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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실증과 준엄한 비평, 역사서의 교과서, 『사기』

수천 년 전에 펼쳐진 인간만사의 다채로운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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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병현은 미국 진출 이후 가장 ‘완벽’한 투구내용을 선보였다.” 오늘 아침자 스포츠 뉴스의 한 구절입니다. 결점 없이 완전한 내용을 가리키는, 영어로 ‘perfect’와 동일하게 쓰이는 ‘완벽完壁하다’라는 단어는 사실 한자로 쓰면 조금은 의미가 모호한 부분이 있습니다. 완벽할 완(完)자는 이해가 가지만, 구슬 벽(壁)자는 왜 들어갔는지 언뜻 보면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완벽’이란 말은 일종의 고사성어로,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에서는 그 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국력이 다른 나라들보다 월등하게 앞서 천하 통일이 코앞일 즈음 진나라는 조(趙)나라에 제안을 하나 합니다. 조나라 왕인 혜문왕이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보물인 화씨벽(和氏之壁)이라는 구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진나라 소양왕은 구슬을 탐내면서 성 열다섯 개를 줄 테니 구슬과 바꾸자고 합니다. 강대국인 진나라의 속셈은 뻔했습니다. 구슬을 받은 다음 성은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니까요. 거절하자니 침략이 두렵고 그렇다고 구슬을 그냥 주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참으로 난감한 시점에 인상여라는 신하가 등장합니다. 인상여는 자신이 구슬을 가지고 진나라에 가겠으며, 회담을 통해 성을 받든 구슬을 완전하게(完璧) 가지고 돌아오든 둘 중 하나를 달성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실제로 놀라운 기지와 위엄을 발휘해 구슬을 전혀 상하지 않고 조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 일대에서 사용하고 있는 많은 단어는 위와 같은 고사 속에서 그 말의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완벽뿐 아니라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말들, 어부지리, 빈축, 계명구도 등 일일이 셀 수도 없는 많은 단어가 존재합니다. 그러한 단어들의 출전은 대개 중국의 옛 역사서이고, 그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역사서가 오늘 소개할 사마천의 『사기』입니다. 세계 여러 문명권에는 각자 나름의 역사서가 있지만 사마천의 사기는 그중에서도 매우 특출한 역사서로 꼽힙니다. 인도의 『마하바라타』나 그리스의 헤로도토스 『역사Historia』는 역시 각 문명권의 대표적 역사서로 거론되지만, 서사시라는 문학의 형태를 두드러지게 취하고 있어 본격적인 역사서의 느낌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는 말 그대로 역사를 기록하고 남기기 위해 집필한 책으로, 중국 고대의 황제(皇帝)로부터 시작해 사마천이 살던 전한(前漢)대까지의 역사를 주요 제왕 및 인물, 각 시대의 제도와 표준 등 분야별로 나누어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역사 자체를 기록하고 보전하기 위한 작업이었기에 사마천은 철저하게 실증적 입장을 견지하여, 중국의 상고사 속에서도 실제 근거가 미약한 부분, 즉 신화나 설화 등은 배제하고 사적과 근거가 있는 부분만 역사 속으로 끌어오는 모습을 보입니다. 실증에 입각한 정확하고 구체적인 자료에 사마천은 특유의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덧씌워 시간의 기록을 진정한 역사로 만들어 냅니다. 단순히 인류가 지내온 시간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개개의 사건들 속에 담긴 의미를 평가하고 정의해 현세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사마천이 생각한 역사 집필의 의도였습니다. 그의 집필 의도는 『사기』 열전(列傳) 중 ‘백이/숙제’ 편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백이와 숙제는 방탕한 군주에 의해 망가진 은(殷)나라를 주(周)나라가 무너뜨리자, 신하된 이가 군주를 내치는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산속에서 살다가 굶어 죽은 인물입니다. 사마천은 이들의 의로운 죽음을 평하면서 천하에 하늘의 공명정대한 뜻과 맞지 않는 부당한 사례들을 손꼽으며 통탄합니다. 고결했던 백이․숙제는 굶어죽고, 학문에 깊이가 있었던 안회(공자의 제자)는 궁핍하여 쌀겨로 끼니를 연명하다 요절했지만 사람의 간을 꺼내어 먹는 극악무도한 도척(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도적의 이름)은 수천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악행을 일삼았지만 천수를 다하고 편안히 죽었습니다. 도대체 세상 어디에 하늘의 도가 있겠느냐며 통탄하던 사마천은 그 억울한 세태를 역사 편찬으로써 바로잡고자 합니다. 의롭게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를 자신이 역사로 길이 남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 이름을 드높임으로써 도가 땅에 떨어진 세상을 다시금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노력이 『사기』의 집필 의도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그렇기에 『사기』는 다른 역사서보다 더욱 두드러지게 인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총 130편 가운데 인물을 다루지 않은 편은 표(表. 연표를 다룸) 10편과 서(書. 정책과 제도) 8편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주요 제왕과 제후,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들에 대한 열전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주요 인물들을 경중에 따라 그 역할과 업적을 평가하고, 인물을 통해 역사에 접근하면서 공을 드높이고 과를 냉엄하게 평가합니다. 연표에 맞추어 따라가는 시간상의 흐름이 아니라 주요 인물들의 삶이 남긴 궤적을 따라가면서 그려낸 역사는 역사를 보다 직접적인 시점에서 관찰할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인간 드라마이며, 풍부한 감동과 재미를 선사합니다. 새벽 닭 울음소리를 흉내 낸 식객 덕분에 적지를 빠져나온 맹상군, 재상 인상여를 질투하다가 인상여의 인품에 감동하여 스스로 웃통을 벗고 매를 자청했던 염파 장군, 군기 확립의 실체를 보이기 위해 왕의 애첩을 참수했던 장군 손무, 평생을 복수에 몸바쳤던 오자서, 진시황 암살 사건의 주역으로 영화 <영웅>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자객 형가… 제각각의 장단점을 안고 역사 속에서 활약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생의 교과서입니다. 인물에 중점을 둔 생생한 묘사와 살아있는 평론 덕택에 사기는 몇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텍스트의 생명력이 죽지 않고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우리가 쓰는 말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많은 글은 아직까지도 몇천 년 전의 일들을 사례로 언급하면서 오늘날의 사회현상을 설명합니다. 고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생명력이랄까요,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사의 진리를 다룬 사기는 당장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 빛이 쉬이 없어지지 않을 듯합니다. 최근에는 사회 곳곳에서 한자와 고전에 대해 강조하는 분위기입니다. 한자 열풍은 물론이고 고전에서 배울 수 있는 지혜가 경영, 마케팅, 인간관계 등에서 풍부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재발견이 전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특히 무한 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21세기 한국사회 속에서 역시 무한경쟁과 능력위주의 사회 분위기로 점철되었던 춘추전국시대의 사례들은 더더욱 각광받을 수 있는 좋은 사례일 것입니다. 사기를 남긴 저자 사마천 또한 몇천 년 뒤의 사람들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인생의 지혜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집필하면서 받은 굴욕과 고통 또한 다 보상받았다고 기뻐하지 않을까요. --------------------------------------- 『사기』는 어떤 책? 중국 상고시대의 황제(皇帝)부터 전한(前漢) 무제(武帝)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사마천의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는 시대 변화에 관계없이 애독되는 대표적인 고전이다. 총 130편, 52만6천5백 자의 분량으로 그 내용은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기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속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중국 고대, 특히 격동하던 춘추전국시대를 헤쳐 간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삶의 방식은 읽는 이들을 매료시킨다. 그래서 『사기』에 관한 수많은 책이 출간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저자 사마천은 누구?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이다. 한나라 태사령이었던 그는 B.C. 99년 이능의 투항 사건을 맞아 홀로 이능 장군을 변호하다가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마흔일곱 살이었다. 당시 사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돈 오십만 냥으로 감형받는 것과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고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궁형을 자청하여 환관이 되었다. 부형(腐刑)이라 불리는 궁형은 사람이 당하는 모욕 가운데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발분하여 사기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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