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이슬아의 매일 뭐라도
일러스트_손은경
비밀인데, 사실 나는 거의 매일 잠깐씩 낮잠을 잔다. 집 밖으로 출근하는 날엔 어쩔 수 없이 못 자고 넘어가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날엔 필사적으로 낮잠을 챙긴다. 여태까지 왜 비밀로 했느냐면 낮잠을 자고 싶어도 못 자는 사람이 세상에 많기 때문이다. 그게 나 때문은 아닐지라도 굳이 떠들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떤 고단한 사람들 앞에선 웃음소리를 낮춰야 한다. 내 작은 기쁨을 구석에서 혼자 조용히 누리는 게 예의일 때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낮잠을 잔다고 고백할 용기가 났다. 촉촉한 눈망울을 가진 내 친구도 사실은 날마다 조금씩 낮잠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눈망울의 적정 습도 유지 비결은 그 잠 덕분이었던 건가. 하지만 그는 엄밀히 말하면 낮잠이 아니라 초저녁잠을 잔단다. 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초저녁잠은 위험하지 않아? 일어나 보면 어느새 해가 져 있어서 잠 때문에 하루를 허비한 느낌이 든다고.”
친구는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음, 확실히 주의해야 하지만... 모르겠어. 어쨌든 하루야 항상 허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자 새삼 내가 ‘허비’라는 것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실감났다. 시간이든 돈이든 뭐든 헛되이 쓰는 느낌을 아주 불안해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헛된 구석이 하나도 없는 하루가 가능하기나 한가.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한다. 깨끗해진 집에서 급한 메일에 답장을 하고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리한 뒤 헬스장에 갔다가 ‘아점’을 먹는다. 어느새 해가 중천에 뜬다. 일을 가장 열띠게 해야 하는 오후가 시작된다. 바로 그때 한 시간 정도를 낮잠으로 허비해 버린다.
프리랜서는 자신의 근무 시간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다. 언제든 쉴 수 있고 언제든 일할 수 있어서 좋고도 나쁘다. 근무 시간이 유동적이어도 근무량이 많은 건 마찬가지니까, 결국 언제 고생할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말이겠다. 붐비는 지하철 출퇴근은 안 해도 되지만 일과 생활이 딱 분리되지 않아서 곤란하기도 하다.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피로하다.
노트북과 와이파이라는 노동의 도구가 늘 내 곁에 있다는 걸 실감한다. 언제 어디서나 업무와 관련된 연락을 받는 건 다행이자 불행이다. 일로부터 완벽히 퇴근한 기분이 드는 시간이 거의 없는 듯하다. 저녁 이후부터는 일부 알림을 꺼 두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이는 실시간 연락들이 속속 도착한다. 문의 메일, 항의 메시지, 원고 지적 메일, 청탁서, 제안서, 인터뷰 요청서, 출판사 투고 메일, 도서 입고 메일, 독촉 메일, 하소연 메일, 무례한 댓글, 광고 문의, 협찬 문의, 원고 리뷰, 각종 부탁 전화 등.... 그런 연락들 속에서 자정까지 마쳐야 하는 원고 마감이 기다리고 있다.
낮잠은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잠시 스위치를 내리는 순간이다. 요즘 같은 계절엔 더위에 한 방 맞은 것처럼 소파에 쓰러지곤 한다. 내가 쓰러지면 고양이 탐이도 폴짝 올라와서 내 가랑이 사이에 엎드린다. 활짝 열어 둔 창밖으로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자전거 소리가 들려오다가 희미해져 간다. 그렇게 탐이랑 낮잠에 빠져든다.
꿈속에서 나는 헤엄 출판사의 대표가 아니라 사실은 낮잠 출판사의 대표다. 낮잠 출판사는 너무 게으른 출판사라 결과물이 하나도 없다. 아무래도 좋다는 입장이다. 어쨌든 나른하고 행복하다. 낮잠 출판사의 대표는 믿는다. 꿈 밖의 헤엄 출판사의 대표를. 그는 6년 차 프리랜서다. 그건 그가 아무리 게을러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부지런했다는 증거다.
나는 깨어나서 다시 헤엄 출판사의 대표가 된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몰래몰래 게으름을 피우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근무 시간만큼이나 쉬는 시간에 대해서도 망설이지 않고 말하고 싶다. 내일도 잠깐 낮잠을 자겠다.
연재노동자 (1992~). 서울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이슬아 수필집>,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