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나 환경이 우리의 운명을 미리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합된 이해를 향하는 길을" 추구한다. 반면, 생물학결정론자들은 환원론에 기댄다. "환원론은 어떤 전체를 구성하는 단위들이 그 단위를 포함하는 전체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는 주장이다. 즉, 단위들과 그들의 성질은 전체에 앞서 존재하고, 단위들로부터 전체에 다다르는 인과작용의 사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미국의 집단유전학자 리처드 르원틴의 책들에는 '유전자'로 표상되고 '사회생물학'으로 수렴되는 '생물학결정론'을 향한 비판적 인식이 관통하고 있다. 르원틴이 진화유전학자 스티븐 로우즈, 심리학자 레온 J. 카민과 공저한『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한울, 1993년)는 생물학결정론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판서로 정평이 난 책이다. 이 책에는 공저의 방식이 따로 드러나 있지 않아 어느 대목을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다른 학자가 집필한 내용 역시 르원틴의 주장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다. 생물학결정론을 비판하는 세 공저자의 견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에 이중의 과제를 부여한다. "생물학결정론의 기원과 사회적 기능을 설명하는 것"이 그 하나고, "평등, 계급, 인종, 성, '정신병'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의 본성과 한계들에 관한 주장들이 갖는 공허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폭로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 이러한 두 겹의 과제는 다시 말해 "생물학결정론의 '인간의 본성이 갖는 본성'에 관한 주장들에 대한 연구를 의미한다." 또한, 저자들은 맹목적 비판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신들이 취하는 입장을 명백히 한다.
우선, 르원틴을 비롯한 저자들은 변증법의 관점에서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통합된 이해를 향하는 길을" 추구한다. 반면, 생물학결정론자들은 환원론에 기댄다. "환원론은 어떤 전체를 구성하는 단위들이 그 단위를 포함하는 전체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는 주장이다. 즉, 단위들과 그들의 성질은 전체에 앞서 존재하고, 단위들로부터 전체에 다다르는 인과작용의 사슬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저자들은 생물학결정론을 반대하는 비판가들이 생물학결정론자들의 결론만을 싫어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상황도 짚고 넘어간다. 저자들은 생물학결정론에 담긴 정치적 함의뿐만 아니라, 생물학결정론이 과학(생물학)으로서도 근본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고 강조한다. 사회는 구성원 개인의 성향에 따라 좌우되고, 개인의 운명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생물학결정론이 '나쁜 과학'은 아닐지 몰라도 '후퇴적 과학'이거나 '무비판적 과학' 또는 "물리학과 분자생물학과 같은 '하드 사이언스'에 반하는 것으로의 '소프트 사이언스'"라는 것이다.
르원틴을 포함한 저자들은 생물학결정론이 자연과학의 본령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과 행동과학에 더 가깝다고 본다. 생물학결정론의 과학적 엄밀성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저자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제시한 생물학결정론의 핵심 명제에는 그런 혐의가 없지 않아 보인다. 다음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생물학결정론 명제의 일부다.
"사회적 현상은 개인들의 행동의 총합이다."
"이들의 행동을 대상으로서 다룰 수 있다. 즉, 특수한 개인들의 뇌 속에서 위치하는 성질들로서 구체화할 수 있다."
"구체화된 성질들은 어떤 종류의 척도로 측정될 수 있고, 따라서 개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양에 따라서 서열이 매겨질 수 있다."
"성질들에 대한 개체군의 기준이 수립될 수 있다. 표준으로부터의 어떤 개인의 편차들은 그 개인이 치료받아야 할 의학적 문제들을 반영할 수 있는 이상(異常)들이다."
생물학결정론의 기본 명제는 사회적 불평등의 논리적 근거로 활용되는 IQ검사에 관한 여섯 가지 명제로 둔갑하기도 한다.
"1. 지위, 부, 권력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2. 이 차이는 상이한 본질적 능력, 특히 상이한 '지능'의 결과이다.
3. IQ검사는 이 본질적인 능력을 측정하는 수단이다.
4. 지능 차이는 주로 개인들 사이의 유전적 차이의 결과이다.
5. 지능 차이는 유전적 차이의 결과이기 때문에, 능력 차이는 고정된 것이고 변화불가능하다.
6. 개인들 사이의 대부분의 능력 차이는 유전적인 것이기 때문에, 인종과 계급 사이의 차이들은 또한 유전적이고 변화불가능하다."
르원틴을 위시한『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저자들은 한 장을 할애해 위의 명제를 비롯한 IQ검사의 전제들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우선, 프랑스에서 고안된 IQ검사는 창안자의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영국과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그 의도가 심각하게 변질됐다는 것이다. 1905년 알프레드 비네가 지능검사에 대한 저술을 펴낸 것은 파리에서 정규 공공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확인하기 위한 간단한 검사 절차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의 수입자들은 IQ검사가 "유전적 계승에 의해 고정된, 천성적인 그리고 변화불가능한 양을 측정한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르원틴과 그의 동료들은 "IQ검사는 지능에 대한 어떠한 일반 이론의 원리들로부터 고안된 것이 아니며 이어 사회적 성공에 대한 독자적인 예측자임이 보여진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또 "IQ검사들은 학업 성취와 상호관련시키기 위해 경험적으로 꿰어맞추고 표준화한 것이며, 그 검사들이 '지능'을 측정한다는 관념은 그 검사들을 타당케 하는 독립적 정당화와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와 아울러 IQ검사의 유전가능성과 고정성에 관한 연구들은 다소 심각한 방법론상의 문제들을 지녔다고 덧붙인다. "이들을 사용하면 어떤 긍정적 결론에도 도달할 수 없다. 핵심은 그 연구들이 종족들 사이의 어떤 유전적 정체성을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 연구들이 확실히 입증해 주지 않으며, IQ기록에서 어떤 유전적 차이에 대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르원틴, 로우즈, 카민, 이 세 사람은 환경요인을 앞세우는 문화환원론에도 비판적 시각을 겨눈다. 그들에게 문화환원론과 생물학결정론은 양 극단에 있는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우리 유전자 안에 없다』의 저자들은 극단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언한다. "우리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생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통합을 요구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프란츠 부케티츠의 『사회생물학 논쟁』(사이언스북스, 1999년)은 유전자와 문화 가운데 어떤 것이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하는가에 대한 논란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 르원틴은 여러 차례 언급된다.
르원틴의 한글판 단독저서 두 권은 강연을 기초로 한다. 두 권은 내용도 엇비슷하다.『우리 유전자에 없다』와 마찬가지로 생물학결정론을 대표하는 에드워드 윌슨의『사회생물학』(민음사, 1992년)과 리처드 도킨스의『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 1993년)를 염두에 두고 생물학결정론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강연 매체와 방식에 따라 난이도가 있다는 것이 두 권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라디오 강연을 그대로 살린『DNA독트린』(궁리, 2001년)은 쉽게 읽힌다. 생물학적 결정론이 사회적 불평등의 정당성과 고정불변함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어떻게 쓰이는지 고찰하고 있다.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반대를 잠재우기 위해 우리들 사이의 차이가 우리 유전자 안에 있으며, 우리 모두 사이에 타고난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생물학적 이론이 개발되었다."
20세기에 평균 수명이 늘어난 까닭, '작인'과 '원인'의 구별, 그리고 환경운동을 보는 르원틴의 독특한 관점이 눈길을 끈다. 르원틴은 유아 사망률의 급격한 감소가 평균 기대 수명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해석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19세기 미국의 유아사망률과 묘비에 새겨진 죽은 이의 생존기간을 대비시킨다. 1860년대의 유아사망률은 13퍼센트에 이르렀지만, 19세기 중엽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묘비는 그들 중 많은 숫자가 괄목할 정도로 아주 오래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르원틴은 과학적 의학은 이미 성년에 도달한 사람들의 수명 연장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기도 하는데, '작인'과 '원인'을 혼동해 의학의 발달로 수명이 늘어난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다. 환경운동을 보는 르원틴의 시각은 묵시록적이기까지 하다.
"모든 이성적인 환경운동은 환경이 보존되는 조화롭고 균형 있는 세계에 대한, 실제로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데올로기적이고 낭만적인 집착을 포기하고, 조속히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문제로 주의를 돌려야 할 것이다. 그 물음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 사람들은 그런 삶을 어떤 방식으로 이루는가?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공유할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파괴적인 특성이 아니라 세계에 일어난 변화를 계획할 수 있는 특성이다. 환경운동은 세계의 변화를 정지시킬 수 없으며 적절한 사회적 조직과 제도를 통해 그러한 변화를 좀더 유익한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인류의 멸종을 수 백년 정도 연기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밀란에서 행한 이탈리아 강좌의 강연문을 엮은『3중 나선』(잉걸, 2001년)의 내용은 다소 전문적이다. 예컨대 "진화는 [생명체 내부에 정보를 품은 채로 접혀있던 것의] 펼침이 아니라, 가능성의 여지를 통해 역사적으로 우연히 발생한 방랑길이다"라는 표현이 그렇다. 본문에 들어 있는 도표와 그림도 전문성을 부각시키지만 그렇다고 난해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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