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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맞서기보다는 지금의 나와 사이좋게 살아가고 싶다

『무심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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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지금의 나에게 찾아올 가장 가까운 변화는 노안일 것이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지 유쾌하게 이야기를 꺼낼 날이 분명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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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기름진 고기는 입에 대지도 못하겠어. 회를 먹을 때도 붉은 살은 영 안 먹혀서 흰 살만 찾게 되네.”


“계단을 오를 때면 숨이 어찌나 차는지 몰라.”


“감기에 걸렸다 하면 도통 떨어지질 않네.”


사람은 나이에 따르는 변화를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유쾌하게 말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 아니 좋아 보였다. 내가 20대 무렵의 일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고 왠지 뿌듯해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젊은 날의 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20대의 나는 어른들이 말하는 그 변화가 두려웠다. 육류와 기름진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는 마블링이 들어간 고기보다 살코기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 회라면 흰 살만 찾게 되는 것이, 그리고 감기에 걸렸다 하면 질기게 오래간다는 것이 두려웠다. 숨이 차거나 걸려 넘어지는 쪽은 10대 때부터 그랬기에 딱히 두렵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 나는 내 몸에 그런 변화가 언제 일어날지 내내 조마조마해 했다.


그러나 30대에 들어서고 서른다섯이 넘어도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갈비와 기름진 스테이크를 좋아하고 도미보다 참치를 선호했으며, 참치라 하면 살코기보다는 뱃살을 좋아하고 감기도 어지간해서는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서른셋에 복싱 체육관에 다니기 시작하고 서른일곱에 러닝을 시작하자 젊을 때보다 체력이 훨씬 좋아졌다. 20대 시절의 나는 아무리 멀리 돌아가더라도 엘리베이터로 움직이고 계단은 웬만해선 이용하지 않았지만, 30대에 들어서자 마침내 계단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다. 넘어지는 일도 숨이 차는 일도 20대 때보다 줄었다. 이대로 변화가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닐까. 마블링이 들어간 고기와 튀김, 참치 뱃살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감기를 모르는 튼튼한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40대가 찾아왔고 마흔다섯이 되었다. 나는 한창 중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변화가 찾아왔다. ‘어라’ 하고 생각한 것은 4년 전. 마흔을 넘어서 나는 처음으로 두부가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부를 맛있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줄곧 우려하던 변화였다! 올 것이 왔구나! 하지만 기름진 고기도 여전히 좋아했다. 내가 염려했던 건 예전 같으면 영 아니던 A가 좋아지고 사족을 못 쓰던 B는 입에도 못 대게 되는 상황인데, A도 B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은 변화라고 받아들여도 괜찮은 걸까.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작년부터 나는 기름진 고기보다 살코기를 찾아서 먹게 되었다. 튀김도 참치 뱃살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선호하는 육류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있어서 엄청나게 큰 변화였다. 기름진 고기가 정말로 먹기 버거워지는구나. 그렇게나 우려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염려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마냥 감탄하기 바빴다. 생각해보면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나이는 역시 서서히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밤을 새우지 못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곧잘 외우던 것도 외우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바로 생각나던 것도 시간이 조금은 걸리게 되었다. 여간해서는 체중도 줄지 않는다. 한 끼를 거르거나 운동을 격렬하게 하면 예전에는 체중이 금세 줄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 오싹할 만큼 일정하다. 신기한 것은 줄어도 이튿날이면 일정한 수치로 금방 돌아오는데, 늘면 이번에는 그 숫자가 일정한 수치가 된다는 사실이다. 저녁을 가볍게 먹어서 1킬로그램이 줄어도 이튿날에는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런데 야심한 시간에 참다못해 라면을 먹어서 2킬로그램이 늘면 이번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체중이 줄지 않는다. 참으로 얄미운 구조다. 기름진 고기보다 살코기를 선택하는 것을 20대 시절의 내가 왜 염려했는지 신기했다. 아마도 나라는 사람은 확고하니 달라지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던 게 아닐까. 변함없을 터인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으리라고 생각한다. 정체성이 붕괴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두부 덕분에 여러모로 변화를 깨닫게 됐지만, 생각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그렇다기보다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고기의 마블링은 당연히 내 정체성을 뜻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는 “흰 살 생선만 찾게 된다”, “감기가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던 어른들이 유쾌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있다.


예전에는 변한다는 사실이 왠지 불안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조금은 재밌게 느껴졌다. 이사를 가기 전에는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막상 가면 의외로 즐겁게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물며 변화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변화함으로써 새로운 내가 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새로운 내가 오랜 ‘나’보다 ‘못하는 것’이 늘었다고 해도 역시 새로운 것은 받아들이면 즐겁기 마련이다. 고깃집에서 갈비가 아니라 살코기를 주문하는 자신은 의외로 재밌게 느껴진다. 요지부동인 체중은 거슬리지만, 이렇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인체의 신비를 생각하게도 된다. 더구나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불가능한 일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작년에 ― 죽을 맛으로 뛰었지만 ― 마라톤 풀코스를 두 번 완주했다. 이렇게 별난 행동은 20대 시절이었다면 하지 못했다. 작업 시간을 정해서 오후 다섯 시에는 철두철미하게 끝내는 것 또한 젊은 시절에는 무리였을 테다. 앞으로 분명 갱년기 장애가 시작되거나 예기치 못한 병을 앓기도 해서 이런 식으로는 변하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할 때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된 내가 지금의 나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새로운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선 지금의 나에게 찾아올 가장 가까운 변화는 노안일 것이다.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지 유쾌하게 이야기를 꺼낼 날이 분명 머지않았다.


가쿠타 미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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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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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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