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을 강요당한 디아스포라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
서경식(徐京植, 1951- )은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작가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재일조선인’은 함부로 쓰기 어려운 표현이었다.
재일조선인 2세 작가
서경식(徐京植, 1951- )은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 작가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재일조선인’은 함부로 쓰기 어려운 표현이었다. 적어도 서경식의 두 형이 모국의 감옥에 갇혀 있던 1971년부터 1990년까지는(1970년대 이전은 말할 것도 없이) 고통을 감수하고 써야 하는 금기어였다. 서경식은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김혜신 옮김, 돌베개, 2006)의 ‘프롤로그’를 통해 “‘재일조선인’이라는 개념에 대한 인식이 공유되지 않은 상태”라며 이에 대한 주석을 덧붙인다.
“‘조선’과 ‘한국’은, 전자는 ‘민족’을 후자는 ‘국가’를 나타내는 용어이며 관념의 수위가 다르다. 혼란은 이와 같은 개념상의 구별이 애매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그 배경에는 ‘민족’과 ‘국민’을 동일시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지 않는 단일민족국가 환상이 뿌리 깊게 가로놓여 있다.”
한반도의 남북을 근거지로 하면서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가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한데 아울러 일컬을 때, 서경식은 현재로선 ‘조선인’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긴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말을 민족의 총칭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이란, 민족 전체의 광대한 생활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일부를 차지할 뿐인 국가의 호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인’이라는 호칭은 국민적 귀속을 나타내는 한정된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 2세지만, 국적은 ‘한국’이다.” 이것은 그가 “민족적으로는 ‘조선인’이며 국민으로서는 ‘한국인’”이라는 의미다. 또한, 그의 “모어(母語)는 일본어지만 모국어(母國語)는 조선어다.” ‘조선어’라는 명칭은 우리 민족을 ‘조선인’으로 호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국어’라고 하면 한국이라는 한 국가의 ‘국어’를 가리키게 되기 때문에 민족어의 총칭으로서는 ‘조선어’라는 말이 적합하다”라는 것이다.
재일동포에게 ‘조선’은 재일조선인이 형성된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기도 하다. 1947년 선포된 일본의 외국인등록령에 따라 ‘외국인’으로 간주된 재일조선인들은 외국인 등록수속을 할 때, 국적을 신고해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남과 북에 공히 독립국가의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었다.
“할 수 없이 많은 재일조선인은 국적란에 ‘조선’이라고 기입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반도 출신,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의미, 즉 국적이 아니라 민족적 귀속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서경식은 지난해부터 <한겨레> 책?지성 섹션에 ‘심야통신’이라는 칼럼을 쓰고 있고, 올봄부터는 성공회대 객원 연구원으로 “지금까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두 형의 투옥으로 지체된 모국에서의 ‘유학생활’을 하는 중이다. 얼마 전, ‘심야통신’을 담당하는 <한겨레> 기자를 만날 기회가 있어 서경식 선생이 주로 하는 일이 뭔지 물어봤지만 뾰족한 답을 듣지 못했다. 정작 서경식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디아스포라 기행』에 답이 나와 있다. “나는 ‘작가=글쟁이’이다.”
디아스포라 혹은 이산(離散)의 백성
서경식은 자신이 ‘디아스포라’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디아스포라 기행』은 “‘나’라는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가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Kassel, 광주 등을 여행하면서, 각각의 장소에서 접한 사회적 양상과 예술작품을 테마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의를 탐색하려 한 시도다.” 또한, “이 시도는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디아스포라’는 “근대의 노예무역, 식민지배, 지역 분쟁 및 세계 전쟁, 시장경제 글로벌리즘 등 몇 가지 외적인 이유에 의해, 대부분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산을 강요당한 사람들 및 그들의 후손을 가리키는 용어”다.
또한, 서경식은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거나 나치 수용소에서 살욾 돌아온 유대인 예술가 세 사람 ― 펠릭스 누스바움, 프리모 레비, 장 아메리 ― 에게 애착을 갖는다. 그들과 진한 동류의식을 느낀다. 특히, 1995년 베를린에서 열린 어느 전시회에서 이름을 알게 된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에 대한 감정은 남달라 보인다. 누스바움은 1944년 7월 20일 누군가의 밀고로 벨기에 브뤼셀의 은신처에서 아내와 함께 나치 친위대에 붙잡혀 7월 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그러니까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1943)은 화가 자신의 운명을 암시한 작품인 셈이다. 일본 TV 프로그램을 위한 현지촬영을 하면서 서경식은 일본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동작을 취한다. “나는 내 외국인등록증을 왼손에 쥐고, 누스바움의 자화상과 같은 포즈로 그것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찍어달라고 재촉했다. 그 장면은 촬영은 됐지만, 편집 단계에서 결국 잘려나갔다.”
서경식은 ‘국민’과 ‘내셔널리즘’에 대해 알레르기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고향과 그곳의 자연, 자기를 사랑해주는 가족, 조상이 남겨준 유형무형의 재산,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전해지는 혈통, 과거에서 미래로 계속되는 ‘국민’의 전통, 고유의 역사와 문화. 하나하나 자세히 검토해보면 근거가 희박한 이 관념들이 단단히 모여 있는 것, 그것이 ‘국민’이다.”
“사람은 우연히 태어나 우연히 죽는 것이다, 혼자서 살고 혼자서 죽는다, 죽은 뒤는 무(無)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내셔널리즘에서 오는 현기증을 극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달려 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너무도 힘겨운 일이다.”
내셔널리즘을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잘 아는 그가 김지하 시인을 강하게 비판하는 까닭은 그만큼 국가주의의 폐해가 심각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탑과도 같이 우뚝 서 있던 시인은 ‘성배의 민족’ 운운하는 국수주의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도 서경식은 시대의 변화와 상황의 진전에 따른 ‘김지하’로 표상된 집합적 인격의 “분열 과정을 거쳐 한국의 저항적 내셔널리즘이 더 보편적인 인간해방의 사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가리라는 가능성을” 단념하진 않는다.
문화예술 에세이와 사회역사 평론집
일본어 평론집 가운데서 우리 독자들이 읽었으면 싶은 글을 골라 엮은 한국어판 평론선집 『난민과 국민 사이 :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임성모?이규수 옮김, 돌베개, 2006)에서 서경식은 그가 펴낸 책을 크게 두 계열로 나눈다. 문화예술 에세이와 사회역사 평론집이 그것인데 지금까진 문화예술 에세이가 많이 번역되었다.
‘창비교양문고’를 통해 나온 『나의 서양미술 순례』(박이엽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2)는 서경식의 이름을 국내 독자에게 처음으로 알린 책이다. 가슴 아픈 가족사와 쓰라린 우리 현대사가 바탕에 깔려 감동을 안겨주었다. 두 형을 면회하러 바다를 건너온 어머니와 누이가 기차표를 날치기당한 사연은 지금 읽어도 씁쓸하기 짝이 없다. 이 책은 출판사가 ‘창비교양문고’의 출간을 중단하면서 초판이 나온 지 10년 만에 새로운 장정의 개정판이 나왔다.
『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김석희 옮김, 창작과비평사, 2002)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속편 격으로 “20세기 전반의 회화예술에 관한 에세이 서른한 꼭지를 한 권에 모은 것”이고, 『소년의 눈물 : 서경식의 독서 편력과 영혼의 성장기』(이목 옮김, 돌베개, 2004)는 담백함이 돋보이는 독서산문집이다.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은 필자 또한 “끝내 (다) 읽지 못한 책”이다.
‘전쟁의 기억을 통러싼 대화’를 부제목으로 하는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김경윤 옮김, 삼인, 2002)는 『난민과 국민 사이』가 나오기 전까지 하나뿐인 서경식의 한국어판 사회역사 평론이다. 일본의 학자 타카하시 테츠야와의 대담을 엮었는데 ‘과거사 청산’은 표현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서경식의 지적이 가슴이 와 닿는다.
“역사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갱신해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제아무리 국가 권력이라고 해도 있었던 것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역사의 청산’이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역사는 지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난민과 국민 사이』는 『분단을 살다(分斷を生きる)』, 『반 난민의 위치에서(半難民の位置から)』, 『저울질하지 마라(秤にかけこはならない)』에서 고른 글을 싣고 있다.
내가 그에게 공감하는 이유
서경식은 1928년,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를 따라 한반도의 충청남도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서승춘의 4남1녀 중 넷째 아들이다. 모국에 유학 왔다가 간첩으로 몰려 20년 가까이 복역한 서승, 서준식은 그의 둘째, 셋째 형이다. 『서승의 옥중 19년』(김경자 옮김, 역사비평사, 1999)과 『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야간비행, 2002/ 『옥중서간집』, 형성사, 1989)도 감동적인 책이지만, 나는 서경식의 책들에 더 공감한다.
그건 아마도 내가 3형제 가운데 셋째라서 그럴 것이다. 막내의 정서가 통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이 비슷해서일 것이다. 나도 “‘선진국’, 이 세 글자를 쓸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들곤 한다.” 또한,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행위에 종사하면서 이 세계를 바꾸는 길을 개척하는 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무력함(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행가라고 불러도 좋을 서경식은 “왜 그런 여행을 했는지 물어도 대답하기 어렵다”라고 말한다. “구태여 말한다면 일본 바깥의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다. 일본이라는 공간은 내게 있어서, 조금씩 공기가 희박해지는 지하실과 같다. 아니면 염천(炎天)에 달구어져 지글지글 수분이 증발해가는 작은 웅덩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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