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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영혼 파괴자인가 친구인가?
『안녕 주정뱅이』와 『낮의 목욕탕과 술』을 읽고
술은 우리 인간의 오래된 친구다. 이 친구가 내 영혼의 조종간을 잡고 결국 파괴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내 퍽퍽한 마음을 촉촉하게 해줄 단비의 역할을 하게 할 것인가? 이 두 권의 책은 그 망설임에 대한 흥미로운 예시를 주고 있다.
여러분은 술 한 잔 마시기 좋은 날은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등산을 한 후에 정상에 마시는 막걸리, 더운 여름날이 선선한 바람이 불 때 치킨집 야외 테이블에서 마시는 500cc 맥주, 지글지글 익기 시작하는 삼겹살을 영접하며 따르는 소주 한 잔?
이렇게 술 마시기 좋은 날을 잡는 사람도 있고, 속상해서 한 잔, 기분이 좋아서 축하하기 위해서 한 잔, 화가 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또 잠이 안 와서 한 잔을 마시는 사람도 있다. 날씨에 따른 분류도 있다. 비가 오면 빈대떡에 술 한 잔 생각 절실한 사람이 있고, 날이 무척 화창하면 시원한 냉장고에서 꺼낸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으니까.
술에 대한 취향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하지만, 진정한 술꾼에게는 위에 쓴 모든 조건이 다 자기 이야기다. 대통합이자 대극합일이다. 기분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혼자서나 친구들과 어울릴 때나, 운동경기를 볼 때나, 무료한 하루를 보낼 때에나 술은 언제나 함께 할 친구 중에 친구다.
처음에는 이유를 만들어 술을 마신다. 술 덕분에 마음의 고통이 줄어들고, 억제했던 마음이 풀어지며, 팽팽한 긴장의 바람이 빠지면서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술은 일종의 자가치유의 만병통치약이다. 잠시는 효과가 분명하다. 그래서 수 만년 전 과일이 썩으면서 발효된 것을 우연히 먹어 본 이후 술을 발견한 이래 지금껏 우리와 함께 해왔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탐닉을 하게 되면서 술은 인간의 영혼도 잡아먹기 시작한다. 알코올 중독이란 무섭고 빠져 나오기 힘든 상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생긴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술에 관대한 문화권에서는 술은 ‘사회생활을 해나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여겨지고,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은 성격도 좋고 사회성도 좋을 것이라는 이상한 평가기준을 갖고 있으니 꽤 병증이 깊어지기 전까지는 그 사람의 술 문제는 알 수 없다. 영혼이 이미 심각한 손상을 입은 다음에는 술이 술을 부르고, 뇌는 더욱 깊은 손상을 입어 자포자기의 세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기 일쑤다.
술로 구원을 원했으나 어느새 술이 괴물이 되어 영혼을 잠식해버린 인물들의 삶을 너무나 정교하고 생생히 그려낸 소설이 있다.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다. 7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같이 술을 매개로 살아가거나, 이미 술에 의해 꺼져가는 영혼의 군상들을 다룬다.
맨 앞에 나오는 「봄밤」은 제목만큼 예쁜 얘기는 아니다. 스무 살에 쇳일을 시작해 33세에 사업으로 돈을 벌지만 부도를 맞아 39세에 신용불량자가 돼 노숙생활까지 하게 된 수환, 교사생활을 하다 결혼하지만 곧 이혼하고 아들을 빼앗긴 뒤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한 영경. 이 두 사람은 친구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지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을 이어준 것은 술이었다. 그리고 둘은 술로 서서히 무너져버린다. 수환의 몸이 안 좋아 요양원에 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여전히 영경은 술을 원 없이 마시러 나가야만 한다. 그걸 수환도 알지만 말리지 못한다. 술이 두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두 번째 「삼인행」은 이혼하기로 한 부부 주란과 규가 마지막 여행을 떠나며 둘의 친구인 훈과 함께 한 기묘하고 어색한 1박 2일 여행이야기다. 여행 내내 정교하게 준비한 계획에 따라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 콘도에서도 양껏 술을 마시면서 별 내용도 없는 이야기를 밤새 하고 다음날 아침에도 남은 위스키를 마시고 해장하러 가서도 소주를 마신다. 황태해장국에 후딱 한 병을 마시고, 바로 한 병을 더 시키자 주란도 잔을 채워달라고 한다. 규가 말한다. “우리 다시는 서울로 못 돌아가도 괜찮을 것 같지 않냐?” 이야기 내내 묘하게도 분위기는 날이 서 있지도 않고,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으며, 관계의 파탄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저 말없이 술잔을 비우고 창 밖을 내다볼 뿐이다.
한 편 한 편의 짧은 이야기를 읽는 내내 먹먹했다. 내가 진료하는 환자들이 떠오기도 하고, 또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가끔 술자리를 함께 하는 친구들의 모습, 나아가 내 모습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나면 진저리를 치며, ‘이 정도 사람들이 있다니, 나 정도 마시는 것은 사회적 음주에서 벗어나지 않았어’라고 안심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마시는 술이 적당하고 좋을까? 진단이 된 알코올 중독이라면 절주가 해답이 아니고 앞으로는 영원히 한 방울도 마셔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모두가 알코올 중독은 아니고, 우리가 바라는 것은 어느 선을 넘지 않는 정도에서 술을 적당히 조절하면서 마시고, 그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에서 가볍게 볼 수 있는 책이 있으니 구스미 마사유키의 『낮의 목욕탕과 술』이다. 저자는 다니구치 지로가 그린 『고독한 미식가』 시리즈의 저자이기도 하다. 드라마로 제작된 『고독한 미식가』에서 한 편이 끝날 때마다 짧게 원작자가 실제 소개된 식당을 찾아가서 음식을 먹고 맥주 한 잔을 하면서 평을 하는 장면이 매번 나오는데 거기 나오는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바로 구스미 마사유키다.
그는 술이란 낮술이 최고라고 주장한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을 때 마시는 술은 달다. 밤보다 몸이 팔팔하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원하는 승리의 나발을 부는 술’이라고 말한다. 남들이 일을 하는 시간에 술을 마시니 더욱 맛있다며, 할 일이 남았지만 그걸 무시하고 밝은 햇살 아래 당당히 마셔버리는 통쾌한 기분이 술 맛을 돋운다고 독자들을 꼬드긴다. 게다가 마시고 난 다음에도 아직 ‘오늘’이 남아있으니 얼마나 좋고 시간적 여유도 있어 술 맛을 풍성하게 하니 밝은 술이고 취기도 명쾌해서 기분이 좋다고 낮술을 옹호한다. 거기다가 밝을 때 목욕탕을 가는 것은 더욱 기분 좋은 일이니, 최고 x 최고는 바로 ‘낮의 목욕탕과 술’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고는 고독한 미식가에서 골목골목에 숨어있는 작은 식당을 주인공이 찾아갔듯이, 이번에는 일본 특유의 오래된 목욕탕을 찾아가서 이색적인 모습을 취재하고 실제 체험을 한다. 목욕을 하고 난 다음 근처의 술집을 찾아가서는 음식과 술을 시켜서 먹으며 맛을 음미하는 코스를 반복한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하마다마야의 ‘하마탕’에서 목욕을 마친 작가는 작은 이자카야 ‘가노’를 찾아가서 생맥주가 나오자 서두르지 않고 어른스럽게 ‘뭐 바쁜 일이라도 있수?’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잔을 획 들어올려 쭈욱 들이킨다. 그렇지만 이미 기분은 앞으로 고꾸라지듯 치달리고 있다. 마시는 게 아니라 빨아들인다. 아기가 젖을 빨 듯 말이다.
캬 최고!
역시 한낮, 목욕탕에 다녀와 밝은 햇살아래에서 마시는 맥주는 최고다.
그 첫 한 모금은 그야말로 무적
읽고 나니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싶어지지 않는가? 이런 절절한 표현을 매 편마다 한다. 이 글에서는 술로 영혼이 망가지지 않는다. 목욕을 하고 가까운 작은 가게를 찾아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거기에 맞는 술을 마신다. 그것도 낮술로. 그리고 삶의 기쁨을 찬미한다. 살아있음, 이렇게 마실 수 있는 건강함, 뇌의 윤활유가 들어와 뻣뻣하던 긴장이 풀어지며 창의적 마음이 솟는 것을 환영한다. 바로 이런 점이 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아닐까.
술은 우리 인간의 오래된 친구다. 이 친구가 내 영혼의 조종간을 잡고 결국 파괴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내 퍽퍽한 마음을 촉촉하게 해줄 단비의 역할을 하게 할 것인가? 이 두 권의 책은 그 망설임에 대한 흥미로운 예시를 주고 있다. 가능하면 한 권만 보지 말고, 두 권을 함께 번갈아 보시기를 바란다.
안녕 주정뱅이권여선 저 | 창비
권여선의 이번 소설집은 이해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지난 삶의 불가해한 장면을 잡아채는 선명하고도 서늘한 문장으로 삶의 비의를 그려낸다. 인생이 던지는 지독한 농담이 인간을 벼랑 끝까지 밀어뜨릴 때,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 불행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낮의 목욕탕과 술구스미 마사유키 저/양억관 역 | 지식여행
국내 독자에게는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로 알려진 구스미 마사유키지만, 사실 특유의 ‘맛깔나는 문장’을 무기로 에세이스트로도 오래도록 활약 중이다. 자신만의 감성으로 창작의 세계에서 살아온 그가, 시대의 변화에도 꿋꿋이 살아남은 목욕탕과 눈물과 웃음 속에서 사랑받아 온 낡은 술집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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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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