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 〈식스 핏 언더〉
〈식스 핏 언더〉는 죽음을 일상적으로 다루면서도 비교적 잔잔하게 극을 조율해 나갑니다. 파일럿 에피소드에서 설정된 너새니얼 피셔의 교통사고 장면을 빼고는 비명을 내지를 만큼 압도적인 카메라 워크 하나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수사물이나 액션 드라마 혹은 최근 들어 급속하게 장르화하고 있는 “영매” 드라마 등에는 매회 죽음이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들에서도 죽음 자체는 주제가 아닙니다. 죽음을 주제로 기나긴 시리즈를 이어가는 드라마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될 듯합니다. 가족 멜로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장르에 블랙 코미디로 악센트를 준 후 전격적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드라마의 전 영역에 채택한 파격이 하나 있으니, 바로 HBO의 〈식스 핏 언더Six Feet Under〉입니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의 각본을 쓴 알란 볼이 일약 할리우드의 총아로 떠오르면서 제작에 나선 드라마지요.
제목의 ‘식스 핏’은 봉분을 거의 두르지 않고 매장을 하는 미국 장례문화에서 관을 묻기 위해 땅을 파는 깊이라고 합니다. ‘왜 6피트냐?’라는 의문은, 그 이하면 곰이 냄새를 맡고 시신을 파헤칠 수 있다느니, 성인 남녀의 평균 신장을 조금 웃도는 높이가 사후세계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망자에 대한 배려라느니 하는 등의 잡학전서적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따져 봐도 드라마의 흐름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사전 정보에 불과할 뿐이니, 그냥 ‘파이브’, ‘세븐’보다는 발음하기 편해서 그러지 않았겠느냐 정도로 얼버무릴 수도 있을 듯합니다. 사실 서구의 매장 문화에서 그보다 더 궁금한 점은 땅속에 관을 버튼 하나로 스르르 내리는 방식입니다.
여하튼 제목에서부터 상당히 노골적으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 작품은 미국 드라마 “작가주의(자들)”의 든든한 ‘빽’이자, 스크린쿼터라고나 할까, 그런 역할을 하는 HBO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당시에 제아무리 잘 나가던 알란 볼이라도 밀어붙이기 어려웠다 싶은 드라마입니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무대 또한 노골적으로, 장의사 가족이 먹고 자는 장례식장입니다. 한국에도 자영 장례업자들이 있지만, 사업 장소 위층에 버젓이 살림을 차려놓은 곳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작년까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동네마다 몇 개씩 있는 “가정집형” 장례식장을 보고 낯선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전에 영화 〈마이 걸〉을 보고 ‘미국에는 장례식을 저런 식으로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지하에 방부처리와 복원작업을 기다리고 있는 시신이 있는데, 위에는 가정집을 꾸미고 산다는 것은 아무리 적게 쳐도 으스스한 기분이 들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아직도 왜 미국의 많은 장례업자가 집을 사업처로(혹은 사업처를 집으로) 삼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먹구구식으로 해석하자면, 죽음은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것 중 하나라고 해도 동시에 인생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 중 하나니까, 장례식장 위에 장의사의 살림집이 있다 한들 어떠하며, 그것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위안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집에 식솔로 딸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무엇이든 직업적으로 하면 내성이 생기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어떠한 사연도, 아무리 처참한 시신도 내성에 프로페셔널리즘을 보태어 의지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이면, 생계를 위해 하는 여느 일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프로페셔널리즘은 견지하되, 직업에 대한 내성은 이미 갖추었으되, 죽음이 주는 의문은 누구보다 뻔히 알면서도 극복하지 못하고, 마조히스트가 되기를 자처하는 장의사들의 이야기는 어떠한가요.
피셔 장례식장의 주인이었던 너새니얼 피셔의 죽음은 피셔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죽은 너새니얼이 아내나 자식들에게 딱히 억압적이었던 것도 아닌데, 사실은 자기도 답답해서 살아생전에 별별 비밀을 다 만들며 숨통을 풀고 다녔는데, 그의 죽음으로 이 가족의 연대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그가 죽기 전에는, 둘째 아들 데이빗은 자기가 게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어영부영 또래에 휩쓸려 다녔던 막내딸 클레어는 별반 삶의 목적이라고는 딱히 찾아볼 수 없는 전형적인 미국의 불만투성이 십대에 불과했으며, 세 자녀의 어머니인 루스 피셔는 한가하지만 답답한 전업주부의 전형에 더도 덜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열일곱 살에 집을 떠난 큰아들 네이트는 진정한 사랑을 만난 적이 없는 피셔가의 이방인이었습니다. 드라마는 큰아들 네이트가 인생의 서른다섯 번째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집으로 향하고, 아버지 너새니얼이 버스에 치여 죽으면서 시작됩니다.
〈식스 핏 언더〉는 죽음을 일상적으로 다루면서도 비교적 잔잔하게 극을 조율해 나갑니다. 파일럿 에피소드에서 설정된 너새니얼 피셔의 교통사고 장면을 빼고는 비명을 내지를 만큼 압도적인 카메라 워크 하나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드라마는 시종일관 아버지의 죽음을 맞아 자의로 타의로 변화해 갈 수밖에 없는 피셔가의 내면을 그리는 것에만 몰입합니다. 간혹 상식을 깨는 설정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이 등장하곤 하지만 그저 장치에 불과할 뿐, 이내 카메라의 시선은 화이트 디졸브(white dissolve)와 함께 피셔가의 일상으로 이동합니다.
심지어 〈식스 핏 언더〉에는 장례식과 더불어 에피소드 하나를 깔끔하게 마무리해주는 미덕조차 없을 뿐더러, 요즘 드라마에서 짓궂다 싶은 만큼 악의적으로 반복되는 그 흔한 클리프행어 엔딩조차 없습니다. 쉽게 갈 수 있는 숱한 대중적 장치를 마다하고 외곬으로 일관하는 이 드라마를 보고 있자면 작가주의의 면죄부는 어디까지일까 싶은 위태위태함이 드리워지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미국 드라마에서 십대들의 방을 비출 때면, 이 드라마의 포스터가 종종 등장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이승의 삶을 다한 사람이 물러나지 않고, 살아남은 자의 내면을 그리기 위해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런 판타지적 요소가 이 드라마의 스타일을 강화하면서, 마니아층을 낳는 것이겠지요.
알란 볼이 〈아메리칸 뷰티〉의 성공에 이어 곧바로 도전한 드라마 〈식스 핏 언더〉. 사실 저는 상도 남부럽지 않게 많이 받고 흥행도 한 〈아메리칸 뷰티〉를 보면서,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크나큰 감흥은 얻지 못했습니다. 특히 새로운 형식의 참신한 블랙 코미디라는 평가에서, 그 참신함이라는 말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조금 불편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사람이 박수를 쳐주는 작품이 있으면, 으레 같이 따라 박수를 치는 저로서는 이를테면 좀 별난 경험이었습니다.
〈식스 핏 언더〉가 꿋꿋하게 다섯 시즌을 엮어가며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칸 뷰티〉에서는 이야기의 끝이었던 해체된 가족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설정한 것과 더불어, 미국 드라마로서는 보기 드물게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강하게 폭발시키면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가는 점인 듯합니다. 〈식스 핏 언더〉가 정말로 특이한 점은 종종 등장하는 판타지적 장치라기보다는 바로 그 점인 것 같습니다. 미국 드라마는 캐릭터가 감정의 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거의 악덕이라고 여기지 않나 싶을 만큼 극도로 자제하는 문화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식스 핏 언더〉는 마치 축제라도 벌이듯 인물들이 겪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분방하게 분출합니다. 그래서 장례식은 산 자를 위한 것이며, 어떤 소설은 축제라고 표현했던가요. 그러면서 장편 드라마답게 캐릭터에 귀여운 요소를 입히면서 정감을 붙이는 것도 힘이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함부로 대한다는 “발 닦게 이슈”가 있는 데이빗과, 남편이 죽은 후 부족했던 자식들의 사랑을 원망하며, 그리고 한편으로는 연애사업도 만끽하며 사랑을 주는 만큼 받지 못하여 늘 울분에 차 있는 귀엽고 고운 피셔가의 엄마 루스, 피셔가의 사람으로서는 감정에 가장 개방적이며 남을 돕고 싶어하는 마음과 자신의 행복을 지키고 싶은 마음, 뒤늦게 빠진 사랑의 수수께끼에 천진하게 괴로워하는 큰아들 네이트, 막 나가는 십대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어 사랑스러움을 멋지게 되찾아나가는 막내 클레어가 일구어가는 피셔가의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미국에서는 〈식스 핏 언더〉가 방영되면서 장의사 지망생들이 크게 늘어났다는 뒷이야기도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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