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출신의 록 밴드 픽시스는 1988년, 첫 번째 정규 앨범 <Surfer Rosa>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팬들은 현재까지도 이 앨범을 이들의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1980년대의 끝자락에 이르러 등장한 이들은 1990년대 초반에 불어 닥친 얼터너티브 광풍을 예고하며, 이후 등장한 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번 주에 소개해드릴 명반, 픽시스의 <Surfer Rosa>를 지금 만나보세요.
픽시스(Pixies) <Surfer Rosa> (1988)
픽시스의 영향은 확실하다. 자신들의 음악을 설명하며 픽시스를 꺼내놓는 너바나의 언급은 이미 익숙하다. 1980년대의 마지막 해에 등장한 이들의 문법은 다가오는 새로운 10년의 모델이었으며 동시에 얼터너티브의 수식을 받는 이후의 밴드들이 거쳐 가는 교차점이었다. 물론 픽시스의 음악은 확실하게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하나하나 뜯어낸 사운드에서는 강렬함이 들렸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본 큰 이미지에서는 쿨함이 배어나왔고, 다가오는 첫 인상에서는 원초성이 드러나면서도 끝내는 마무리 단계에서는 지적인 잔향이 은근하게 자극했다. 여기에 가사는 난해하기 그지없었으며 블랙 프랜시스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조이 산티아고의 기타는 디스토션이 걸린 거친 소리로 날아들어 긁어댔으니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러나 수많은 밴드들이 픽시스의 후계를 자처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닌 이들 특유의 팝 사운드다. 밴드는, 그리고 리더로서 밴드 전체를 지휘한 블랙 프랜시스는 잘 들리는 곡을 뽑아내는 데 있어 천재적인 센스를 지니고 있었다. 정제되지 않은 소리로 우벼대는 기타는 시원한 스트레이트 팝을 향해 뻗어나갔으며 킴 딜이 꾸며놓은 베이스 파트에서는 의외의 멜로디가 넘실댔다. 그 중에서도 훅 라인은 여느 다른 것들보다도 빛났던 결정적인 요소였다. 귀를 채가는 데 있어서 이들의 훅 라인은 결코 주저한 적이 없었다. 확실하고 명료했으며 순간을 탁월하게 지배했다.
Ep 앨범
<Come On Pilgrim>에 이어 1988년에 발매된 첫 정규 음반
<Surfer Rosa>는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밴드의 컬러를 훌륭히 추출해낸 수작이었다. 로 파이(lo-fi)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거친 질감 너머에는 이들이 구현해낸 자신들의 음악이 제자리를 확고히 잡고 있다. 픽시스가 그려낸 커다란 그림에는 신체 절단이나 관음증, 나중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를 이야기를 다루는 가사에 이를 맹렬하게 질러대는(?) 블랙 프랜시스의 보컬과 기타리스트 조이 산티아고의 칼칼한 리프는 물론, 결정적인 타이밍에 나타나 펀치를 날리는 훅 라인이 살아 움직였다.
드럼으로 시작해 기타가 올라타는 강렬한 전주와 이윽고 등장하는 메인 보컬, 캐치한 코러스의 순으로 2,3분 만에 러닝 타임을 끊는 방식은 이들의 전형적인 공식이었다. 앨범을 열어보자. 첫 트랙 「Bone machine」과 이를 이어 받는 「Break my body」, 블랙 프랜시스의 창법이 특징적인 「Broken face」가 바로 이에 해당되는 명확한 모범답안이라 할 수 있다. 기타가 주를 이루는 스피디한 진행에서는 펑크 사운드가 연상되지만 그보다는 훨씬 팝적이며, 낯선 가사와 돌출된 구성으로 독특한 재미를 부여했다. 그런가하면 차분한 음색의 킴 딜이 메인 보컬을 맡은 「Gigantic」과 이후의 「River Euphrates」, 「Cactus」는 조금은 부드러운 트랙들로, 팝 사운드로 접근한 흔적이 이 지점에서 더욱 드러난다. 여기에 영화 <파이트 클럽>의 삽입곡으로도 유명한 「Where is my mind?」는 훨씬 대중적이면서도 앨범과 궤를 같이하는 사운드를 담아내며 무한한 매력을 발산했다.
곡을 써낸 픽시스와 블랙 프랜시스의 역량에 주요한 역점이 모이기는 하나 음반에 가세한 빅 블랙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알비니의 프로듀싱에도 어느 정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앨범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거친 음감은 그의 구상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밴드가 추구하는 방향도 어느 정도 고려해야겠지만, 기술적으로 깔끔하게 완성된 믹싱보다는 조금 더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는 사운드를 선호했던 그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금 더 괜찮은 울림 효과를 주기 위해 「Where is my mind?」의 보컬을 욕실에서 녹음한 바 있으며 「Oh my golly!」와 「I'm amazed」의 도입부에는 멤버들의 대화를 삽입하기도 했다. 13곡의 보컬 녹음을 하루 만에 끝내버린 일화는 픽시스의 역사에서 유명한 사실. 스티브 알비니의 타이트한 기획과 과격하게 달리는 블랙 프랜시스의 목소리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앨범은 재밌다.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이 앨범에서부터 픽시스는 자신들의 색깔을 완연히 드러낸다.
<Doolittle>과
<Bossanova> 등으로 이어지는 이후의 행보와 같이 두고 본다면 블랙 프랜시스와 멤버들이 보여줄 것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강렬한 사운드와 매력적인 멜로디 라인으로 뽑아낸 이 앨범만으로도 픽시스는 당장에, 그리고 얼터너티브 신을 거쳐 오는 흐름 속에서 제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는다.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픽시스의 등장은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적잖은 영감을 불어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Surfer Rosa>를 최고의 앨범으로 꼽았고,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은 음악적 원천으로 이 작품을 언급하며 후에는 스티브 알비니를
<In Utero>의 프로듀서로 초대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90년대 초, 얼터너티브라는 광풍이 대중음악계를 강타한다. 픽시스의 데뷔 앨범은 새로운 세대로 향하는 1980년대 말의 멋진 예고편이었다.
글/ 이수호 (howard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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