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가슴을 파고 들거나 머리를 흔들어 놓는 마법을 발휘할 수 있는데, 이 중 지식을 알려줌으로써 머리를 흔들어 놓는 마법은 읽는 이로 하려금 크게 세 가지의 반응을 불러 옵니다. 첫 번째는 모르던 것을 알았을 때의 “아하!”, 두 번째는 알던 것을 확인했을 때의 “역시!”입니다. 그럼 마지막은? 바로 알던 것을 통째로 뒤집게 됐을 때의 반응, “악!”이 있습니다.
<정군의 책 대 책>, 첫 이야기로 “악!”하는 반응이 나오는 책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오늘날 무진장(!) 비난 받는 두 남자,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를 부활시킨 『애덤 스미스 구하기』와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가 그 주인공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부활했다면 웃을 수 있을까?
쌀 개방 때문에 요즘 난리도 아닙니다. 농심이 멍들고 있다는 말이 절실히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통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쌀 개방은 왜 합니까? 초등학생도 아는 질문이지요. 자유무역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덤 스미스가 욕먹고 있습니다. 자유무역이라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이론에서 출발하니까요.
애덤 스미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사업가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본을 투입하고 공공의 이익은 자본가들이 증진시키려고 애쓸 때에 좀 더 효과적으로 증진 된다”는 말로 자본가들에게 성경의 말씀과도 같은 말을 무수히 남겼으니까요. 따지고 보면 쌀 개방이나 ‘FTA(자유무역협정) 협약’도 애덤 스미스의 가르침이 되고 말지요.
그런데 애덤 스미스가 부활해서 오늘을 본다면 흐뭇하게 웃을 수 있을까요? 전문가들 주장대로 그들은 애덤 스미스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걸까요? 자, 상상만 하지 말고 『애덤 스미스 구하기』에서 부활한 애덤 스미스에게 직접 들어봅시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사람들이 내 사상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의 창출은 단순히 시장이 돌아가게 유지하는 걸 넘어서는, 훨씬 복합적인 과정이라네. 무역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회가 개개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확실하게 보장해 줘야 해.” <책 속에서>
칼 마르크스가 부활해서 한 말은?
애덤 스미스가 불만이 있다는 것, 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지요? 자세한 속사정은 뒤에 듣기로 하고 이번에는 애덤 스미스만큼이나 욕먹는 칼 마르크스를 만나봅시다. 흔히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의 아버지’라고 알려졌지요. 이 땅에서만 해도 그의 이름은 루시퍼와도 같았습니다. 무조건 피해야 했지요. 가까운 과거만 해도 그의 책을 함부로 봤다가는 잡혀갔다고 합니다. 루시퍼만큼이나 루시퍼의 말씀은 위험천만하니까요.
정도의 처지만 다를 뿐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덕분에 칼 마르크스는 정말 루시퍼가 됐습니다. 제대로 알 수도 없거니와 설사 만난다 하더라도 ‘적’을 통해 들어야 했으니까요.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적이 적을 제대로 이야기할리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칼 마르크스는 정말 그랬습니다. 덕분에 헛소문과 왜곡 등으로 재구성되고 재구성된 이미지가 남았습니다.
칼 마르크스는 그것이 꽤 억울했는지 하늘의 도움으로 지상에 나타납니다. 1시간 동안 지상에 내려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지요. 그런 이유로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에서 그는 자본주의의 메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에 나타납니다. 나타나서 무슨 말을 했을까요? 그는 외칩니다! “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야!”라고.
시장 경제는 이기심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둘 다 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으니 천천히 책 속을 들여다볼까요? 먼저 애덤 스미스가 부활한 『애덤 스미스 구하기』입니다. 『애덤 스미스 구하기』는 ‘안정화’, ‘자유화’, ‘민영화’를 외치는 경제학자 라티머 박사 밑에서 민영화에 관한 논문으로 대박을 터뜨릴 절호의 기회를 잡은 ‘나’에게 헤럴드라는 인물이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헤럴드, 그는 참 괴상한 주장을 합니다. ‘내 안에 애덤 스미스가 있다’고 하니까요. 당연히 ‘나’는 코웃음을 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로 판명 나고 애덤 스미스를 신봉하는 ‘나’는 우상을 만나 열광하고 말지요.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챕니다. 우상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나’와 헤럴드의 긴 대화 끝에 드러납니다.
‘내’가 알고 있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만으로 기억되는 경제학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진짜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도덕감정론’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덕감정론’, 생소한 이름인데 이것은 꽤 중요합니다. 이것까지 생각하면 애덤 스미스가 생각하는 시장 경제란 ‘정의의 법’에 의해 ‘국민들이 정의를 보장받고 신뢰를 토대로 자신의 근면성과 자본을 기반으로 경쟁을 하는 것’이 되거든요. 자유무역의 대안으로 언급되는 ‘공정무역’과 일맥상통하는 말로 풀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이기심으로 알려지던 냉혈한이라는 생각을 뒤집는데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돈 벌려는 사람들이 편의로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요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애덤 스미스가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자신이 누군가의 잇속 챙기기를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가 꿈꾼 사회는 20세기의 공산국가가 아니다!
칼 마르크스가 흥분한 이유도 애덤 스미스와 비슷합니다. 자신의 사상이 왜곡되어진다는 것이지요. 지식인의 자존심을 넘어 인간적인 상처를 받았을까요? 그는 아주 강하게 말합니다. 자신이 원하던 사회는 파리코뮌과 같던 사회라고요. 그의 말을 직접 들어봅시다.
“파리 코뮌에서는 법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부채를 탕감하고, 집세의 지불을 유예하고, 전당포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되돌려주게 했습니다. 코뮌 사람들은 노동자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빵 굽는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도 줄이고, 누구나 극장에 공짜로 들어갈 수 있는 방안도 계획했지요.” <책 속에서>
이것만 봐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말했던 사회와 현재 알려진 그의 사상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감이 있는지 말입니다. 칼 마르크스, 그는 또한 분노해 외칩니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동정심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계발'하는 것을 억압하는 통치 체제는 절대 자신이 평생을 몸 바쳐 꿈 꿨던 사회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20세기에 나타났던 공산국가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인데, 상당히 뼈대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지요?
‘생각 없음’을 경계하며 “악!”소리 내기
한네스 슈타인은 『생각 없이 살기』에서 여과 없이 남들의 생각을 따를 바에는 아예 ‘생각이 없는 게 낫다’고 지적합니다. 이 말은 곰곰이 씹어볼수록 쓴맛이 납니다. 특히 애덤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에 관해서라면 더욱 그렇지요.
어떻습니까? 둘에 대해서 남들이 하는 말, 대중매체가 떠든 말만 듣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혹시 ‘생각 없음’을 몸소 실현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바에는 한네스 슈타인의 말처럼 생각이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권합니다. 차라리 “악!”하는 소리와 함께 뒤집어질 것을.
물론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뒤집어졌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 그것 또한 ‘생각 없음’의 반복이니까요. 이 책들은 계기로 삼는 게 좋습니다. 뒤집어서 생각해볼 계기 말입니다.
자, 그 계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악!”소리 한번 내보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