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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신> 시사회를 다녀오고 든 생각

극장 순수주의자들은 관객들의 교류나 필름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예의 없는 관객들과 같이 보는 것보다는 혼자 보는 것이 낫고 디지털 매체가 필름의 질을 따라잡는 날도 곧 올 겁니다. 언젠가 관객들이 영화관이냐, 집이냐를 두고 가볍게 선택할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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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도 <분홍신> 시사회에 갔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악명 높은 실랑이도 목격했죠. 몇 개월 동안 열심히 영화를 만들어 첫 공개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일이 생겼으니 감독이나 배우들은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나중에 몇몇 기사들도 읽고 보다 가까운 곳에서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는데, 솔직히 어느 쪽을 두둔할 생각이 들지 않는군요. 기자라는 사람이 불꺼진 영화관에서 노트북을 켜서는 안 된다는 걸 몰랐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그걸 제지한답시고 평론가 양반이라는 사람이 택한 대응도 참... 그래서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둘 중 어느 한 사람만 상식적으로 굴었어도 이런 소동은 없었어요.

<분홍신> 시사회에서 예의 없는 사람들은 그네들 둘 뿐만은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제 근처에 앉았던 어떤 남자도 무례함의 수준이 상식의 정도를 넘어섰더군요. 배우들과 감독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앉아서 “쟤, 실제로 보니 글래머도 아니지?”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지 않나. 극적인 장면에 키들키들 소리 내며 분위기를 깨지 않나. 결국 참지 못한 옆 사람이 주의를 주자 간신히 조용해지더군요.

  이게 나름대로 정선된 관객들이 모였어야 마땅한 언론 시사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물론 이런 데 오는 사람들의 에티켓 수준이 일반 관객들보다 특별히 높다고 믿을 근거는 없어요. 정말로 그들이 어느 정도 수준이 높다고 해도 꼭 그들만 시사회를 찾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나 그걸 고려한다고 해도 참 한심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예요.

  여기서 대한민국 국민 일반의 무례함으로 주제로 돌리는 건 쉬운 일입니다. 전 나름대로의 설명과 그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도 가지고 있어요. 전 노인네들이 강화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예절 교육이야 말로 이런 무례함의 진짜 원흉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상하의 규율을 중요시하는 예전의 예절 논리에 생각 없이 충실하다보면 각 사회 구성원의 평등한 관계와 공공의 안락을 중요시하는 현대식 공중도덕의 논리에 둔해질 수밖에 없다구요. 진짜로 도덕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노인네들의 규칙을 암송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 규칙의 논리를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주체성을 갖추고 있어야 해요.

  그러나 그건 오늘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오늘 조금 더 현실적이 되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자, 여기 저의 욕구가 있습니다. 좋은 영화를 시설 좋은 극장 안에서 예절 바르고 영화를 잘 이해하는 관객들과 만족스러운 교류를 나누며 감상하고 싶다는 것이죠. 과연 이건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는 걸까요?

  일단 영화는 제가 고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전에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도 어느 정도 운이 따르는 일이긴 합니다. 그래도 일 때문에 영화들을 보다보니, 점점 기대치가 정확해졌습니다. 극장은? 멀쩡하게 새로 지은 건물이면서 기초적인 화면비도 제대로 못 지키는 대한극장처럼 괴상한 곳도 있지만 썩 좋은 곳들도 몇 군데 있습니다. 이곳저곳 꾸준히 돌아다니며 극장 정보들을 얻는다면 보고나서 ‘당했다!’라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저 같이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느라 극장을 고를 수 없는 경우에도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면 최악의 사태 정도는 막을 수 있습니다. 와이드스크린 영화의 시사회라면 대한극장이나 서울극장 2관, 중앙극장1관과 같은 곳은 일단 피하는 식이죠.

  하지만 세 번째는 대책이 없습니다. 전용극장이나 시네마테크에서 상영하는 소위 예술 영화인 경우, 어느 정도 선정은 가능합니다. 그런 경우 정말로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오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영화가 감상의 대상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데이트 코스의 일부이기도 하고 시간 죽이기용 수단이기도 하고, 잠자리이기도 하죠. <우주전쟁> 같은 영화를 보면서 모든 관객들이 조용한 정신적 교류를 나누길 바랄 수는 없어요. 물론 원래부터 그렇게까지 높지 않은 그네들의 예절 수준이 영화관에 들어온다고 바뀔 거라고 믿을 수도 없는 겁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 있습니다. 기계들은 빨리 진화하지만 사람들은 아니라는 거죠. 이 경우도 변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기계들을 믿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홈시어터가 발전한 속도를 보세요. 아직은 진짜 극장의 포만감은 주지 못하지만 지금의 기기들도 썩 쓸 만합니다. 적어도 잘만 시스템을 관리한다면 음향은 시시한 시내 극장보다 나은 경우가 많죠. 극장 순수주의자들은 관객들의 교류나 필름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예의 없는 관객들과 같이 보는 것보다는 혼자 보는 것이 낫고 디지털 매체가 필름의 질을 따라잡는 날도 곧 올 겁니다. 언젠가 관객들이 영화관이냐, 집이냐를 두고 가볍게 선택할 날이 오겠지요. 전 그 날이 제발 빨리 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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