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싫은 마음
진짜 싫은 상대를 위해 이 불타는 싫은 마음을 숨기는 일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같은 입장이 아닌 사람에게 온전한 동의와 공감을 바라진 않는다. 마음이 싫다는 데 어쩌겠나. 나도 사람인지라 살다 보니 나쁜 줄 알면서 싫은 마음이 생길 때 있다. 다만,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티 내진 말자 이 말이다.
지난 2주간 스위스 프리부르그 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이번 주 나의 칼럼 계획은 그곳에서 지내면서 만난 다채로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단상이었는데 지난 밤 시카고 오헤어 공항의 유나이티드 항공기 안에서 벌어진 폭행사건을 동영상으로 본 이상 그 계획은 다 틀렸다.
그 동안 체험을 통해 깨달은 점 중에 하나는, 선의와 도덕성이 충분해도 나와 같은 입장이 아닌 사람으로부터 온전한 동의와 공감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살아온 배경이 제각각인데 사람 인생은 참 덧없이 짧고 세상 변하는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고 성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을 미덕으로 삼는 성공주의 만연의 시대를 살면서 어떻게든 아등바등 살아남겠다고 버티기는 우리가 다 마찬가지니 이해 못 해주는 상대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상대가 살아온 사회를, 이 사회를 만든 역사를 탓하자니 그것 또한 인간이 빚어낸 것이고 그렇다면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도 인간인데 이거 도무지 어디에다가 화를 내야 할지 견적이 나오지 않아 무력감을 가질 때도 있었다.
최근 유독 인종차별인종들의 아주 폭력적인 몇 가지 사건들을 접하게 됐고 그 중 유나이티드항공 사건이 내 머리꼭지에 불을 붙였다.
작년 하반기부터 부쩍 비행기 탈 일이 많았던 내 생활이 순식간에 ‘온전한 동의와 공감’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상상만 해도 무서운데 동영상 속에서 피를 흘리며 비행기 밖으로 짐승처럼 끌려 나가는 그 동양인이 꼭 나처럼 느껴졌단 말이다.
예전에 미국의 한 공항에서 탑승을 마쳤는데 나만 다시 불려나가 30분 넘게 신분 조사를 받았던 일, 작년엔 미국의 다른 공항에서 검색대를 통과하던 중 한 백인 커플이 내 앞으로 새치기를 하더니 내가 만진 바구니를 더러운 물건 취급하다 못해 급기야 아기와 함께 검색대를 통과하는 인도여인에게 굼 뜬다며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는데 내가 말 한 마디 못 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서웠기 때문이다. 일단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하고 나니 이 속상한 심정을 어디에 하소연을 해야 할지 몰라 혼자 술을 잔뜩 퍼마시고 탑승했는데 경찰들이 들이닥쳐 나를 강압적으로 끌어내리는 바람에 내 머리도 깨지고 이도 부러지고 나는 피를 토하며 짐승처럼 질질 끌려 나가...
어머나, 쓰다 보니 또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혼자 술을 잔뜩 퍼마시는’ 부분부터는 각색을 하고 말았네.
같은 입장이 아닌 사람에게 온전한 동의와 공감을 바라진 않는다. 마음이 싫다는 데 어쩌겠나. 나도 사람인지라 살다 보니 나쁜 줄 알면서 싫은 마음이 생길 때 있다. 다만,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티 내진 말자 이 말이다.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존중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정말 싫은 마음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도 아름다운 존중이다. 진짜 싫은 상대를 위해 이 불타는 싫은 마음을 숨기는 일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아무튼, 저 인종차별인종 유나이티드항공 사건은 나의 지난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었고, 내일 모레엔 다시 미국, 미니애폴리스 영화제 참석차 출국해야 되는데... 요즘 나는 정말이지 세상이 무섭다.
문득 어젯밤 스위스에서 귀국하던 중 겪었던 또 다른 사건이 떠오른다.
이번 스위스 행은 C항공을 이용하게 됐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에 C도시 환승 과정에서 발생했다. 출발지였던 제네바에서 C항공은 내게 복잡한 주문을 했다. 저들 도시에서 환승을 할 때 짐을 찾은 뒤 복잡한 출국절차를 거쳐 밖으로 나갔다가 한국행 티켓을 다시 발권 받은 뒤 가지고 나온 짐도 다시 부치고 복.잡.한 입국수속을 또 다시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 항의 해보았지만 이게 C항공사의 규정이니 따라야 한다고 대답했다. 환승할 때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게다가 내게 주어진 환승 시간은 고작 2시간인데 이건 불가능한 스케줄이었다. 하지만 저들 규정이고 저들 나라에선 그렇게 해야 한다니 일단은 서둘러 보았으나 그 나라에서 출입국 수속을 밟으려면 단기비자를 발급 받아야 했고 줄은 한 없이 길고 시간은 촉박한데 비자 심사관은 두 차례나 나를 되돌려 보냈다. 그 과정에서 내 뒤에 줄을 선 한국인 부부는 울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곳 면세점에서 구매한 수십만 원 상당의 물품들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세관에서 압수해갔는데 세관에선 저들의 대한민국여권을 보더니 갑자기 태도를 고압적으로 바꿨다며 내게 하소연을 했다. 그러다 결국 나는 그 아수라장에서 비행기도 놓치고 말았다.
나는 득달같이 C항공 데스크로 달려가 도대체 내가 왜 이 고생을 해야 되는 지 따져 물었다. ‘우리에겐 그런 규정이 없는데 누가 당신을 그렇게 안내했느냐, 제네바에서 당신이 처리를 잘못 받은 것이 문제다,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며 C항공은 무책임하게 대답했고 나는 그만 데스크를 탕탕 치며 바락바락 “너네 지금! 니네 나라에서 내가 한.국.인.이라서 나한테 이러는 거냐!?!” 아,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C’는 미국이 아니다. 중국이다. 그리고 나도 안다. 저 발언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맞다.
그러니까 나는 최근 한국과 중국과의 불편한 관계를 내심 신경 쓰면서 ‘중국은 한국을 싫어한다’는 전제를 만들었고 한국인 부부의 하소연을 듣고 나서는 ‘한국인이라서 중국에서 부당한 처우를 당했다’는 명제를 만든 뒤,
1. 여기는 중국이다.
2. 나는 지금 부당한 처우를 당했다.
3. 왜냐하면 나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와 같은 논리 비약에 빠진 것이다. 적어도 나의 사건은 국적과는 상관없는, 불안정한 시스템과 부주의함이 빚어낸 어느 직원의 실수임이 분명하다.
필요이상의 두려움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결국 실수를 만든다. 무서워하든 안 무서워하든 닥칠 일은 닥친다. 그렇다면 안 무서워하는 편이 여러모로 모양새도 안 빠지고 낫겠다 싶어서 나는 당장 유나이티드항공 검색을 시작한다.
‘유나이티드항공’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는 ‘유나이티드 컨티넨털 홀딩스’는 승객 숫자 기준으로 세계 최대, 항공기와 취항지 숫자 기준으로 세계 2위의 항공 기업이다. 자 그럼 이제 이글이글 불타는 나의 싫은 마음은 잠시 접자. 그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1. 유나이티드항공은 공룡 항공이다.
2. 유나이티드항공은 전에도 인종, 성별 그리고 장애인에 대해 폭력적인 차별을 해왔다.
3. 나는 동양인에다가 여성이지만,
4. 아, 안되겠다. 계속 무섭다.
작전을 바꾸자. 내게 선하고 따뜻했던 외국인들을 떠올리자. 모스크바 하숙집 할머니 밀라, 소울 메이트 그루지아 다비드, 스위스 요리사 제롬, 제롬의 여자친구 사브리나, 사브리나의 고양이 리나, 아일랜드 남자친구 피어스, 피어스 엄마 리즈, 리즈의 앵무새 쟈콥... 아... 이제 좀 진정된다. 아무쪼록 잘 다녀오겠습니다.
1973년생. 영화 <비밀은 없다>, <미쓰 홍당무> 등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