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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그가 보여준 곳

말하고 쓰고 행동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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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선은 늘 ‘꿈/악몽을 꾸는 인간’에게 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본 것, 그가 경험한 것, 그가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쓴 것들은 하나같이 뜨거웠다. 내 앞에 놓인 문장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정적인 단단한 글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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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asons in Quincy: Four Portraits of John Berger>(2016)

 

2017년 1월 3일 출근길.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손을 주머니에 넣고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로 향했다. 가방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고, 나는 휴대폰을 꺼내 알람창을 봤다. “R.I.P John Berger”, “John Berger, 90, Provocative Art Critic and Author of ‘Ways of Seeing,’ Is Dead” 나는 잠시 멈춰 섰다. 함께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이들이 나를 지나쳐 갔다. 다시 한번 문장을 봤다. 존 버거의 부고였다.

 

그가 떠난 지 딱 1달이 지난 2월 3일이 이 글이 게시되는 날이 되었다. 1월 3일 당일에는 존 버거의 부고를 읽고, 많은 이들의 추모 메시지를 읽었다. 저마다 존 버거의 같은 혹은 다른 문장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읽었던 책도 있고, 미처 내가 읽지 못한 책도 있었다. 읽었던 책과 내가 접어두었던 구절들이 함께 겹칠 때면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애틋함을 느꼈다. 어디에 사는지, 누구인지 알 수조차 없지만 같은 글에서 전율을 느꼈다면 그것이야말로 연대가 아닐까 고백하면서. 읽지 못한 책은 따로 적어두었다. 꼭 올해가 가기 전에 다 읽겠노라 다짐했다. 존 버거를 좋아한다고 여럿에게 말하고 다녔으면서 아직도 다 못 읽다니. 부끄러웠다.

 

나 역시 그의 『A가 X에게』에게 빚을 졌었다. 나와 한 사람의 인연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읽었고 나누었던 시간을 축약하기 위해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그가 말했어요. 하지만 완벽한 건 그다지 매력이 없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건 결점들이지.

- 존 버거, 『A가 X에게』

 

나,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 존 버거는 단순한 미술평론가나 예술가가 아닌 소설가, 그리고 ‘말하고 쓰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운 미술사학 수업 중에서 종종 주석과 참고문헌으로 등장하는 존 버거가 아니라 이 시대의 사랑과 연대를 써내려 가는 존 버거로 말이다.

 

그는 예술작품을 보는 눈ㆍ취향에는 단 하나의 통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으로 접근하는 비평적 시각을 보여준 『다른 방식으로 보기』로 시작해 기존의 카르텔을 부수는 작업을 여러 방면으로 진행했다. 미술평론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으로도 그의 저항 정신을 드러낸 점이 더욱 특별하다. 『A가 X에게』 에서는 제국주의로 희생당하고 갇힌 누군가의 저항을 연애편지로 담아냈으며, 『킹』의 개와 생 발레리라는 버려진 곳에서 사는 노숙인들을 통해서 경제 성장의 누락자들을 끄집어 올린다. 이렇게 본인이 정치적인 예술가임을 뚜렷하게 드러낸 그는 『제7의 인간』에서 이민노동자들의 외로운 출발과, 고되고 외로운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말한다.

 

이 책은 꿈/ 악몽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무슨 권리로 남들의 삶의 체험을 꿈/악몽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도 가혹해서 악몽이란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그들의 희망이 너무도 높아서 꿈이라는 이름도 너무 약한 것은 아닌가.

- 존 버거, 『제7의 인간』의 머리말

 

그의 시선은 늘 ‘꿈/악몽을 꾸는 인간’에게 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본 것, 그가 경험한 것, 그가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쓴 것들은 하나같이 뜨거웠다. 내 앞에 놓인 문장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열정적인 단단한 글이 쏟아졌다. 읽는 내내 그에게서 더 읽고 싶고, 더 배우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와 동시에 나는 그의 글과 동떨어져 보이는 내 삶을 거리 두고 지켜봐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를 직접 만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어떤 결을 가지고 있을까.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당신의 글을 한국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읽었더라도,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까. 허망한 믿음과 함께 현실의 그를 상상하곤 했다. 나에게 그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사람이었다.

 

지난 해 나는 EIDF 2016에 올라온 <존 버거의 사계>(The Seasons in Quincy: Four Portraits of John Berger, 2016)를 봤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토록 궁금해했던 존 버거의 실물과 목소리를 접한 셈이다.
4개의 옴니버스 중 첫 번째, <듣는 방법>. 거기선 34년 차이가 나지만 존 버거와 생일이 같고, 출생지가 같으며, 둘의 아버지가 군인인 틸다 스윈튼이 출연한다. 존 버거가 살고 있는 프랑스 퀸시에 그녀가 방문한다. 틸다 스윈튼과 그는 사과를 깎고, 요리를 해 먹으면서 스케치를 한다. 우리가 책 속에서 봤던 그 스케치들과 터치가 매우 닮은. 나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존 버거의 커다란 손을 보았다. 그는 사과를 그리다가 틸다 스윈튼에게 말한다.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단지 그림에 해당되는 말이 아닐 테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무언가를 우리의 삶과 연대하기 위해 많은 글을 손으로 써왔을 것이다.

 

1월 3일, 집으로 돌아와 존 버거의 책을 모아둔 책꽂이를 유심히 보았다. 급히 읽느라 내가 살펴보지 못한 것들이 있을 것이란 확신과 함께. 한 번도 실제로 만나지 못했지만, 그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나는 그가 남겨놓은 책들을 대신 더듬어 보기로 했다. 그가 지켜보지 않아도 계속 타오르는 초처럼 그의 저서와 글들을 우리들의 가슴 속에 남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로 퍼져나가고, 또 다른 모습으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뭐가 됐건 해낼 것이다.

 

“초는 계속 탈 거예요. 뭐가 됐건 우리가 지켜보지 않아도 해낼 거예요.”

-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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