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이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나에게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을 허락해준다면, 나는 이야기꾼들을 대변해 한 마디 하고자 한다. 사실, 이야기꾼들에게는 희망이 있다(동의하지 않는다면, 이야기꾼을 희망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다, 로 바꿔 읽어도 좋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아쉬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호사가의 입에서 무슨 말이라도 나오면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며 들어주며, 이런 대사를 읊어주길 바란다.
“거. 똑같은 이야기를 내가하면 재미없는데, 당신이 하면 어째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소?”
글쟁이 역시 같은 욕심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손에서 나온 문장이 무엇이든, 독자의 눈길을 끌어당겨 지면에 붙들어 매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여 움직일 수 없게 하고, 동공은 오로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활자를 게걸스럽게 탐닉하기 위해서만 움직이게 하고, 손목은 오직 장을 넘기는데 만 쓰게 하는 것, 그리하여 이야기와 문장만으로 상대의 영혼을 포로로 삼아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아무 말이라도 써주시오!”라고 외치게 만들고 싶은 것. 그것이 글쟁이가 바라는 것이다.
그것이 실현될 때, 글쟁이의 손가락은 지금 무엇을 쓰는지 자각할 틈도 없이 빠르게 움직이고, 흰 종이 위에는 휘갈겨 쓴 검은 글씨들이 마치 독자의 시야를 뒤덮을 메뚜기 떼처럼 자욱하게 내려앉고, 급기야 쓰고 있는 자의 눈조차 붙들어 매어 (자신이 쓰고 있는) 글에 취해 어떻게 이 글을 썼는지 깨닫지 못하는 황홀경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스스로도 다음 장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예견할 수 없으며, 어느새 자신이 쓰는 이야기의 독자가 되어 자기 손 끝에서 창조된 인물들을 응원하게 되고, 그 인물들의 고통에 어느 누구보다 절규하여 수십 번에 걸쳐 질주하듯 움직이는 손가락 위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지만, 그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손가락은 또 다시 제 갈 길을 바삐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자신의 손가락을 통해 빚어낸 이야기들이 금세 자신을 웃게 만들어 눈동자엔 눈물을 입술엔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스스로 창조한 이야기의 첫 번째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때서야 이야기의 주인은 이야기꾼도 아니요, 청자와 독자도 아니요, 오로지 작가의 상상과 망상, 그리고 독자의 기대와 오해 속에 태어나, 긴 여정을 걷고 있는 바로 그 인물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면, 이야기꾼은 인물들 각자가 발걸음을 옮기고 입을 열 때마다, 그 영혼에 빙의되어 임금이 되었다가, 역적이 되었다가, 창기가 되었다가, 열녀가 되었다가, 선비가 되었다가, 노비가 되었다가를 반복하다, 어느 순간 급기야 자신의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영혼에게 간절히 갈구하게 된다. 제발, 이야기가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관상>은 길다. 러닝타임이 140분이다. 영화가 시작될 때 비행기를 탔다면 우리는 북해도에 도착해 있을 수도 있으며,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잠자리를 가졌다면 몇 차례나 가졌을 수도 있다. 그 만큼 길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속으로 외쳤다. 제발 이야기가 끝나지 않게 해달라고. 그저 이 배우들과 이 시대와 이 분위기에 빠져 있게 해달라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인 내경은 바다를 바라본다. 주인공인 내경도, 주인공과 함께 흥망성쇠를 경험했던 팽헌도, 그 주인공을 흥망성쇠의 길로 이끌었던 연홍도 모두 바다를 바라본다. 이들의 얼굴을 비춘 후, 카메라는 이윽고 바다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파도가 끝없이 밀려오고 있다. 비록 영화는 여기서 끝을 내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그래서 저 극장문을 열고 나가더라도, 당신은 이제 자신만의 다음 이야기를 끝없이 써나갈 것이라는 듯. 그렇게 파도는 이야기처럼, 아니, 이야기는 파도처럼 밀려온다.
마치 내가 끝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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