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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를 넘어서는 비전문가의 탁월한 성취

- 세계적인 '중간필자' C.W.세람의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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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考古學)은 그 명칭이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근대에 성립된 학문으로 18세기 중반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폐허가 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의 유적을 발굴한 J.J. 빙켈만에 의해 기틀이 다져졌다. 다만, 풍설로 전하는 샹폴리옹이나 슐리만 같은 고고학자들의 일화는 그들이 근대적 지식인임에도 옛날 이야기의 주인공인양 착각하게 한다.

그리고 먹고 사는 데 바쁜 평범한 사람들에게 고고학은 이름부터 고리타분한 자신들의 삶과는 무관한 학문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C.W. 세람은『낭만적인 고고학산책』(평단문화사, 1984년/ 대원사, 2000년)에서 고고학에 들씌워진 일반인의 고정관념에 시각교정을 유도한다.

"고고학은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지 그저 학문 중의 난해하고 독특한 전문 분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고고학에 몰두해 있을 때 전체로서의 인생사는 우리의 주제가 된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일시적인 사건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교차점에서 부단히 균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람은 책의 앞머리에서 "이 책의 목적은 고고학의 발전을 기술하는 것"이라며『낭만적인 고고학산책』이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지레짐작을 배제하고 고고학의 발전 과정을 기술하고 우리의 일상적인 지적활동에서 일어나는 질문들에 답하는 일이다. 세람은 이러한 작업을 빙켈만에서 미국의 고고학자인 에드워드 허버트 톰프슨에 이르는 18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고고학사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에 초점을 맞춰 수행했다. 투탕카멘 묘의 발굴을 고고학적 탐사 성공의 최고봉이자 고고학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급격한 전환점을 이룬다고 표현한 대목에서, 세람은 역사를 발굴한 "탐험가"들의 면면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드라마 속에서 주된 자료가 빙켈만과 수많은 체계 수립자들, 방법론자 및 전문가에 의해 마련되었다면, 서막에서의 커다란 사건들의 전개는 샹폴리옹과 그로테펜트, 롤린슨에 의해 얼기설기 짜 맞추어져 나갔다. 중장 부분에 들어가서 사건을 발전시키고 박수갈채를 받아낸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라리에트, 레프시우스, 피트리, 메소포타미아에서의 보타, 레어드, 유카탄에서의 스티븐스, 톰프슨 등이었다. 사건의 절정은 슐리만과 에번스가 각각 트로이와 크노소스에서, 콜데바이와 울리가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에서 발굴을 해냄으로써 이루어진다."

세람은『낭만적인 고고학산책』이 "고고학에서 이루어진 업적만을 언급한 개요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스스로를 낮춘 겸손의 표현이다. 고고학자의 생애를 압축하는 세람의 솜씨가 남다를 뿐더러 발굴 현장의 생생한 묘사도 빼어나다. 독자가 실황중계를 통해 발굴 광경을 직접 보는 듯하고 흥미진진한 내용의 전개는 읽는 재미를 배가한다. 여기에다 개별 인물에 대한 세람 나름의 평가가 더해져『낭만적인 고고학산책』은 사마천의『사기 열전』을 방불케 한다.

세람은 고고학의 시조인 빙켈만의 공과를 엄정하게 바라본다. 빙켈만이 "아주 조그만 실마리로부터 추리해 내는 데 보기 드문 재능을 보여 주었"지만 그의 생각에는 오류도 많았고 성급한 결론도 많았다고 지적한다. 특히 고대에 대한 빙켈만의 견해는 아주 이상화된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렇지만 세람은 고고학의 토대를 마련한 빙켈만의 공적을 잊지 않는다.

"빙켈만의 공로는 그때까지 철저하게 혼돈 상태에 있었던 것을 그의 능력의 한도 내에서 실제 지식을 근거로 한 추측으로 임시변통의 질서를 갖도록 한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체계적인 접근은 아주 오래된 문화를 시간의 심연으로부터 구해 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었다."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한 슐리만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동화로 간주하는 세람은 슐리만이 고고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 중에서도 경탄을 받을 만한 걸출한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또, 어학적 재능이 탁월한 데다 사업적 수완도 뛰어난 슐리만이 고고학에서도 성공을 거둔 까닭을 "누구에게나 조만간 찾아오는 운을 재빨리 잡는 방법을 터득한 소수의 사람에 속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슐리만은 과학적인 사고보다는 고대의 기록을 더 중요시했는데, 결과적으로 심사숙고하지 않은 것이 슐리만의 발굴 작업에 득이 되었다는 것이 세람의 시각이다. 세람에 따르면, "슐리만은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기는 했지만 거만하거나 남의 일을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좋아하고 신뢰하고 있는 사람에게 부당한 일이 가해졌을 때는 몹시 화를 내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이와 아울러 성공한 사업가였던 슐리만은 고고학 탐사에 전재산을 쏟아 부었지만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았다. 크레타 유적 발굴 때 유적지 땅 주인이 과도한 보상을 요구하자 슐리만은 발굴을 깨끗이 포기했다. 이에 대한 세람의 진술이 재미있다. "슐리만의 사업적 감각이 고고학적 열정을 처음으로 꺾었다."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 샹폴리옹에 대해서는 "이집트 기록의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사실상 코페르니쿠스와 같은 관점의 변화가, 즉 관습의 굴레를 깨뜨릴 영감이 필요했"는데 그런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을 유감없이 이끌어낸 천재로 본다. 그러나 세람이 탁월한 고고학적 발견에서 그것을 이룩한 인물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영웅주의적 시각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세람은 부단한 노력과 이를 통한 발상의 전환을 이룬 이에게 경의를 표한다.

"위대한 지적 발견들이 알맞게 적당한 때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것들은 한 가지 문제를 다루느라고 정신을 단련하는 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발견들을 통해 얻어진 결과이다. 그것들은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의 교차 그리고 계획적인 관철과 모험적인 꿈의 교차를 나타낸다. 단번에 해결을 보게 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이렇듯 지난한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 이뤄진 위대한 발견의 주인공 가운데 비전문가가 적지 않다는 것에 세람은 주목한다.

"학문의 역사를 통틀어 살펴보면 위대한 발견의 꽤 많은 수는 강박 관념에 쫓긴 독학자들, 즉 직업적인 훈련이라는 제동 장치도, 전문가들이 지닌 신호등도 없어서 전통적인 학문에 의해 생긴 장애물들을 쉽사리 뛰어넘을 수 있는 예술 애호가들, 아마추어들, 문외한들에 의해 이루어져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세람은 아마추어리즘이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 예로 오토 폰 게리케, 드니 파팽, 벤저민 프랭클린, 루이지 갈바니, 빌헬름 오스트발트, 요제프 폰 프라운호퍼, 마이클 패러데이 등을 들고 있지만 세람 자신도 성공한 문외한에 속한다. 세람이 1949년『낭만적인 고고학산책』을 출간할 때만 해도 그는 전문 고고학자가 아니었다. 세람이라는 이름도 가명이다. 본명이 Kurt W. Marek인 그는 이미 독일에서 신문기자, 출판인, 연극비평가로 명성을 쌓은 사람이었다.

『낭만적인 고고학산책』은 저자에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준 보기 드문 책이다. 이 책은 출간 20년 만에 26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독일에서만 1957년까지 70만 부가 팔렸다. 세계적인 석학 아놀드 토인비는 이 책과 세람의 업적을 격찬했다고 한다. 또, 이 책은 세람 개인에게는 고고학 연구자가 되는 길을 터주기도 했다.

이 책의 성공은 세람의 저널리스트로서의 경험과 도서관에서 천여 권의 책을 섭렵한 각고의 노력이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세람은 세계적인 '중간 필자'라고 하겠다. 세람의 역량은 한글판『낭만적인 고고학산책』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감히, 이 책을 20세기에 출간된 몇 안 되는 위대한 책 가운데 한 권으로 손꼽고 싶을 정도다. 충실한 본문 번역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싶고 한글판의 제목이 원래 제목보다 책의 내용을 더 잘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한글판의 제목이 혹시 일본어판의 제목에서 시사 받은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갖기도 했지만 그건 아닌 듯 싶다. 일본어판의 제목은 원제목을 직역한 『神, 墓, 學者』(1981년)이다.

그런데『낭만적인 고고학산책』이외의 번역된 세람의 책들은 함량이 약간 떨어지는 점이 아쉽다. 1955년 출간된『발굴과 해독』은(푸른역사, 1999년) 전작과 같은 형식에 기원전의 두 번째 천년에 오늘의 터키에 존재했던 고대의 최강대국 히타아트 유적 발굴 100년의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낭만적인 고고학산책』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관찰자의 시선을 견지하는 책의 앞부분은 여전히 공감을 얻을 만하고 설득력이 있다.

"황금보물과 왕들의 미라를 발굴한 자만이, 과거를 자신의 손으로 만지고 있다는 전광석화와 같은 감동을 경험하는 건 아니다. 그만한 전율은 구부린 채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는 사람도 느낄 수 있다. 그는 한 문장을 꼼꼼히 뜯어보다가 마침내 먼 옛날의 무덤에서 터져나오는 외침을 갑자기 듣게 된다."

하지만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밀도가 떨어지고 밋밋해지는 느낌이다. 그것은 아마도 세람이 『낭만적인 고고학산책』의 대성공에 힘입어 관찰자에서 고고학 발굴 참가자로, 문외한에서 전문 고고학자로 위상이 높아진 데서 오는 부작용으로 풀이된다. 세람은 1951년과 1953년 두 차례에 걸쳐 히타이트 유적 발굴단의 초청으로 발굴 현장을 답사한 바 있다.

『사진으로 보는 영화의 역사』(새물결, 1996년)는 고고학 산책을 영화에 적용한 책이다. "이 책의 의도는 최근 수십년 동안 수집한 엄청난 자료를 검토하여 영화의 전사(前史) 및 초기 역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책에 피력된 세람의 주된 관심사는 영화가 하나의 기술로서 탄생했다는 것인데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이 책의 내용은 영화의 산업적 체계가 움튼 1897년에서 마무리된다.

초창기의 영화와 관련된 진귀한 사진자료가 가득한 이 책이 아쉽게 다가오는 것은 한글판 제작의 미숙함 탓이 크다. 사진의 인쇄 상태가 그리 좋지 않고 편집도 엉성한 편이다. 전문용어 풀이를 위주로 한 200개의 각주는 독자를 위한 배려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사람 이름과 용어의 설명은 책의 말미에 따로 하는 게 더 나았을 성싶다.

그렇지만 가장 진한 아쉬움을 주는 세람의 후속작은 바로『예스터모로우』(평단문화사, 1988년/ 대원사, 1997년)이다. 세람의 단상을 엮은 이 책을 잔뜩 기대를 걸고 읽었으나 독후감은 아주 실망스럽다. 크게 미래관과 예술론으로 대별되는 책의 내용에서 기대 밖의 실망을 느끼게 하는 부분은 기술만능주의의 혐의가 짙은 앞날을 보는 세람의 시각이다.

1940년대 중반과 1950년대 후반에 세람이 쓴 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공학으로 대변되는 21세기 정보기술 사회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읽으며 그의 혜안에 감탄사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세람의 낙관론에는 정보기술 사회의 초입에 들어선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부작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나 반성적 통찰은 보이지 않는다.『낭만적인 고고학산책』에서 '파라오의 저주'는 "약간 소름이 끼치는 가벼운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며 일축한 세람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번역도 과연『낭만적인 고고학산책』을 번역한 동일인이 한 것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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