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출어람의 범죄 수사 드라마 - 〈NCIS〉
캐릭터 하나하나와 잘 조화를 이루는 〈NCIS〉의 유머 감각은 약간 넘치고 실없는 듯하면서도 수사 드라마의 첨예한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풀어줍니다.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내내 파안대소하고 낄낄거려야만 할 정도로 제대로 웃긴 드라마가 〈NCIS〉랍니다.
미국 드라마에 넘치고 차는 수사물에 새로운 작품을 하나 더 보태보기로 가정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쳐봅시다. 수사물의 전통이야 미국 드라마에서 오래전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CSI〉에서부터는 과학 수사기법을 등장시키는 드라마의 인기가 폭발하여 이제는 가히 포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설정은 현실에서나 드라마에서나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 화려한 과학 수사를 도입하는 것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반면에 한 에피소드에 두어 가지 사건을 교차 편집하면서 파노라마적인 속도감을 이루어냈던 〈CSI〉 들과는 달리, 한 가지 사건만을 쫓되 밀도와 스케일은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갔으면 하고요.
〈CSI〉나 〈Without a Trace〉처럼 쫓고 쫓기는 두뇌 싸움이 등장하면서도, 수사관들이 실험실을 벗어나 현장에서 한층 박진감 넘치고 풍부한 액션신을 연출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24〉가 자꾸 근질거리는데요. 첩보 위성 정도의 기술력을 동원해야 할 만큼이라면 다루는 사건의 규모도 상당해지겠지요? 민간인 범죄는 〈CSI〉 등이 열심히 잘 해내고 있으니까, 같은 화려한 과학 수사를 배경으로 하되 이번에는 좀더 크고 복잡한 음모를 파헤쳐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러자면 딱 적당한 무대는 군대쯤이 좋겠네요. 이왕 군대로 간 김에 항공모함이나 핵잠수함 등을 거느리면서, 현대의 군대에서도 가장 큰 축을 담당하는 해군으로 밀어붙여 보기로 하죠.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경찰에서부터, FBI, CIA, NSA와 같은 연방기관을 난립시켜서, 온갖 법 집행기관의 치열한 힘겨루기나 음모이론으로 머리에 기름칠을 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무대와 소재가 해군이고, 음모이론을 다루니까 진실을 파헤치는 주인공으로는 늘 “셈퍼 파이Semper Fi”(‘항상 충실한’이라는 뜻의 미국 해병대 표어)를 외치는 해병대 출신 정도면 적당할까요? 한국에서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다가 가끔 발견하는 해병대 전우회의 컨테이너 사무실은 조금 삭막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명분 따지기 전에 진득한 동료애를 표현하기에는 해병만 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아, 내친김에 〈앨리어스〉처럼 눈부신 컴퓨터 테크놀로지를 등장시켜 보면 어떨까요? 해킹은 기본이고, 밥풀보다 작은 도청기, 열추적 감지기 등 현장 수사에 힘을 배가해 주는 각종 장치도 눈요기가 될 것 같습니다. 현실의 사건을 다루면서도, 현실의 기술력과는 조금 동떨어졌다 싶은 황당무계한 장치는 드라마를 좀더 재미있게 즐기자는 취지에서 너그럽게 눈 감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고요. 주요 배역은 법의학 과학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CSI〉시리즈와 차별을 두기 위해서, 전문 수사관들과 과학자들을 적절히 뒤섞어 보겠습니다. 보스 역은 해병대 출신이지만 지혜롭고, 지혜롭되 너무 먹물 티는 나지 않는 게 좋겠지요. 아랫사람들이 군소리 없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강력한 카리스마는 기본이고요.
원톱 액션 드라마는 〈24〉의 잭 바우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가 꽉 잡고 있고, 남녀 한 쌍의 파트너 시스템은 〈엑스 파일〉의 멀더와 스컬리 캐릭터의 잔향이 너무도 짙게 남아 있는지라, 그런 부분에서의 벤치마킹은 피했으면 합니다. 뺄 거 빼니 역시 〈CSI〉 정도의 시스템 구성밖에 남지 않네요. 카리스마 넘치는 보스 밑으로 남자 둘에 여자 하나 정도의 현장 수사관 팀을 구성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것도 이제는 닳고 닳은 구도지만, 잘만 짜낸다면 아쉬울 게 없겠지요. 남자 둘은 성격과 태도가 좀 많이 다르면서도 붙여놓으면 코믹하게 썩 어울리는 조합이 좋을 듯합니다. 촌스럽거나 세련됐거나, 혹은 마초적이거나 페미닌하거나 요렇게요.
여자 수사관 역을 설정할 때는 〈Without a Trace〉의 잭 반장과 사만다처럼 애틋한 동료애가 좀 그려졌으면 싶네요. 〈CSI〉에서의 길 그리섬 반장과 브래스 경감과 같은 개그 콤비도 새롭게 변주하고, 〈CSI 마이애미〉에서 시체에 말을 걸던 여성 검시관 알렉스와 〈CSI〉의 귀염둥이 그렉도 분위기는 빌려오되 성별을 바꾸는 센스 정도로 참조하는 게 적당할 것 같고요. 이 정도면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진 듯싶습니다.
위의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수사 액션물을 제작하려면, 보통의 내공과 집중력으로는 어림도 없겠군요. 자칫하다가는 맛나는 것만 쏙쏙 골라 먹게 되어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종합선물 세트가 되기 십상이니까요. 하지만 비틀즈에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음악 코드는 다 고갈됐다는 어떤 이의 말을 사실이라고 믿고, 그것을 영화나 드라마에도 적용해 본다면, 이제 도전이 되는 것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창조성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청출어람을 이루어낼 수 있느냐가 될 수도 있겠지요.
시리즈 드라마를 보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어쩌면 좀 시간낭비다 싶게 재미가 덜한데도, 드라마라는 것은 한번 보기 시작하면 어지간해서는 중간에 끊기가 어렵습니다. 시행착오라는 것도 있지만 한번 시행착오에 시간이 적지 않게 들다 보니, 다음에 무엇을 볼지 결정하는 데 점점 더 신중해져 가기만 합니다. 더욱이 비슷한 장르에서 아주 걸출한 작품을 만났다면, 다음에는 적어도 그 정도는 되거나 더 재미있는 것을 만나야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고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만족감을 주는 드라마가 미 연방 해군수사관들의 이야기를 다룬 〈NCIS〉입니다. 상상을 가장하고 위에서 설명 드린 것이 〈NCIS〉의 주요 골격이랍니다. 거기에 꼭 덧붙여야 할 것이 유머지요. 어느 분은 〈NCIS〉를 수사물을 가장한 시트콤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여기저기서 끌어온 요소를 적절하게 뒤섞는 것에 색다른 양념 하나를 제대로 첨가해 주는 것이 관건이라면, 이 드라마에서 그 색다른 양념 하나는 유머입니다. 사실 〈CSI〉나 〈보스턴 리갈〉처럼 고급스럽거나 세련된 유머는 아닙니다. 하지만 캐릭터 하나하나와 잘 조화를 이루는 〈NCIS〉의 유머 감각은 약간 넘치고 실없는 듯하면서도 수사 드라마의 첨예한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풀어줍니다.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내내 파안대소하고 낄낄거려야만 할 정도로 제대로 웃긴 드라마가 〈NCIS〉랍니다.
〈NCIS〉의 팀은 군법무관들의 이야기를 그린 〈JAG〉 여덟 번째 시즌의 막바지에 등장하면서 시리즈의 시작을 알립니다. 캐스팅과 제작진을 보면 〈JAG〉의 스핀오프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성격과 구성은〈CSI〉의 스핀오프 시리즈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JAG〉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다지 힘도 없고 캐릭터도 엉성하다 싶던 것이, 4개월 정도가 지나고 파일럿 에피소드를 방영했을 때는 거의 다른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확 바뀐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니다 싶은 것은 과감하게 내치고, 가능성이 보이는 상황과 장치는 정교하게 다듬은 후, 될성부른 떡잎만 물 붓고 비료 쳐서 모양새를 한껏 내어 보무도 당당하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드라마는 첫 번째 시즌이 방영될 당시에는 ‘미 해군 범죄 수사대’의 약자인 NCIS라는 조직 자체가 생소하기도 했고, 같은 방송국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CSI〉 시리즈와 혼동할 우려도 있고 해서, 해군을 강조한 “Navy NCIS”라는 타이틀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추진력과 인기로 첫 번째 시즌을 성공리에 마친 후에는 ‘Navy’라는 수식어를 떼어내도 될 만큼이 되었습니다. NCIS라는 기관도 이제 알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조직이 되었고요. 아슬아슬하게 오리지널리티를 잡아내며, 아류라는 딱지를 떨어낼 수 있는 힘을 확실히 다진 것은 물론입니다. 이제는 〈CSI〉, 〈Without a Trace〉와 더불어, CBS 수사물의 원투쓰리 펀치라고 감히 말씀드리렵니다.
그나저나 2003년도에 시작된 〈NCIS〉의 첫 번째 시즌에는 2004년에 첫 시즌을 시작한 〈로스트〉의 출연진들이 조연으로 유별나게 많이 등장합니다. 〈로스트〉의 고정 캐스트인 클레어, 소이어, 로크와 심지어는 ‘저쪽 사람들’인 이든까지 나오지요. 로크야 그전에도 여러 작품에 등장했지만, 나머지 셋은 꽤 낯선 편이었습니다.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그렇게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도, 좀 실없지만 뿌리치기 어려운 재미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