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노현정 아나운서가 출간한 에세이집 『노현정의 황금유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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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민병국의 <가능한 변화들>이 생각납니다.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에요. 반대로 2시간 동안 몸을 비비꼬면서 고통스럽게 봤지요.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 자체에는 특별히 반대하고 싶지 않았어요. 성추행범과 구차스럽기 짝이 없는 지식인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이 영화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만큼 알죠. 그게 얼마나 사실과 가까운지도 알고. 하지만 왜 내가 이걸 영화관에서 일부러 찾아 봐야 하는 건데? 저런 인간들이 세상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보고 있자니 자꾸 반감이 들더란 말이죠. 노골적인 자기 경멸과 자기학대로 짜여진 이 이야기가 오히려 자기 과시처럼 보이더란 말이에요.
어떤 때는 자기 폭로나 고백 자체가 공해가 되는 수가 있어요. 그 양이 엄청나게 많을 때는 말이죠. 전 아주 새로운 접근법을 취하지 않는 한 인문학도 지식인 남성들의 불쾌한 넋두리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데, 이미 그들은 그 숫자만으로 하나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유행이었고 지금도 시들 구석이 없는 조폭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영화들 중 전적으로 조폭이라는 대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작품들은 없거나 적죠. 아무리 폼을 잡아도 그들은 결국 희화화되거나 자기가 휘두르던 폭력의 함정에 빠집니다. 하지만 내용이 어떻건, 그들이 너무 많다는 것 자체는 달라지지 않아요. 조폭들은 그들의 가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이 언급되고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며 그러는 동안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문화에 필요 이상의 범위를 차지합니다. 이럴 때는 말 하는 것 자체가 공해예요.
여기서, 따로 따로 보면 전혀 연결되지 않을 이야깃거리를 하나 더 끌어와 보죠. 바로 노현정 아나운서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결혼이야 개인사이니 제가 여기서 할 말은 별로 없죠. 그냥 잘 살고 일이나 그만 두지 말라고 하는 수밖에. 뉴스야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겠지만, [상상플러스]나 [스타 골든벨]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의 전적으로 그 사람이 지난 1,2년 동안 만든 개성에 의해 지탱되는 프로그램들인데. 하여간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이죠.
그러나 수다는 멈추지를 않습니다. 주인공이 아나운서이고 결혼상대자가 현대가 출신이니, 재벌과 아나운서 그 밖의 기타 등등에 대한 온갖 루머들이 떠돕니다. 심지어 당사자가 입도 뻥끗하기 전에 (이 글이 실릴 무렵엔 공식 발표가 있겠군요) 그 사람들의 미래를 미리 결정해버린 뉴스들이 쏟아져 버리죠. 그럼 또 거기에 흥분하거나 열 받거나 부러워하거나 기타 등등 뻔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또 뻔한 수다를 떨고요.
지겨워요. 세상이 아침연속극처럼 뻔한 곳인 건 알지만 이렇게 작정하고 더 뻔한 구도로 몰고 갈 필요는 없는 건데. 결국 이 역시 하나의 소재에 대한 말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거든요. 이런 수다를 떨면서 우린 그들이 꼭 필요해하지도 않은 권력을 대상에게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결과를 보고 또 흥분해서 떠드는 거죠. 참으로 매저키스틱한 악취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스스로 삽을 들고 땅을 파면서 자길 낮추는 거죠. 도대체 뭣 하러?
여기에 대해서는 인터넷 환경을 비난하고 싶기도 합니다. 최근 포털 사이트의 대문은 거의 공해 수준이에요. 예전 같으면 이런 잡다한 뉴스는 지하철에서 사보는 스포츠 신문에서만 1면으로 다루었죠. 요샌 이런 게 일반 신문 1면으로 옮겨간 것이나 다름없어요. 그것도 마치 비행기 추락 기사라도 되는 양 초단위로 업데이트 되고 있죠. 사람들은 거기에 또 중독 되어 죽어라 그것들을 클릭하고 프로그램된 로봇 양처럼 뻔한 반응을 보이는 거죠. 이 과정엔 뇌세포도 필요하지 않아요. 이 모든 건 막 컴퓨터를 배운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알고리듬에 의해 순환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포탈 사이트를 비난하고 싶어도 진짜 책임은 우리에게 있죠. 해결책도 우리에게 있고요. 그냥 필요 이상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이야기는 진짜 할 거리가 생긴 뒤에 해도 늦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