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한복판에서 기쁨을 외치다 - 『세계는 평평하다』 vs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
최근에 등장한 두 권의 책도 그렇다. ‘세계화’라는 주제를 담은 『세계는 평평하다』와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도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상대방의 고지에 깃발을 꽂기 위해 혈안이 돼있다.
1초의 멈춤도 없이 처절한 전투가 계속되는 곳이 있다. 격전지는 바로 도서관이다. 도서관에서는 공자와 순자도 싸우고 예수와 석가모니도 싸운다. 또한 마르크스와 애덤 스미스도 싸우고 송시열과 박지원도 싸운다. 책을 통해서다. 다른 지식과 사상을 이야기하는 그들은 도서관에서 피투성이가 되어도 계속 외친다. “돌격! 앞으로!”라고.
최근에 등장한 두 권의 책도 그렇다. ‘세계화’라는 주제를 담은 『세계는 평평하다』와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도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상대방의 고지에 깃발을 꽂기 위해 혈안이 돼있다. 오늘날 가장 논란이 되는 주제와 맞물리기 때문인가.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고,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인간의 내일을 결정하는 전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의무적’이라고 할 정도로, 그 전투는 분명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평평한 세계와 세계화는 인간의 축복
정체성을 가려보자. 『세계는 평평하다』는 세계화를 찬성하고 있다. 반면에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극단의 자리에 서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나의 세계를 평가하는 이들은 목소리가 전혀 다른 까닭은 무엇인가.
먼저 두께에서 묵직함을 자랑하는 『세계는 평평하다』부터 보자. 『세계는 평평하다』는 오늘날의 세계는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그 어느 때보다 ‘평평’해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굳이 말하면 지구라는 거대한 축구장 안에서 60억의 인구가 ‘평등’하게 시합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과 세계화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프리드먼은 세계화 덕분에 세계는 평평해지고, 그 안에서 다시 세계화가 활발하게 이뤄진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역학 관계 덕분에 부유한 나라와 빈곤한 나라는 각자의 썩은 이빨을 치료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는 평평하다』에서 자주 언급하는 인도와 미국의 경우로 살펴보자.
미국은 값비싼 인건비 때문에 골치를 썩는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고급인력들이 많지만 가난한 탓에 이들을 이용할 방법이 없어 답답하다. 과거라면 미국과 인도는 두 손 놓고 두통을 앓아야 했다. 하지만 세계가 평평해진 덕분에 미국은 싼 값에 인도의 고급인력을 이용하고 인도는 미국 덕분에 외화를 벌어들이는 방법으로 서로의 아픈 곳을 속 시원히 치료해주고 있다. 평평해진 세계 덕분에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일종의 비교무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계는 평평하다』는 그러한 국가 간의 협력에 대해 거듭해서 찬사를 늘어놓는다. 더불어 인간과 인간 사이도 평평해지고 있다며 이것 또한 ‘세계화’와 ‘평평한 세계’와 일맥상통하다고 지적한다. 인터넷이나 이동통신 등의 발달로 인간 사이의 격차도 줄어들고 있고 서로 동등하게 경쟁할 수 있다는 말인데 결국 세계화는 국가와 국가, 인간과 인간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는 축복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아니,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확신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고로, 『세계는 평평하다』는 확정 짓는다. 세계화가 ‘살 길’이라고.
세계화는 인간의 재앙, 당장 중지하자
만약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가 『세계는 평평하다』를 만났다면 무슨 소리를 할까? 침묵했을 거다. 너무 황당하기에, 얼굴에 핏대 올리며 삿대질만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세계화가 ‘재앙’이라고 못 박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수의 부자들만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세계화의 본질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부익부 빈익빈에 대한 보기 좋은 변명이 세계화라는 것인데 이것에 따르면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결코 세계가 평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비유적으로 말해보자면 60억이 축구장에 있더라도 누구는 몸보신 한 뒤에 에어운동화 신고 뛸 준비를 하지만 누구는 영양부족으로 쓰러지기 직전에 맨발로 뛰어야 하는 ‘어처구니없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선언한다. 국가 사이를 협력하게 해준다는 기구들은 미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인건비를 줄이는데 혈안이 된 다국적기업들과 한통속이라고 말이다. 나아가 요즘처럼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가 ‘살 길’이라고 믿는 것은 진정으로 이익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가 소유의 미디어가 만든 환상, 즉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세계는 평평하다는 논리 자체를 있는 자들의 ‘기만’이라고 말하는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세계화를 걷어치우고 대안 개념으로서 일종의 ‘지역화’를 내세운다. 지역화가 될 경우 지금처럼 보통의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못할 일이 없을뿐더러 일자리 창출이나 환경 보호 면에서 효과적인 성과를 거둘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주장이 아니라 이것 또한 확신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다. 고로,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확정 짓는다. 세계화를 거부하지 않으면 내일 망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승자를 선택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몫
자신의 의견을 확신하는 『세계는 평평하다』와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의 표정에는 당당함이 넘친다. 하지만 아킬레스건이 있다. 『세계는 평평하다』는 전형적인 중산층 이상의 미국인의 시각에 기반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프리드먼 스스로가 미국의 행복을 선언하며 주장을 펼치는 것이야 그의 입장을 생각하면 납득이 될 수도 있지만 미국이 아닌 국가의 사람들에게는 분명 눈 꼬리를 사납게 하는 것이다.
다소 비약적으로 말해보자. 이 책의 뉘앙스는 흡사 부시 대통령의 온건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리드먼은 부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테러 세력을 지명하고 미국의 이익이 곧 세계의 이익이라 생각하는 모습은 충분히 부시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전문가답게 세련되고 정교함이 있다는 차이 정도가 보일 뿐이다.
반면에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는 말하는 내용이 다소 생소하게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더군다나 ‘지역화’라는 것에 불쾌한 추억을 현재형으로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세계화의 대안으로 내세운 지역화의 개념이 얼마나 정확하게 본래 의미대로 힘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의 뉘앙스도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민주노동당이라고 할 수 있다. 좋다고 여기지만 현실에서는 정말 쓸모가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운, 선뜻 선택하기 주저되는 ‘착한 이론’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의식하지는 않았을 것임에도 두 책은 여러모로 대비가 된다. 서로 맞추기라도 한 듯 논리적으로 상대의 주장을 비판하거나 반박하는 부분이 상당하다. 때문에 난해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음에도 흥미진진한 끝장토론을 연상케 하는 즐거움은 물론 비판 의견까지 수렴할 수 있는 독특한 시너지 효과까지 만들어준다. 그렇기에 기쁘다. 당사자들이야 죽고 사는 심각한 문제가 되겠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즐거운 구경거리도 없으니까.
어쨌든 전투 뒤에는 승자를 가려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지구는 둥글지만 세계는 평평하다’는 깃발을 들고 달리는 『세계는 평평하다』일까? 아니면 ‘세계화는 소수의 자기합리화’라는 깃발을 든 『더 나은 세계는 가능하다』일까?
당장 승자가 누구인지는 판명되지 않을 테다. 그래서 오늘도 두 책은 ‘총성 없는 전쟁’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격전지를 찾아간 당신이 ‘손짓’을 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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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알립니다]위에서 언급한 부시 대통령과 민주노동당에 대해 비유는 밝힌 대로 ‘비약’적인 것입니다. 비약적임에도 굳이 비유한 것은 ‘책의 분위기’를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