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2003년 ‘아웃사이더’라는 곳에서 먼저 출간되었으나, 출판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절판된 바 있다. 아트북스로부터 이 책을 복간하자는 제안을 받은 것이 이미 몇 년 전.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책을 다시 내게 되었다. 복간을 미룬 이유 중의 하나는 오래전에 쓴 자기의 글을 다시 읽는 데에 따르는 민망함이었다. 이미 13년이나 된 원고들이지만, 지금 이 시점에 보아도 고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사소한 오류를 바로잡고, 일부 도판을 교체하고, 참고문헌을 보강한 것을 제외하면, 초판과 내용은 달라진 것이 없다.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우리 지성계에 이른바 ‘포스트’ 담론이 유행할 때, “모든 책은 유행이 지난 다음에 읽는다”는 발터 베냐민의 격언에 따라 나는 일부러 그 유행에 거리를 두었다. 1999년 유학을 중단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포스트’ 담론의 유행은 어느 정도 지나간 상태. 비로소 베냐민이 말한 유행이 지난 독서를 위한 최적의시간이 된 셈이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들은 ‘탈근대’의 관점에서 미학사를 다시 읽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불어에서 에세이는 ‘시도’라는 뜻을 갖는다.
1장 「미와 에로스」에서는 플라톤의 미학을 ‘존재미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플라톤의 텍스트 『향연』에 등장하는 ‘미의 이데아’는 근대미학에서 주로 존재론이나 인식론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왔다. 그 결과 ‘미의 이데아’가 존재의 해석학이 아니라 존재의 미학에 속한다는 사실은 간단히 망각되었다. 이 에세이는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를 토대로 플라톤의 ‘미의 이데아’가 함축하고 있는 윤리학적 미학의 측면을 드러낸다. 그리스인들에게 ‘미의 이데아’란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끌어올려 완성시켜 나가는 존재미학의 원리였다.
2장 「피그말리온의 꿈」에서는 예술적 진리에 대한 근대미학의 관점을 전복하려 했다. 근대미학에서 예술은 ‘모방’으로, 예술적 진리는 ‘재현의 진리’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원래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는 그저 단순한 모방(imitatio)이 아니라, ‘감각적 현현’ 일반을 가리켰다. 이 장에서는 하이데거의 『예술작품의 근원』을 따라 ‘미메시스’의 근원적 의미를 되살리려 했다. 이 경우 예술적 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의 ‘현시(presentation)’로 다시 정의될 것이다.
3장 「헤라클레스의 돌」은 플라톤의 대화편 『이온』을 중심으로 예술의 ‘영감론’을 되살리려 한다. 플라톤에게 시는 신적 영감의 산물이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시는 테크네, 즉 합리적 규칙에 따른 인간적 제작의 산물로 여겨지게 된다. 이 관점은 훗날 고전주의 미학의 토대가 된다. 낭만주의가 거기에 반기를 들고 예술의 ‘영감론’을 부활시키나, 거기서 ‘영감’은 그저 천재라는 예외적 개인의 재능으로 설명될 뿐이다. 이 장에서는 니체를 따라 오랫동안 잊혔던 예술의 디오니소스적 특성을 다시 부각시키려 했다.
4장 「말의 힘」에서 분석할 텍스트는 위(僞)롱기누스의 ‘숭고론’이다. 버크 이후 근대미학은 미와 함께 숭고를 주요한 미적 범주로 다루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그 후 숭고에 관한 논의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리오타르의 에세이 「숭고와 아방가르드」를 통해, ‘숭고’는 후반 현대예술을 특징짓는 주요한 미적 범주로 부활한다. 이 장에서는 ‘숭고’에 관해 쓰인 최초의 문헌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테크네론과 플라톤의 영감론의 충돌을 미와 숭고의 대립으로 재해석하게 될 것이다.
5장 「메갈로프쉬키아」는 견유주의자 디오게네스를 위(僞)롱기누스가 말한 ‘위대한 영혼’의 예로 제시할 것이다. 흔히 서구의 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주석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탈근대의 철학은 이 플라톤주의의 전통을 전복하려 한다. 디오게네스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탈근대의 철학이 등장하기 수천 년 전에 이미 플라톤 철학의 전복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보편자보다 개별자를, 필연성보다 우연성을, 학적 논증보다 예술적 농담을 선호했던 이 “미친 소크라테스”는 탈근대 철학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6장 「죽어가는 것들」은 데카르트의 『정념론』을 통해 근대의 정신주의 철학에 어떻게 신체를 억압해왔는지 분석한다. 신체를 정신의 식민지로 간주한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성적 존재’라는 ‘근대인’을 만들어내기 위한 생체공학의 이론적 표현이었다. 앨버트 허쉬먼에 따르면, 정념을 다스리려는 이 생체공학의 결과 현대인은 자본주의적 인간, 즉 이익을 위해 모든 생명활동을 억제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변모했다고 지적한다. 이 장은 이 근대의 기획을 전복하여 ‘내 안의 자연’, 즉 신체를 부활시키려는 작은 이론적 시도다.
데카르트 철학의 미학적 표현은 고전주의 미학이었다. 데카르트는 이성적 존재가 되려면 감각을 불신하고, 정념을 억제하며, 상상력을 배제하라고 가르쳤다. 데카르트의 격률은 ‘진리 충실성’ ‘점잖음’ ‘정직한 인간’과 같은 개념으로 옷을 갈아입은 채 고전주의 예술의 원리가 된다. 하지만 데카르트주의가 배격한 감각, 정념, 상상력은 공교롭게도 오늘날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는 것의 특성과 일치한다. 7장 「옛것과 새것」에서는 17세기에 예술이 이 이성의 독재에 맞서 어떻게 싸웠는지 살펴본다.
8장 「물, 불, 공기, 흙」에서는 롱기누스에서부터 에드먼드 버크를 거쳐 칸트로 이어지는 ‘숭고’의 개념을 살펴보게 된다. 근대미학은 자연의 숭고를 인정했다. 가령 19세기 낭만주의의 ‘파국의 그림들’에서는 자연이 살아 숨을 쉬며 인간을 압도한다. 하지만 근대의 미학은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에 갇혀 자연이 숭고한 이유를 인간정신의 위대함 속에서 찾았다. 이 장은 이러한 근대의 숭고론과 달리 자연의 위대함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새로운 자연 숭고의 개념을 모색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9장 「자연의 결함」에서는 ‘자연미’와 ‘예술미’의 관계에 대한 헤겔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된다. 헤겔은 자신의 『미학』에서 자연미에는 결함이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예술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자연미에 대한 예술미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은 곧 자연미에 대한 인공미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헤겔의 미학은 근대의 개발 이데올로기의 미학적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그런 근대의 폭력적인 자연 지배의 강박에 맞서 자연의 이질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생태미학의 필요성을 요청하게 된다.
10장 「앙겔루스 노부스」에서 다루는 것은 미학 이론이 아니라 한 장의 그림이다. 파울 클레의 그림 「신천사」. 널리 알려진 것처럼 발터 베냐민은 그의 「역사철학테제」에서 이 그림을 자신이 생각하는 ‘역사’의 엠블럼으로 사용한 바 있다. 이 에세이는 현실사회주의 붕괴로 유토피아의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의 멜랑콜리를 다소 감상적인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이 에세이는 지극히 사적인 체험의 기록으로, 역사주의가 붕괴한 시대에 역사를 대하는 내 자신의 개인적인 다짐을 담고 있다.
이 에세이들을 쓰던 당시만 해도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의식하지 못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나의 문제의식은 기존 문헌의 재해석, 그동안 배제됐던 문헌들의 독해, 혹은 주변화한 문헌들의 재조명을 통해 근대미학의 패러다임을 탈근대의 그것으로 전환하는 데에 있었던 것 같다. 그 전환은 한마디로 ‘미에서 숭고’라는 모토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1950년대에 미국의 화가 바넷 뉴먼은 “이제까지 서구의 예술은 미에 종속되어 숭고에 대한 열망을 잃어 버렸다”고 말한 바 있다. 뉴먼의 주장은 한 마디로 현대미술의 원리는 ‘미’가 아니라 ‘숭고’에 있다는 선언이었다. 30년 후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뉴먼을 인용하여 숭고가 현대예술의 지배적 미적 범주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미학에서 ‘숭고’의 범주가 1980년대에 이르러 발견된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이상한 일이다. ‘미’를 추구하는 고전예술의 원리는 20세기 초에 이미 종언을 고했기 때문이다. 쓰던 당시에는 명확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책에 실린 10편의 에세이는 모두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숭고’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리오타르는 ‘숭고’의 개념을 주로 아방가르드 예술에 한정시켰지만, 나는 ‘숭고’의 개념을 고대의 ‘존재미학’과 현대의 ‘생태미학’으로까지 확장시키려 한다. 내게 ‘숭고’란 그저 미를 추구하던 고전주의 예술을 해체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위대함으로 끌어올리는 존재미학의 원리이자, 나와 이질적인 존재로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생태미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책에 수록된 10편의 에세이를 통해 내가 지향하는 ‘확장된 숭고’의 다양한 측면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각의 전환에 이론적 도움을 준 것은 독일과 프랑스 철학자들의 미학이었다. 이들 탈근대의 미학에 관한 나의 연구는 『현대미학 강의』(2003, 아트북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쓴 『미학 오디세이』 3권(2004, 휴머니스트)에 담겨 있다. 13년 전에 쓴 자기의 글을 다시 읽는 것은, 마치 밤에 쓴 글을 낮에 읽는 것만큼이나 민망한 일이다. 감상적 어조로 쓴 부분은 특히 그러하다. 그 글을 쓰던 청년의 몸속에 지금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앉아 있다. 옛글을 다시 읽는 민망함보다 강렬한 것은 그리움이다.
2013년 여름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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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겔루스 노부스 진중권 저 | 아트북스
2003년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후 많은 독자들이 복간을 바라왔던 『앙겔루스 노부스』가 도판을 보강하고 오류를 수정하여 재발간되었다. 미학에 관한 ‘에세이’로서, 진중권 특유의 재기 넘치는 문체로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미학사를 탈근대의 관점에서 재검토하며, 그 과정에서 근대미학이 간과했던 해석의 지평을 열어, 미학이 단지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살아나가는 태도이자 방법이 될 수 있는 존재미학으로 나아가는 바탕을 세운다. 책의 제목은 파울 클레의 그림 「앙겔루스 노부스」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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