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奧地는 사람을 설레게 합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고 또 거기에서 어떤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지의 세계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하지만 이제 엄밀한 의미에서 오지는 지구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마존의 깊숙한 밀림에서 아프리카의 구석구석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곳은 더 이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지의 사전적인 정의는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땅’입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땅’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오지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의 땅’이란 뜻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의외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중앙아시아는, 도시는 물론 바다와도 멀리 떨어진 진정한 오지로서 거대한 초원과 사막 그리고 험하고 높은 산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같이 구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들과 중국의 신장성, 몽골이 중앙아시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은 1990년대 초 구소련이 붕괴되기 전에는 철의 장막에 가로막혔던 지역이었고 구소련 붕괴 후에도 계속된 내전과 불편한 교통 때문에 외부에서 찾아가기 가장 힘든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이곳만큼 매력적인 곳을 만나기는 힘듭니다. 며칠을 가도 사람 한 명 볼 수 없는 광활한 초원과 사막, 마치 다른 행성에 와있는 것처럼 신비한 바위산과 모래언덕으로 이루어진 중앙아시아의 자연은 극한의 황량함조차도 역설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경제적으로 중앙아시아는 메마르고 험한 자연환경 때문에 농사가 불가능해 유목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습니다. 유목민의 삶 역시 그들이 살고 있는 자연을 닮아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없이 따뜻하고 관용적입니다.
지난 2006년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자연다큐멘터리를 촬영해왔습니다. 그 결과물로 <태고의 땅 몽골>(5부작/2007년), <히말라야>(3부작/2009년), <아시아대평원>(6부작/2012년) 등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왔습니다(엄밀히 히말라야는 중앙아시아에 넣기 힘들지만 편의상 같이 담았습니다).
자연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서 사람의 손이 덜 탄 오지지역으로 다닐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 지역은 현지인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관련 자료를 찾거나, 도움을 받을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았고 인터넷이나 책에서 어렵게 찾은 자료조차 직접 현지에 가보면 실제와 동떨어진 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무모하지만 직접 몸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지인과 같이 먹고 자며 평범한 여행에서 경험하기 힘든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이 글은 그 일들의 기록입니다.
방송을 하면서 운 좋게 몇 차례 수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멋진 수상소감을 준비해 가지만 막상 수상식장에서 제가 한 말은 항상 똑같았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고 고생스러운 촬영을 함께한 황경선 촬영감독을 포함한 모든 스텝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멋진 중앙아시아를 소개해주고 대부분의 일정을 함께 한 야생동물전문가 최현명 형과 <GeaAsia>의 강정호 감독이 없었다면 이 장기간의 작업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일을 핑계로 일 년의 반은 집을 비운 무책임한 저를 묵묵히 지켜봐 준 부모님과 사랑하는 가족, 아내와 두 아이 희수와 예은에게 이 지면을 통해 미안함과 감사함을 전합니다. 출판에는 문외한인 저를 격려해주시고 예쁜 책으로 만들어 준 MID의 최성훈 대표와 박동준 이사, 최재천 편집장께도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귀한 사진을 제공해준 박태준, 이참슬, 최일권, 김미혜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이 멋진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13년 8월
서 준
늑대, 두 번째 이야기
유목민의 늑대에 대한 생각은 복잡해서 한편으로는 철천지원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외의 대상이다. 유일한 생계수단인 가축을 해치는 점에서 보면 모조리 없애 버려야 할 존재지만, 무리를 이뤄 질서 정연하게 사냥하는 용맹한 모습에서는 존중의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또한 늑대는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어 자연을 깨끗하게 하고 주로 병에 걸린 가축을 잡아먹어서 가축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늑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면 예외 없이 이 두 가지 면을 함께 이야기하는데, 어찌됐든 유목민의 늑대에 대한 생각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심지어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푸른늑대’라고 말한다.
늑대를 기르는 사람
가끔 늑대를 기르는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는데, 첫 번째로 만난 곳은 몽골 ‘수흐바타르 아이막’의 ‘다리강가’ 호수 부근이었다. 내가 말에서 걷어 차였던 바로 그 곳 말이다. 이곳에서 관광캠프를 운영하는 남자는 관람용으로 늑대를 기르고 있었는데, 3년 전에 늑대 굴에서 새끼를 세 마리 꺼내왔다고 한다. 그 중 두 마리는 이미 죽었고 우리가 갔을 때는 암컷 한 마리만 남아 있었다. 약간의 돈만 내면 늑대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다며 우리에게도 권했다. 그러면서 늑대와 관광객들이 함께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는데 얼핏 보기에도 꽤 괜찮은 돈벌이가 돼 보였다.
어릴 때부터 사람 손에 길러진 늑대는 행동이나 습성이 거의 개와 비슷하게 되어 스스로도 자신이 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만 탈출을 막고 가축이나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목에 굵은 쇠사슬을 채워 놓은 것이 개와 다른 점이었다. 주인 말에 따르면 개와 비슷하게 기를 수는 있지만 먹이로 소금이나 화학적인 성분이 들어 있는 음식을 주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사람 손에서 자란 늑대는 개와 함께 장난을 치기도 하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상자 위에 올라가 갖은 재주를 부렸는데 야성
野性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먹이로 염소고기를 주었을 때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에서 잠깐 늑대의 야성이 느껴졌지만, 먹이 앞에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집 안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마찬가지 아닌가. 주인은 늑대가 얼마 후면 새끼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배가 불룩하게 나오고 젖도 잔뜩 불어 있는 게 출산이 임박해 보였다. 늑대는 굴을 잘 파는 동물로 야생의 암컷늑대는 새끼를 낳을 때가 가까워오면 출산을 위해 굴을 판다고 한다. 쇠사슬에 묶인 ‘다리강가’의 암컷늑대도 이미 새끼를 낳을 굴을 파고 먹이를 주면 일부만 먹고 나머지는 땅에 묻어 저장을 해뒀는데, 출산을 준비하는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얼마 후면 새끼들이 태어날 것이고, 그 놈들은 이제 사람 손에서 ‘모습만 늑대’로 키워질 것이다. 아마도 이번에 태어날 새끼들은 그래도 야생에서 태어난 제 어미보다 조금 더 개와 비슷하게 길러질 것이다. 야성은 없어졌지만 모성은 변함없던 다리강가의 암컷늑대를 보는 내내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새끼늑대 훔치기
두 번째 늑대를 기른 사람의 이야기는 멀리 알타이 산맥에서 시작된다. 이곳에는 카자흐 유목민이 주로 살아가는데 늑대에게 가축이 피해를 입는 것은 초원과 마찬가지다.
유목민들에게는 늑대의 수를 줄여 가축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이른 봄 갓 태어난 새끼늑대를 굴에서 훔쳐오는 관습이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늑대 굴을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은데, 어미늑대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새끼를 낳고 이후로도 수시로 굴을 옮겨가며 새끼를 기르는 조심성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2011년 봄, 여기저기 수소문을 한 끝에 알타이의 한 오지마을에서 늑대새끼를 꺼내러 간다는 ‘우넴게르’란 유목민을 만났다. 우넴게르는 올해 들어서만 늑대에게 소 1마리, 양 4마리, 염소는 6마리나 잃었다며 하소연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늑대가 가축을 잡아먹는 일 자체가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냐고 말했는데 역시 늑대에 대한 이중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늑대 굴은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에 있기 때문에 말을 타고 하루 정도는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늑대 굴을 찾아 산속으로 한참을 들어가다가 ‘바이을라우’란 사냥꾼을 만났는데, 산 위에서 발견한 늑대를 추적하다 우연히 바위틈에 교묘히 만들어 놓은 늑대 굴을 발견했다고 했다. 바이을라우는 굴 주변에 숨어 어미늑대를 기다려봤지만 어미가 나타나지 않아 사냥은 실패했고, 다음 날 아침 굴에 가보니 밤에 어미가 몰래 새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놔 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끈질기게 추적을 한 끝에 어미늑대가 바위 밑에 숨겨놓은 새끼늑대를 찾아냈고, 바위 밑에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하는 새끼 세 마리가 있었다.
보통 동물들은 새끼를 입으로 물어서 옮기는데 어미늑대가 다급한 나머지 미처 새끼를 다른 굴까지 옮기지 못하고 임시로 바위 밑에 숨겨놓았다가 발각된 것 같았다. 늑대새끼는 생후 20일이 되기 전에 훔쳐오는데, 이 시기의 새끼들은 눈을 뜨고 처음 본 상대를 제 어미로 생각한다. 따라서 처음 보게 되는 존재가 사람이면 어미로 생각하여 기르기가 쉽지만, 눈을 뜨고 얼마간 시간이 흘러 친어미를 인식하게 되면 사람에게 길들여지지 않는다.
‘우넴게르’와 ‘바이을라우’는 조심스레 새끼를 자루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새끼늑대를 보고 아이들이 마치 강아지를 분양받은 것처럼 좋아했다. 물론 새끼늑대의 운명은 강아지와는 다르다. 새끼늑대는 돈을 받고 필요한 사람에게 바로 팔아버리거나 어느 정도 키운 후에 죽여서 가죽을 이용한다. 늑대 가죽은 방한효과가 뛰어나 고가에 거래되기 때문이다.
3개월 후, 6월에 알타이를 다시 방문했다. 몇 달 사이 눈도 못 뜨고 있던 새끼늑대들은 웬만한 강아지만큼 자라 있었고, 생김새나 행동도 강아지와 똑같았다. 손을 대면 핥고 빨아대며 재롱을 부렸지만, 친어미를 찾는지 가끔은 낑낑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야생의 본능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지, 자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아이들에게는 순한 양같이 굴다가도 촬영을 위해 접근한 카메라를 향해서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놈들의 야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는 바로 푸른 눈빛이었는데, 그것이 겉모습은 거의 비슷해 보이는 늑대와 개의 차이점이었다. 또한 늑대는 꼬리가 위로 말리지 않고 항상 아래로 처져 있고, 반대로 귀는 항상 위를 향해 빳빳이 서 있다. 비록 어린새끼들이지만 녀석들의 짙푸른 눈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서늘한 야생의 느낌이 들었다.
늑대의 운명
2011년 10월, 마지막으로 알타이를 찾았을 때 세 마리의 새끼늑대 중 두 마리는 어디론가 팔려가고 한 마리만 남아 있었다. 불과 4개월 만에 새끼늑대는 거의 어른늑대로 자라 있었는데, 야생에서 봄에 태어난 새끼는 그해 겨울이 되면 거의 성체로 자라 충분히 사냥을 한다. 녀석이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노는 모습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살짝만 스쳐도 피부가 크게 찢길 정도로 이빨은 날카롭게 자라 있었고, 그만큼 힘도 강해진 것 같았다. ‘다라강가’의 늑대에 비해서 훨씬 강한 야성이 느껴졌지만 사람을 보고 꼬리를 흔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을 핥아대는 모습은 영락없는 개였다. 이렇게 다 자란 늑대는 엄청나게 먹어대는 먹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집에서 기르기는 어렵다. 앞으로 녀석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들으나마나 가슴 아픈 대답이 돌아올 것이 뻔해서 묻지 않았다. 이른 봄, 눈도 못 뜨고 사람에게 잡혀왔을 때 이미 녀석의 슬픈 운명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늑대새끼를 굴에서 꺼내오는 일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에게는 일반적인 일 같다. 2013년 봄,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새끼늑대를 훔쳐온 사람을 만났는데 이곳에서는 훔친 새끼를 이용해 늑대를 멀리 쫓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늑대의 피해가 심한 곳에서는 봄철에 늑대 굴을 찾아서는 새끼의 고추를 실로 묶어 소변을 못 보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 소변을 못 보게 된 새끼가 죽겠다고 “낑낑”거리며 울어대는데 그 소리를 들은 어미늑대는 그 곳을 떠나고 다시는 근처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글쎄, 그런데 그 방법이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어미늑대라면 새끼들 오줌 못 싸게 한 사람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집의 가축만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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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대평원 서준 저 | MID 엠아이디
방송계에서 ‘오지의 PD’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방송국 생활 내내 생사를 넘나드는 악전고투를 통해서 세계의 오지만을 카메라에 담아온 사람, 국내외에서 이미 자연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EBS 프로듀서 서 준이 처음으로 털어 놓는 특별한 아시아 이야기. 2012년 절찬리에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아시아대평원]이 1년 만에 책으로 나온다. 책을 쓰기 위해 저자는 오지 촬영 내내 모래폭풍에 갇히거나 눈 덮인 히말라야의 혹한 속에서도 곱은 손으로도 메모를 잊지 않았고, 메모 한 줄 한 줄에 기억을 덧붙여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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