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하게, 더 사소하게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
당신의 사소함이 결코 사소함이 아닌, 나의 정치사회적 감수성의 둔감함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곳도 광장이며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의 망으로 연결돼있다는 치유적 전체성을 제 눈으로 확인하는 곳도 광장이다.
노비 문장(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우리들 개인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가 저 큰 목소리들 앞에서는 항상 ‘ 당신의 사정’이다. (중략) 어디에 좋은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리를 당신의 사소한 사정에 비추어 마련하고 바꾸어가는 문화일 것이다. 문제는 결국 유연성인데 그것은 자신감의 표현과 다른 것이 아니다. 무협영화 한 편만을 보더라도 최고의 고수는 가장 유연한 자이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당신의 사소한 사정’ , 126쪽
1.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지복인데 『밤이 선생이다』 를 읽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 3호선 지하철 안이었고, 경복궁 역쯤이었는데, 가슴에 차오른 던 희열이 자꾸 아아 하는 신음으로 새어 나와 입을 틀어막으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던 기억이 있다.
한 개의 칼럼 안에서 모든 문장이 모두 연계성을 가지고 배치되는 구도와 하나의 사물을 자세히, 세밀하게, 가까이 보는 시선과, " 합당한 언어와 정직한 수사법"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중언부언하지 않고 간결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표현의 경제성과 그러면서도 날카롭지 않고 원만하며 인간적이고 깊이 있게 전달할 수 있는 철학적 올곧음에 매료되었다. 김훈이 날카로운 칼로 주저함 없이 생선을 뜨는 횟집 요리사라면 황현산은 사시미보다는 밥과 생선을 가장 적절하게 조합하는 초밥 요리사일거라는 생각도 그 때 했다.
특히 노비문장에서 소개한 ‘당신의 사소한 사정’ 에세이는 세상의 큰 목소리에 비켜서 있는 개체들의 사소한 사정들이 서로 연결됐으며 그것들이 모두 배려되는 문화가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내용도 좋았지만 특히 제목이 너무 섹시하고 마음에 들어 페이지 전체를 밑줄로 도배했다.
지금 다시 그 페이지를 보니, 메모 하나가 적혀 있다.
황동규님의 「즐거운 편지」 첫 연에는 사소함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온다.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내 사소함을 당신이 소중히 여겨줄 수 있다면 나는 덜 외로울 것이고 우리는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이고, 당신의 사소함을 내가 귀히 여길 수 있다면 당신도 덜 외로울 것이고 나를 더 깊이 사랑할 것이고 우리는 서로에게 즐거운 편지가 아닐까, 라고 나는 연시를 달큰하게 베어 물 듯 사소함이라는 그 거대한 단어를 한동안 한 입가득 머금고 있었다.
<2015. 10. 14>
2.
지난 토요일 오전에 <수취인 분명> 뮤직비디오를 보고 페이스북에 글 한 줄을 남겼다.
“썩어도 준치, 최고다 디오씨”
가사도 귀에 쏙쏙 들어왔고 리듬도 신났으며 라임도 착착 감기는 것이, 집회 분위기를 축제로 만드는데 아주 딱일 것 같았다. 오후에 시청에서 DJ.DOC 가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쓰박 논란도 그때 알았다. 뜨악했다. 나는 좋다고 추천까지 했는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거지? 그러나 거대한 200만 개의 촛불 앞에서 그 ‘사소한’ 이슈는 금방 잊혔다.
월요일 출근해서야 ‘여혐’이니 ‘메갈’이니 하는 말들이 떠다니는 날 선 게시판을 기웃거리며 양쪽의 의견을 읽어 내렸다. 누군가는 그 노래를 들으며 불쾌했고, 어떤 이는 그 불쾌함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고, 일부는 자신들의 불쾌함을 공연 반대로 표현했으며, 그런 그들의 행동을 몰상식한 검열이라며 흥분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나를 포함한 더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를 낳고 ’처럼 ‘ 미쓰박은 커피를 낳고 커피는 군가산점을 낳고 군가산점은 임신을 낳는’ 네버엔딩 논쟁을 따라가기에는 체력과 관심이 딸려, ‘무엇이 잘 못 됐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냥 누군가가 기분 나쁘다고 하니 잘 못 된 것으로” 하기로 하며 생업으로 복귀했다.
추측컨데, 그 음악을 제작했던 <고발 뉴스> 이상호 기자 역시 ‘미쓰’ 라는 타이틀에서 여성혐오를 읽어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사전적 정의로 MS와 MR를 배웠고, 실제 대학 졸업 후의 사무실에서 상사들은 느끼한 표정을 짓지 않고도 “미쓰 박, 어디갔어?”, “미스터 윤, 이것 좀 부탁해” 라고 했었으니, ‘미쓰’라는 말을 오래 전에는 익숙했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 올드한 외래어 정도로 인식했을 것이다. 박물관에 들어갈 말을 가사 안으로 끌고 들어올 때, 내가 제작자였다면 오히려 키치적이어서 신선한 느낌까지 가졌을 것도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팽목에서, 최순실이 출두하는 검찰청에서 슬픔과 분함에 엉엉 우는 이상호의 감수성 그물에 여혐이라 의심되는 단어가 걸려들지 않을 리 없었을 것이다.
페이스북에 공유까지 했던 나도 조금은 억울했다. 사람들이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솔직히 들었다. 그러나 도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삶의 도리를 찾기 위해서, 내 툴툴거림은 10분짜리 배설이면 족했다. 바뀌는 시대, 변화하는 환경과 그러함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언어 용법의 변화와 과거에는 문제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것들의 드러남과 지적에 대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촘촘히 적혀 있는 내 의식 속 <경계의 사전>에 새로운 단어 하나를 추가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최근 몇 년간, 특히 ‘성추행의 범위’ 라거나 ‘성 차별’ 등의 젠더적 문제에 있어서 내가 취한 방식이었는데, 이를 내 선배는 ‘이해 보다는 암기’라고 간략하게 정리했다. 학습 받지 못한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적응은 누군가의 지적을 교정의 기회로 습관화 하는 것이다.
물론, 문제의 제기와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은 구분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미쓰 박’이 여성비하라는 주장과 촛불 무대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별개의 논의 대상이며 나는 지금 전자의 경우로 한정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러니까 내 돌아봄의 지점은 ‘예민함’과 ‘사소함’으로 타인의 주장을 퉁치려 했다는 내 무의식적 태도에 있다.
단지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것을 예민한 성품들의 기질적 문제로 전환시키는 것은 무례한 폭력이다. 나라의 국운이 걸려있는 거대 담론의 광장에서 그런 사소한 것들로 딴지를 거냐는 주장 역시 파쇼적이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개인의 사정이 모여지는 곳이 광장이고, 입의 말해짐과 귀의 들어짐이 잘 순환될 때 민주적 광장이 된다. 그러면서 또한 당신의 사소함이 결코 사소함이 아닌, 나의 정치사회적 감수성의 둔감함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곳도 광장이며 근본적으로 우리가 하나의 망으로 연결돼있다는 치유적 전체성을 제 눈으로 확인하는 곳도 광장이다.
지난 한 주 동안 이래 저래 생각이 많았던 나의 사소한 사정이었다.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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