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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만 가면 항생제를 줄 때
대부분 문제를 푸는 열쇠는 의사소통에 있다
항생제 내성 또한 의료 소비자가 일정한 지식을 갖고, 책임을 분담하고, 의사소통을 한다면 의외로 쉽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서로 믿는다면 항생제를 처방 받더라도 안심하고 쓸 수 있을 겁니다. 꼭 필요해서 처방했다는 걸 이해하니까요.
출처_ imagetoday
대략 상황을 알았으니 실전에 응용해 봅시다. 엄마들과 얘기를 해보면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병원에만 가면 항생제를 주는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감기 초기에는 버티다가 열도 나고 기침도 점점 심해져서 병원에 가면 약을 주는 건 기본이고 항생제도 자주 준다는 것입니다. 의사에게 따지기도 어려운 일이라 일단 약을 받아 와서 안 먹이거나, 항생제를 빼고 먹인다고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이런저런 사정을 아는 저로서는 당혹감을 느낍니다.
우선 의사들이 왜 그러는지 한번 봅시다. 우리는 일단 약을 안 주기가 어렵습니다. 첫째, 약을 안 줬다가 아이가 나빠지면 욕을 바가지로 먹습니다. “아픈 애를 기껏 데려갔더니 약도 안 줘서 나빠졌다”는 거죠. 둘째, 약을 안 주면 진료비를 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데 왜 돈을 내느냐는 거죠. 정말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나요? 의사는 오래도록 공부한 지식을 근거로 약을 쓸 필요 없다는 “전문적 판단”을 내린 겁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이런 ‘무형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합니다. 의사 입장에는 고작 몇 천원을 가지고 실랑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매번 돈을 안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냥 해열제라도 줍니다.
약은 그렇다 치고 항생제는요? 사실 항생제 내성의 심각성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의사입니다. “감기에 항생제를 남용한다”고 하지만 환자가 의사를 찾아왔을 때 감기인지 아닌지 알 도리는 없습니다. 교과서에는 대부분의 호흡기 증상은 바이러스성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이러스성이라고 생각하고 버티고 버티다 결국 항생제를 쓰면 금방 좋아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써야 할 상황과 쓰지 않아도 될 상황이 칼로 자르듯 구분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 지난 번에 말했듯 의사가 항생제를 쓰지 않고 버티기엔 진료 환경이 너무 열악합니다. ‘빨리빨리’를 외치는 보호자들에게 차분히 기다려보자는 말은 절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죠. 한두 번 병원에 가도 낫지 않으면 바로 다른 병원으로 가버리고요. 다른 병원에서 항생제를 줘서 아이가 좋아졌다면 “돌팔이” 소리를 듣게 됩니다. 우리의 의료 수가는 전 세계적에서도 낮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 환자가 다른 병원으로 가버리거나, 심지어 돌팔이로 “찍혀” 환자가 줄면 치명적입니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일단 우리는 의사가 넘치는 나라입니다. 의사가 마음에 안 들면 욕하지 말고 다른 병원을 가세요. 주변에서 평판을 들어보고 친절하고 실력 있는 선생님을 찾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터놓고 얘기하세요. 약을 안 받아도 전문가의 의견을 듣는 데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가급적 항생제를 쓰지 않았으면 한다, 아기가 나빠지면 바로 다시 데려와 상의하겠다 등 그냥 부모 마음을 있는 대로 말하면 됩니다. 의사의 판단을 중시하며, 아이의 상태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겠다는 의향을 알리세요. 이렇게 되면 서로를 모르는 상태에서 눈치보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대립하는 구도에서 벗어나 의사와 보호자가 한 방향을 쳐다볼 수 있습니다. 의사 혼자서는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해도 흔들릴 수밖에 없지만 보호자가 한편이 되어준다면 역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고, 의사도 보호자도 더 행복해집니다.
대부분 문제를 푸는 열쇠는 의사소통에 있습니다. 항생제 내성 또한 의료 소비자가 일정한 지식을 갖고, 책임을 분담하고, 의사소통을 한다면 의외로 쉽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서로 믿는다면 항생제를 처방 받더라도 안심하고 쓸 수 있을 겁니다. 꼭 필요해서 처방했다는 걸 이해하니까요. 항생제를 처방 받으면 끝까지 먹어야 한다는 건 아시죠? 아기도 좀 좋아졌고, 계속 약 먹이기도 귀찮고 하니 10일 먹일 걸 5일만 먹이면 항생제 내성균이 늘어납니다. 병이 낫지 않는다는 소린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면역이 있기 때문에 아이의 병은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항생제 내성균이 늘어나고 언젠가는 그 피해가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항생제 내성 문제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축산과 양식업에 쓰는 항생제입니다. 제주에서 양식업하는 분 앞집에서 산 적이 있습니다. 그 댁은 세차할 때 양동이 대신 항생제통을 썼습니다. 페니실린 계열 항생제였습니다. 사람은 아플 때 밀리그램 단위로 쓰는 약을 가축은 매일, 킬로그램 단위로 사료에 섞어줍니다. 밀리그램은 1그램의 1000분의 일이고, 킬로그램은 1그램의 1,000배입니다. 미국에서는 연간 사용되는 항생제의 80%가 가축용입니다. 우리는 그런 통계는 없지만 가축 두당 미국이나 유럽의 3-4배를 쓴다고 합니다. 가축에게 항생제를 덜 쓰면 사회 전체적으로 내성균이 감소한다는 사실은 연구를 통해 입증되어 있습니다.
가축에게 항생제를 쓰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장촉진입니다. 일부 항생제를 가축에게 쓰면 쉽게 살이 찌기 때문에 1940-1950년대부터 이런 목적으로 써왔습니다. 둘째는 전염병 예방입니다. 공장형 축산에 따라 가축들이 밀집된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병에 잘 걸리고 허약합니다. 이번 조류독감 사태 때 보았듯 한번 병이 돌면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병이 없어도 항생제를 줍니다. 선진국에서는 수의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항생제를 쓸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지만 축산계와 제약계의 반대로 여의치 않습니다. 항생제 내성은 부분적으로 인류의 고기 중독과 기업형 축산이 만들어낸 문제인 셈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의료의 주체는 국민, 의사, 정부입니다. 우리 의료는 철저히 정부주도적입니다. 의료인 면허도, 의료기관 개설도, 의료수가도 모두 정부에서 정합니다. 따라서 문제가 있다면 정부의 책임이 가장 큽니다. 항생제 문제에서 가장 분통이 터지는 것은 정부의 태도입니다. 문제가 복잡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실상 아무런 노력을 않는 것 같습니다. 저수가 체계로 꽁꽁 묶어두고 의료 접근성이 세계 제일이라는 치적을 내세우기 바쁘죠. 의료의 질은 갈수록 떨어져 의사와 환자가 서로 만족하지 못하고, 필수적인 의료는 점점 없어지는 대신 미용이나 비만 등 돈 되는 의료만 성업 중입니다. 그 대가는 언젠가 모두 국민이 짊어지게 될 겁니다.
항생제 처방을 강력하게 규제하고 치료 지연을 어디까지 감수할 것인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정부밖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이 중요한 역할에서 쏙 빠진 상태입니다. 실제로 환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의사에게 넘어가고, 의료가 표류하면 의사와 환자만 고생합니다. 계획도 없고 리더십도 없으며 무능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사 아줌마를 불러 백옥주사를 맞는 대통령이 물러가면 나아질까요? 글쎄요.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이 문제를 알고 개선을 요구해야 세상이 바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빨리빨리’와 적당주의에 젖어 여러 번 뼈아픈 경험을 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와 성수대교 붕괴, 그리고 세월호 사고 등은 모든 것을 근본부터 검토하고 원칙을 바로 세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항생제 내성 문제는 정말 중요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지혜를 모으고 합의를 도출해서 강력하게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면도하다 베거나, 아이가 달리다 넘어져 무릎이 까지는 등 사소한 일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세상을 맞게 될지도 모릅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2005년 영국 왕립소아과학회의 ‘베이직 스페셜리스트Basic Specialist’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다.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 《원전, 죽음의 유혹》《살인단백질 이야기》《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