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절도일기(竊圖日記)
20화 – 질질 끄는 권력보전법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바퀴벌레』 외
이쯤 되면, 독자는 소리 지를 만하다. ‘아니! 이럴 거면 2장을 왜 이리 길게 썼느냐?’고.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게 다 날은 춥고 할 일은 없어서, 긴 이야기를 좋아하는 북유럽 스타일이라 치자.
10. 25.
천명관 작가의 신작 소설을 샀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카카오에서 연재할 때 매주 회당 100원씩 결제를 하며 읽었다. 그땐 이야기를 조금씩 읽으니 한 주가 지나면 전 주의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았다. 하여 읽긴 했으나 서사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에 다시 읽을 요량으로 주문을 했는데, JTBC의 최순실 보도를 접했다.
10. 26.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아직 펼쳐보지 못하고 있다. 온종일 뉴스를 봤다.
10. 28
이틀간 어수선한 가운데도 원고 마감을 하고, 지방 행사에 다녀왔다. 시간이 날 때마다 뉴스를 검색해서 꼼꼼히 읽어보았다. 지금은 독서를 해야 할 때가 아니다. 나도 작가지만 말이다.
10. 29.
광화문 전체가 촛불로 뒤덮였다. 대통령 하야와 탄핵을 외치고, 거국중립내각을 외친다. 물방울 같은 시민들의 힘이 모여 폭포를 이루고 있고, 촛불이 모여 어둠을 밝힐 횃불을 이루고 있다. 마감 때문에 집회에 참여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다. 아무리 시간이 없더라도, 11월 12일에도 꼭 참가해 촛불 하나 보탤 것이다.
10. 30.
우리는 왜 이런 시대를 맞이했을까. 물론 대통령이, 비선실세가, 여당이, 국회가, 검찰이 잘못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깔린 탐욕이 그릇된 것이다. 대통령은 5년이면 끝나지만, 삼성은 계속된다. 어떤 대통령은 하야를 하고, 어떤 대통령은 퇴임 후 절에 가지만, 재벌 기업은 계속 이 나라의 실권자로 통치한다. 그들은 대통령과 국회와 검찰과 여러 권력자를 바꿔가며, 자신들의 권력과 자본을 보전한다.
사회가 탐욕을 쫓기 때문이다. 대통령 한 명 바뀐다고, 국회의원을 갈아치운다고, 검찰을 개혁한다고 해서, 건강한 사회가 곧장 오진 않는다. 자본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회풍토가 계속되는 한, 또 다른 비선실세, 또 다른 엉터리 대통령이 나올 것이다. 비극은 반복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내가 최순실이고, 내가 박근혜다.
10. 31.
이 시국에 소설을 들며 생각했다. 일상은 무엇일까.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일상을 거부하고, 혁명을 일으킬 때, 우린 ‘온전하고 정직한’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때로는 일상을 거부해야 한다. 안위를 거부하고, 관습을 깨뜨려야 한다.
동시에, 공동체의 대사(大事)보다 결코 사소하지 않고, 결코 가볍지 않은 게 일상이다. 우리는 일상을 통해 안정을 찾고, 고민을 하고, 발전을 하니까. 기껏 소설 한 권 읽는데, 구차한 변명이 필요한 시절이다. 애달프다.
11. 2.
천명관 작가의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역시 여전한 이야기꾼이다. 이번 소설은 한 가지 이야기가 아니라, 몇 가지 에피소드를 엮은 느낌이었는데, 인터뷰를 찾아 읽어보니 예상이 맞았다.
학부 시절에 광고 창작 강의를 들을 때, 강사가 이런 말을 했다. ‘근사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땐 두 세 가지 아이디어를 하나로 합쳐보라’고. 이번 소설은 작가가 예전부터 시나리오로 구상해둔 몇 가지 아이디어를 합친 것이라 했다. 나도 이런 기법을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에 쓰긴 했는데, 단편소설 여러 편을 독립적으로 전개하면서, 종종 서사와 등장인물들이 교차하도록 썼다. 그런데, 이 소설은 아예 다른 여러 편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한 데 묶어버렸다. 각종 서사와 여러 주인공을 비빔밥처럼 버무린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다. 작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작가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이야기 창고’에서 소재를 하나씩 꺼내 소설을 한 권씩 쓰더라도, 그 이야기 창고가 북적댈 경우 이 방법은 효과적이다. 마치 음식 창고 안에 가득한 재료가 썩기 전에 부대찌개를 어서 끓여 재료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나는 이 조리법을 절도하지 않을 것이다. 쑥스럽게도, 내 ‘이야기 창고’는 벌써 바닥났으니까.
11. 4.
다와다 요코가 쓴 『용의자의 야간열차』를 펼쳐봤다. 재미없었다. 2인칭 소설은 몰입할 수 없다. ‘당신은 이제 OO를 한다’는 식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어딘가 모르게 자꾸 가려웠다. 3장(章)까지 읽었는데, 몸과 마음에 부스럼이 날 것 같다.
11. 5.
광화문의 촛불 시위에 참가한 인원이 주최 측 추산으로 20만 명이다. 다음 주에는 나도 참가할 것이다.
11. 6.
요 네스뵈의 『바퀴벌레』를 읽기 시작했다. ‘해리 홀레’ 라는 형사가 나오는 시리즈의 2번째 작품이다. 나도 언젠가 형사가 주인공인 시리즈를 쓰고 싶다.
『바퀴벌레』는 이제 고작 2장(章)까지 읽었는데, 요 네스뵈의 서사 전개 방식을 알 것 같다. 그는 한 챕터의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해 장구하게 묘사한다. 동시에 인물의 전사(前史)도 서술한다. 예컨대, 방콕 거리에 대해 묘사를 하다, 한 명의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 인물은 윤락녀다. 그러면, 이 여성이 어떻게 윤락녀가 되었는지, 지나온 인생에 대해 장구히 서술한다. 그러고 난 뒤, 어느 날 손님을 맞으러 갔는데, 손님이 침대 위에 ‘죽어 있다.’
그러면 2장에서는 갑자기 노르웨이의 한 긴급회의장에서 시작한다. 당연히 회의장 묘사… 새 등장인물 묘사……(참아야 한다)… 그리고 새 등장인물의 인생 서술 …(역시 참아야 한다) …, 그러고 나서 새 등장인물인 형사에게 고위 관료가 말한다.
‘미안한데 말이야, 이번 살인 사건은 자네 말고 해리 홀레가 맡아줘야겠어’라고.
이쯤 되면, 독자는 소리 지를 만하다. ‘아니! 이럴 거면 2장을 왜 이리 길게 썼느냐?’고.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이게 다 날은 춥고 할 일은 없어서, 긴 이야기를 좋아하는 북유럽 스타일이라 치자. 어쨌든 이런 북유럽 스타일로 3장이 시작되는데, 이번에야말로 마침내 해리 홀레가 ‘아! 주인공인데, 이제 나와야 해?’라는 식으로 등장을 한다. 그는 허름한 술집에서 (참을 성 있게) 술을 마시고 있다. 그러면, 작가는 또 다시 해리 홀레에 대해 묘사를 한다…. 이렇게 독자는 계속 참으며 읽어야 하는데, 나쁘지 않다. 나는 이 소설을 계속 읽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질질 끄는 서사전개법’도 과감하게 훔칠 것이다. 오래간만에 훔칠 게 하나 나타났다.
그나저나, 이게 한국에서 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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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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