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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와 가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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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럴 줄 진작에 알았다. 해외 사상가 리뷰를 쓰면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를 뒷전으로 밀어 둔 까닭은 왠지 내 취향은 아닐 거라는 ‘예감’ 때문이다.

내 이럴 줄 진작에 알았다. 해외 사상가 리뷰를 쓰면서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를 뒷전으로 밀어 둔 까닭은 왠지 내 취향은 아닐 거라는 ‘예감’ 때문이다.1) 아니나 다를까. 궁여지책으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1930~1992)와 공저한 책 네 권을 리뷰의 대상으로 삼았어도 두 사람의 책은 ‘리뷰 불가능’까진 아니어도 흐물흐물한 ‘삶은 호박’은 결코 아니었다.

그간 내가 쓴 해외 사상가 리뷰 가운데 많은 숫자가 사상가의 핵심 사상을 간취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렸을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의 경우는 변죽을 울리기는커녕 둘의 사상의 언저리를 맴도는 것도 벅찰 지경이다. 작가 장정일은 “서양의 철학사는 “읽든지, 못 읽든지” 양단간에 결판이 난다”고 했는데, 나는 들뢰즈-가타리를 못 읽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2)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얘기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또 한 사람의 난해한 철학자 자크 데리다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천 개의 고원』의 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 『노마디즘』 첫째 권에서 이진경이 들려준 독서 체험에 입각한 조언도 내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진경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이 난해한 이유의 하나로 그들의 ‘잡학’을 꼽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확실히 이 책은 그런 예들을 알고 있으면 이해하기가 쉬워요.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어렵다는 비난에 대해, 그건 자신들 책임이 아니라고 발뺌할 여지가 충분히 있는 셈이라는 생각도 들지요. 실제로 저는 그 예들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쫓아다니면서 이 책을 읽었는데, 그래서인지, 아니면 익숙해져서인지, 처음에 그 어이없고 황당하던 문장들이 나중엔 쉽게 느껴지게 되더군요. 그렇게 보면 이 책처럼 새롭고 풍요로운 책이 어디 있을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믿거나 말거나!)”(27면)

그 ‘잡학’의 세목은 다음과 같다. “이 책에는 정신분석학이나 철학, 문학, 언어학은 물론, 신화학, 민속학, 동물행동학, 경제학, 고고학, 음악, 미술사, 물리학, 분자생물학, 수학 등 온갖 ‘잡학’들이 다 동원됩니다.”(『노마디즘 1』, 24면) 그런데 『노마디즘』에는 들뢰즈가 자신의 책이 어렵다는 지적에 대한 해명(?)이 인용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책(『앙띠 오이디푸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름 아니라 가장 교양 있는 사람, 특히 정신분석학적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일세…나는 아무런 지식을 갖추지 않고서도 자신들의 ‘습관’ 덕분에, 스스로를 그렇게 만드는 방식 덕분에, 기관 없는 신체라는 말을 금방 이해한 사람들을 알고 있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어투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마르크스도 『자본론』제2판의 서문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자본론』이 독일 노동계급의 광범위한 층에서 이처럼 빨리 평가받게 된 것은 나의 노력에 대한 최대의 보상이다. 경제문제에서는 부르즈와적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인 비엔나의 공장주 마이어(Sigmund Mayer)씨는 보불전쟁시에 발간된 어떤 소책자에서, 독일인의 세습재산이라고 인정되어온 이론적 사색의 탁월한 재능은 독일의 소위 식자층에서는 완전히 소멸하였으나 그 대신 독일의 노동계급 속에서 부활되고 있다고 아주 옳게 말한 바 있다.”(마르크스, 『자본론Ⅰ(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89. 10면)

나는 자신의 책에 관한 들뢰즈와 마르크스의 언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선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한때 우리 나라에서도 노동자가 지식인보다 『자본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속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얘기다. 『자본론』은 노동자와 지식인 모두에게 어려운 책이다. 그렇지만 가방끈이 짧은 노동자에게 더 어렵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책을 읽고자 하는 열의가 같을 때, 지식인이 더 쉽게 읽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지식을 갖추지 않고서도” “기관 없는 신체라는 말을 금방 이해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는 들뢰즈의 주장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잡학의 세목들에 친숙한 독자가 들뢰즈-가타리의 책들에 좀더 용이하게 다가서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들뢰즈가 말한, 자신들의 습관 덕분에 들뢰즈의 주요 개념을 금방 이해한 독자가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에서 예비고사?학력고사?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한 ‘똑똑이’들이 들뢰즈에 ‘열광’(?)하지 않는가.

기왕 마르크스 얘기가 나왔으니까 들뢰즈를 마르크스에 견줘 몇 마디 더 해보겠다. 우선, 들뢰즈-가타리 짝은 마르크스-엥겔스 커플 이후 가장 환상적인 지식인 동업자다. 두 쌍을 구성하는 인물의 성격과 역할 분담도 비슷하다. 내 개인적인 독서 체험은 마르크스-엥겔스가 편했다. 마르크스-엥겔스의 글은 진득하게 따라 읽으면 무슨 얘긴지 파악할 수 있지만, 들뢰즈-가타리의 글은 무슨 말을 하는지 감을 잡기 어렵다.

시야를 독서계와 지식 사회로 넓히면, 우리나라에서 이 지식인 동업자 두 쌍의 20여 년을 격한 유행은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1980년대 마르크스-엥겔스가 밀물처럼 읽히다가 썰물처럼 안 읽힌 데에는 저작물의 산출 시기와 그것의 수용 사이에 가로놓인 1백년의 세월이 적잖이 작용했다. 그런데 2000년을 전후로 우리 독자들이 열심히 읽고 있는 들뢰즈-가타리의 책들은 20~30년 전에 씌어진 한 세대 전의 책들이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의 지적 유행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상이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지적 유행에 편승한다는 시각에 대한 이진경의 진술이 재미있다.

“제 개인적인 얘길 하자면, 이는 사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1987)이란 책의 저자와, 들뢰즈?가타리나 푸코를 앞세운 90년대 후반의 저 사이의 ‘비통일성’을 지적하고 우려해주시는 분들을 통해서 제가 직접 빈번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노파심’의 밑바닥에는 공연히 유행을 좇는 천박한 세태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것은 잘 압니다만, 그것이 사회주의가 망해도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유지하는 ‘지조’에서 위안을 찾는 것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그런 변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문제의식 내지 질문의 일관성을 보아주시길 부탁드리고 싶기도 합니다.”(『노마디즘 1』, 87~8면)

내가 들뢰즈의 이름을 뚜렷이 기억하게 된 계기는 그의 죽음을 전한 외신을 통해서였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작가?대학교수인 질 들뢰즈(70)가 지난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고 가족들이 5일 밝혔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한겨레』(1995년 11월 7일자)의 짤막한 기사에는 들뢰즈가 “줄곧 좌파적 이념을 옹호해왔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정확한 자살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앞세운 『한국일보』(1995년 11월 7일자) 기사에서는 김진석 교수의 코멘트가 이채롭다. “인하대 철학과 김진석 교수는 “푸코의 에이즈로 인한 죽음을 삶의 주변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들뢰즈의 죽음은 삶의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해석하려는 극단의 모험”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신문들이 들뢰즈의 자살 소식을 전한 이튿날 해설 기사에서, 지금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당시 『한겨레』 파리 주재 기자였던 고종석은 들뢰즈의 죽음을 약간 다르게 해석한다.

“세 해 전에 쓴 글에서 사뮈엘 베케트의 만년을 ‘고갈된 삶’이라고 쓸쓸히 표현했던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지난 4일 밤(현지 시각) 노쇠와 호흡기 질환으로 고갈된 일흔살 삶을 스스로 끝장냄으로써, 그 자신이 곧잘 ‘철학적 일화’로써 거론하던 엠페도클레스의 전설적 자살이 있은 뒤 2천5백년 뒤에, 서양철학사에 또 하나의 일화를 보탰다.”

그런데 예전 신문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면서 처음 보게 된 지금은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이한우 기자의 기사에서는 결과적으로 넘겨짚은 해석이 될 가능성이 높은 무리한 추측이 보인다.

“그의 돌연한 자살은 한 가지 중대한 의문을 던져놓았다.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에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신념을 고수했던 그가 왜 죽는 그날까지 다른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책을 썼으면서도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단 한 권의 저서도 쓰지 않았을까. 이 의문은 그의 자살동기를 밝히는 것과도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조선일보』, 1995년 11월 24일자, 25면)

들뢰즈의 자살과 마르크시즘은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들뢰즈는 마르크스를 주제로 한 책을 썼다고 한다. 출간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완성된 형태의 원고인지, 미완성 유고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맑스의 위대성(Grandeur de Marx)』이라는 책의 원고를 남겼다.

들뢰즈­가타리의 책들을 훑어보고 나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우리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들뢰즈-가타리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욕망, 탈주(선),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같은 우리네 소장 인문?사회과학자들의 글과 책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은 모두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다.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 최첨단은 아닐지언정 주류적인 철학임은 분명하다. 소수자의 문학을 강조한 그들을 철학의 주류로 표현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적어도 우리의 독서계와 지식 사회에서는 그렇다. 영화가 교양이 된 세대에게 영화에 관해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준 들뢰즈가 각광받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3) 여기에다 최근 잇달아 선을 보이고 있는 마법사와 연금술 관련 번역서들도 들뢰즈-가타리 현상과 무관치 않은 듯 싶다. 들뢰즈-가타리 책에는 마법과 야금 얘기가 자주 나온다. 물론 절반은 해리포터 현상 때문이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들뢰즈-가타리의 책들을 읽는 순서에 대해서다. 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천 개의 고원』(에 더하여 『노마디즘』)→『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앙띠 오이디푸스』의 순으로 읽기를 권하고 싶다. 실제로는 책을 권하는 것과는 역순으로 이 책들을 접했지만 말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이정임?윤정임 옮김, 현대미학사, 1995)를 가장 앞세운 것은 이 책이 『카프카』와 함께 일반적인 책의 서술 형태에 근접해서다. 그러면서도 개론의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철학 개론류 서적이 결코 아니다. ‘역자 후기’에서는 서랍식 정리정돈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개념의 교육학” 정도가 이 책의 성격으로 적절하다고 하는데 여기서 교육학의 원어는 페다고지(pedagogie)다.

들뢰즈-가타리는 “철학자는 개념의 친구이며, 개념의 가능태”라고 말한다. 엄밀히 말해 “철학은 개념들을 창출(creer)해내는 학문이다.” 또한 “언제나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곧 철학의 목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철학은 관조가 아니고, 반성이 아니며, 소통도 아니다. “철학은 관조가 아니다. 왜냐하면 관조란 자기 고유의 개념들의 창조 속에서 보여지는 바 그대로 사물들 자체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반성이 아니다. 무엇에 대해서건 반성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도 굳이 철학을 필요로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철학은 소통에서 그 어떤 최후의 은신처를 찾아낼 수도 없다. 소통이란 개념이 아니라 ‘합의’를 창출하기 위한 의견들의 가능태로서만 작용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개념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각인돼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데카르트의 코기토, 라이프니츠의 단자, 칸트의 조건, 셸링의 힘, 베르그송의 지속”처럼 말이다. 또, 고어와 신조어를 조장하는 개념들은 “철학적 운동경기로서의 어원학”이다. “어느 경우에나, 마치 문체의 요소처럼, 반드시 그러한 단어 혹은 그러한 선택이 아니면 안 된다는 불가피론이 있게 마련이다. 개념의 명명은 철학 고유의 어떤 취향을 요구한다.”

그런데 “개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되는 것이며, 창조되어야만 한다. 개념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스스로를 세우는 자립(auto-position)”이다. “따라서 가장 주관적인 것이 가장 객관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개념과 철학에 관한 논의가 이어지는데 그것을 다 따라잡을 이유는 없다. 다만, 내가 밑줄을 그은 구절 가운데 몇 대목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통이란 우리에게 결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아도는 것이며,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창조이다.” 우리 신세대 지식인들에게 화두가 되다시피한 ‘욕망’과 ‘소통’이 모두 들뢰즈-가타리를 원천으로 하는 건 아닌 듯 싶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엥겔스의 구호를 패러디해 들뢰즈-가타리는 “전 세계의 이주자들이여 단결하시오!” 한다. 그런데 들뢰즈-가타리도 마르크스-엥겔스처럼 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듯하다. “동방은 철학에 앞서 있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옆에 있다. 왜냐하면 동방인은 사유하기는 하지만 존재를 사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방과 동방인이 구체적으로 어디와 누구를 말하는지 확실치는 않다. 

앨런 소칼과 장 브리크몽이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이 과학을 어떻게 남용했는지 드러낸 『지적 사기』(민음사, 2000)에서 들뢰즈-가타리도 한 장을 차지한다. 소칼과 브리크몽은 자신들이 인용한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주된 특징으로 ‘불명료성’을 든다. 또, 들뢰즈-가타리가 어려운 과학용어를 전문적 과학 담론의 영역 바깥에서 사용하면서도 “새로운 정의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 저자들은 상당히 많이 알긴 하지만 실은 피상적이며 자신들의 박학을 글 속에서 과시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적절해 보인다.” 그러면서 소칼과 브리크몽은 『지적 사기』에 인용한 것 이외에 들뢰즈-가타리가 자신들의 책에서 의사과학적 언어를 노출시킨 사례가 나오는 페이지를 친절하게 일러준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만 10군데가 넘는다. 그런데 『철학이란 무엇인가』에는 과학 용어의 남용에 대한 비판의 변론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철학이 근본적으로 자기와 동시대의 과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과학이 끊임없이 개념들의 가능성과 교차하기 때문이며, 또한 개념들이 필연적으로 과학에 대한 암시들을 함의하기 때문이지만, 그 암시들이란 결코 예증이나 응용 혹은 성찰 따위는 아니다.”

『천 개의 고원』(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은 부피로나, 담긴 내용으로나 무작정 읽어 나가기에는 참으로 아득한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방법에 관한 조언과 정보 세 가지를 들었으나 모두 신통치 않다. “제 2, 6, 8, 10, 12, 14편 정도가 쉽게 읽히고, 나머지는 좀 까다로울 것이라는” ‘역자 서문’의 사전 정보는 단지 참고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독자마다 느낌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고원은 어느 지점부터든 읽을 수 있”다는 저자들의 조언은 어느 정도 위안이 된다. 이진경 또한 “우직하게 처음부터 읽다가 지쳐서 뒤쪽에 있는 풍요로운 고원을 보지 못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가장 미련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풍요로운 고원으로 지목된 10, 12, 13장의 ‘표고’ 역시 엄청 높아 보인다.

그래도 10장에 나오는 보르헤스의 실패작 두 권에 대한 언급은 수긍이 간다. 들뢰즈-가타리는 『오욕의 세계사』와 『환상 동물학 사전』(아마도 한글판의 제목은 『상상동물 이야기』인 듯)을 보르헤스의 실패작으로 꼽는다. 『환상 동물학 사전』이 “신화를 잡다하고 싱거운 이미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리의 문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있으며, 인간에 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동물-되기 문제들을 모두 제거하고 있다”는 들뢰즈-가타리의 실패 원인 분석과는 별개로, 『상상동물 이야기』를 읽고 왠지 보르헤스답지 않다는 예전의 독후감이 떠올랐다.

 들뢰즈-가타리의 책이 못 오를 나무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천 개의 고원』은 이진경의 『노마디즘』(휴머니스트, 2002)과 함께 읽으면 소화가 가능하리라고 본다. 나는 『노마디즘』을 통해 이진경에 관한 해묵은 오해 하나를 풀었다. 나는 이진경의 해설서가 해설 대상이 되는 『천 개의 고원』보다 더 어려울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그 오해의 씨앗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군 제대 후 복학생 신분으로 이진경의 강연을 들은 일이 있다. 아내와 연애 시절 데이트를 겸해서 단과대 학생회인가, 총학회생인가 주최로 열린 초청강연이었다. 지금은 강연 주제도 생각나지 않지만 그날 나는 이진경의 강연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기억한다. 하지만 『노마디즘』은 그 강연보다는 한결 수월하게 읽힌다.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이진경 옮김, 동문선, 2001)는 이진경이 들뢰즈-가타리 입문서로 적극 추천하는 책이다. 역주에 붙은 개념 설명이 많은 보탬이 된다. 영토성, 탈영토화, 재영토화에 대한 설명을 보자.

“‘영토성’이란 원래 동물행동학에서 나오는 ‘텃세’라고 번역되는 개념이다. 가령 호랑이나 늑대?종달새 등은 분비물이나 다른 사물들?소리 등으로 자신의 영토를 만든다(영토화). 저자들은 이 개념을 변형시켜(일종의 ‘탈영토화’다) 다른 개념들을 만들어 낸다. 가령 ‘탈영토화’는 기왕의 어떤 영토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다른 것의 영토로 만들거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경우에 대해 ‘재영토화’라고 말한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소수적인 문학이란 소수적인 언어로 된 문학이라기보다는 다수적인 언어 안에서 만들어진 소수자의 문학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책이 어려운 것은 불가해한 번역 탓도 크다. 이진경은 한글판 『앙띠 오이디푸스』(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를 강하게 비판한다.

“국역본의 번역이 워낙 ‘개판’(!)이라-개념의 번역은 접어두고라도, 문장을 걸핏하면 빼먹거나 잘라 먹은데다, 편집도 가령 3장의 5절은 다른 절과 뒤섞여 있어서 원래는 11절까지 있어야 하는데 국역본은 10절까지만 있으며, 거기다 ‘역자 후기’라고 붙인 건 정말 가관입니다-읽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끝까지 읽는다면 혁명적 열정에 넘치면서 새로운 개념과 독창적인 발상으로 가득찬 ‘감동적인’ 책이란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이진경은 국역본과 번역본이라는 표현을 섞어 쓰는데, 사용빈도가 높은 국역본을 한글판이라고 한다면 들뢰즈-가타리 책의 낯설음이 약간은 완화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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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은 없는 『도서신문』의 재창간에 즈음해 시작한 해외 사상가 리뷰가 매체를 옮겨가며 100명을 돌파했다. 들뢰즈-가타리 편은 102번째 리뷰다.

2) 그럼에도 굳이 리뷰를 하는 것은 독자 서비스의 일환이다.

3) 프랑스의 대학입학 자격시험 바카롤레아에 응시하고자 하는 수험생을 위한 『철학사전』(엘리자베스 클레망 외 지음, 이정우 옮김, 동녘, 1996)의 들뢰즈 항목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들뢰즈는 가타리와 함께 또 때로는 혼자서 많은 영역에 걸쳐 ‘개념들의 생산’을 이루어 냈다. 특히 문학, 영화, 회화에 대한 저작은 기념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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