를 벗고 별 바지로 갈아입은 아기 곰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은 어둠 속에서 고요히 잠자고 있지만 아기 곰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창문가에 책을 쌓아 놓고 창밖을 내다보는 아기 곰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아침이 빨리 왔으면….’ 아기 곰은 부드러운 달빛이 비추는 풀밭과 집을 응시하다 시선을 돌려 서늘해진 선착장을 바라봅니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보물 상자가 어스름 속에서 보입니다. 옆집 로제 할머니의 창에는 피곤에 지친 할머니가 의자에 앉아 잠드신 모습도 비칩니다.
근처 풀밭에는 허수아비 아저씨가 아직도 밤이슬을 맞으며 서 있고, 시선을 좀 더 멀리 환한 빛이 비치는 쪽으로 향하자, 이웃 마을 서커스 공연이 끝났을 듯합니다. 아기 곰은 어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내일이 되면 다시 해적놀이도 하고, 옆집 로제 할머니도 도와드리고 수레를 타고 허수아비가 기다리는 풀밭으로 나가보고 싶습니다. 아기 곰은 내일을 기다리지만, 아직은 적막한 밤입니다. 어둠을 가르며 달빛이 창문 너머에서 흘러들어옵니다. 아기 곰은 달님에게 잘 자라고 뽀뽀하고 아침을 기약하며 마침내 잠들었습니다.
잠 못 드는 밤이 어른들에게만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음날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오른 조바심으로 아이들은 뒤척이며 쉽사리 잠들지 못할 때가 있지요. 특히 소풍 같은 멋진 행사가 기다리는 밤에는 말이죠. 이 책에서는 놀고 싶어서 창 밖을 내다보며 낮 동안의 일을 상상하는 아기 곰이 쳀런 어린이들의 모습을 대신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만지면 포근함이 손끝으로 전달될 것 같은 복슬복슬한 곰 인형이지만, 곰 인형도 때로는 잠들기 싫을 때가 있는지 달빛 아래 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은 차분하면서도 고요한 시간을 상상할 수 있도록 너무나도 따듯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달빛 비치는 커튼과 어슴푸레 비치는 그림자는 잠들기 직전의 몽환적 분위기를 한껏 살려내고 있습니다. 가끔 아이가 잠들기 싫어할 때, 잠자리에서 아이를 껴안고 부모가 읽어줄 만한 포근한 자장가와 같은 동화입니다. 일상의 다양한 장면과 자연 풍경이 따사로운 파스텔 톤으로 채워진 동화의 마지막 장에는 풍선에 매달려온 작은 편지가 들어있지요.
호수와 바다 이야기
헤세 문학상, 쉴러 문학상, 뷔히너 상을 받은 마르틴 발저와 시적인 화가 크빈트 부흐홀츠가 함께 만든 호수와 바다, 즉 물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입니다. 이 책에는 물가의 풍경을 그려낸 조용하고 아름다운 그림들과 그 침묵에 사려 깊게 뿌리를 내린 언어들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잔잔히 일어나는 동요에, 우리는 마술에 걸린 것처럼 불현듯 뭔가를 깨닫게 된다”라는 미하엘 크뤼거의 서문처럼, 이 책은 물가에서의 사색을 통해 삶의 의미를 고요하게 읊고 있습니다.
그림은 보는 이의 심상에 따라서 저마다의 풍경으로 각자의 마음속에 각기 다른 인상을 새겨놓습니다. 그런 인상은 그림에 대한 해설이 직접적이지 않을수록 더 깊게 각인될 것입니다. 마르틴 발저 부부가 글을 맡았지만 부흐홀츠의 신비로운 그림의 해석 영역을 독자들에게 맡기고 가능하면 많은 말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히 보입니다. 그렇게 마르틴 발저 부부는 자신들의 글이 그림과는 독립적으로 읽히게 함으로써 독자가 글을 읽으며 저마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게 되고 저마다의 거울로 부흐홀츠의 그림을 비춰볼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발저는 부흐홀츠의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 그림은 얼마나 다양한 해독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는지…. 누군가는 어떤 해석도 꾸며내지 않으며, 단지 언어가 그림을 정확히 재현해 낼 수 없다는 점만을 음미하고 있을 수도 있다. 반면, 그림을 보고 바로 유희로 돌아설 수도 있다. 규칙은 다양할 것이고. 보는 사람이 규칙마저 만들어내어도 좋은 것이고.”(71쪽)
마르틴 발저가 이야기했듯이 그림이 갖고 있는 내밀한 이야기는 그림을 감상하는 감상자의 시심에 의해 또 한 편의 시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화가가 아니기에 세상을 화폭에 옮길 수도, 마음속 심상을 그림으로 재현할 수도 없지만, 발저 부부가 했듯이 자신만의 규칙과 소통의 방식으로 부흐홀츠 그림과 소통한 자신의 내면 풍경을 글로 써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번 호에서 부흐홀츠를 소개한 목적은 그림책이란 어린이만이 감상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서입니다. 사실 아이들을 독자층으로 생각하고 만든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그림책 속의 그림은 문자 언어에 익숙한 어른들의 눈으로는 거의 해독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할 때도 많습니다. 아이가 보는 그림책에서 글을 가리고 그림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작가가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상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아마 고작 서른두 쪽의 그림책 마지막까지 작가와 교감할 수 있는 인내를 가진 어른들 별로 많지 않을 거예요. 그림책이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점,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