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드윅의 탄생
"아뇨. 재미있어요. 제가 더 당황하면 리듬이 깨지니까 같이 노는 것처럼 하려고 하고 있어요.”
기자가 만나자마자 던진 질문은 그 때 그 상황, 애드리브였는지 아니었는지. 몇 번인가 <헤드윅>을 관람한 기자였지만 해마다, 아니 회마다 달라지는 <헤드윅>을 보다보면 ‘특별한 그녀’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게 누구의 <헤드윅>이냐에 따라 완벽히 달라지기도 한다. 손승원의 ‘애드윅’처럼...
“애기 <헤드윅>이라고 그렇게 부르시더라고요. 사실 <헤드윅>이 연륜도 많고 인생의 고난이나 역경도 다 겪은 인물인데 저는 20대 초반 아가씨 같은 느낌이 있으니까, 제가 어리고요. 애기라는 이미지가 보시는 분들한테 선입견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돼요.”
그런 걱정은 마시길. 24살, 단지 역대 최소 <헤드윅>을 반기는 팬들의 새로운 표현일 뿐. 얕잡아 볼 리 없다.
“사실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땐 장난전화인 줄 알았어요. 제가 어리고 경험도 없어서 잘 할 수 있을지 고민이 돼서 며칠 생각을 해보고 하겠다고 했죠.”
록 형태의 2인극 에 출연 중이던 손승원을 눈여겨 본 <헤드윅>제작진의 연락을 받고 시작된 고민은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주변의 응원도 있었지만 잘 해도, 밑져도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도전하게 된 손승원. 이 작품은 과연 그에게 독이 될까, 득이 될까?
난 손해 볼 게 없다!
도도한 눈빛으로 천박하게 말하는 헤드윅이 타이타닉 생존자들이 묵었던 낡은 호텔 리버뷰에서 펼치는 록공연. 자신의 소년 시절 이야기로부터 여자로 살고 있는 지금에 이르는 세월을 담담히, 혹은 슬프게, 때로 과격하게 이끌어간다. 파란만장한 이 여자의 삶을 거의 배우 한 사람이 단독으로 이끌어가는 뮤지컬 <헤드윅>, 어떤 배우나 욕심을 내지만 아무 배우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으로 정평이 난 작품. 그래서 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손승원이라는 젊은 배우는 그 큰 관심이라는 무게를 번쩍 들어 잘 버티고 있다.
“제가 어리기 때문에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딪쳐서 해보자는 도전정신이 더 생겼죠. 만약 제가 내공이 더 많았으면 부담감이 오히려 더 컸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를 기대보다는 호기심과 궁금증만 가지고 보시는 게 더 많아서 편했어요. 형들이 워낙 쟁쟁하잖아요.”
물론 그 어리다는 장점이 때로 ‘어려서 잘 하겠냐’는 선입견으로 작용할까 우려도 생겼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어리다는 걸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는 어린 헤드윅으로 가자는 생각이었어요. 딱 봐도 어려 보이는데 나이 많은 척이나 여성스러운 척 하면 거부감이 더 클 것 같아서요. 헤드윅이 아픔을 겪고 나서 해탈한 인물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그냥 현재 아픔을 갖고 있는 인물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냥 나이대가 다른 헤드윅, 20대의 헤드윅을 표현하려고 애썼죠.”
그렇다고 손승원의 <헤드윅>을 어리고 신선하게만 보지 마시라. 그의, 아니 그녀의 농염한 연기는 필시 기자는 못 따라간다.
형님들의 견제
2013 <헤드윅>은 티켓 파워의 대명사 조승우와 ‘다시 보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헤드윅’으로 꼽힌 송창의, 그리고 빵빵한 두 선배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행운을 얻은 손승원이 맡고 있다. 그런데 캐스트가 발표되던 날, 검색어 1위에 오른 건 손승원이었더랬다.
“처음에 그래서 부담도 됐어요. 원래 승우 형이 더 화제가 되어야 하는데 제가 화제가 되니까. ‘쟤는 누구지?’ 이런 시선이었지만요.”
그런 부담을 줄여준 건 형들의 조언. 연습 때부터 두 형님은 물심양면 그를 다독였다.
“승우 형은 그냥 막 하라고, 무조건 재미있게만 하라고 하셨어요. 네가 재미있게 하면 관객들도 다 느끼고 재미있어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창의 형은 ‘부담 갖지 말고 즐겨라’, ‘어차피 너는 우리보다 못 해도 손해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걱정이다, 네가 잘 하면 우리가 부담된다’ 이렇게 말씀하셨고요. 승우 형은 특히 제 공연 리허설과 첫 공연에도 다 오셔서 하나하나 조언해주셨거든요. 저도 그래서 형들 공연하는 걸 자주 보면서 무엇을 뺏어올 수 있을까 고민했죠.”
말하자면 더 이상 ‘애기’는 아닌 거다. 형님들, 긴장하시라.
“승우 형은 관객과 함께 노는 노련함, 애드리브 이런 게 뛰어나고요. 록적인 노래를 잘 표현하시죠. 창의 형은 헤드윅의 진정성을 잘 표현하세요. 그래서 두 가지를 잘 섞어서 제 것으로 만들어야죠.”
그래서 가끔 조승우도, 송창의도 묻는단다. ‘너 요즘 잘 하고 있다며? 재미있게 한다며?’ 은근히 형님들도 견제하는 건 아닐까?
토마토에 대한 짜릿함? 혹은 찝찝함?
어느 대목인지는 스포일러성일 듯 싶어 언급을 삼가지만, <헤드윅>의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여있는 산물 ‘토마토’로 펼치는 그의 퍼포먼스는 대략 극을 최고조로 이끄는 소품이다. 배우에겐 좀 꺼림칙할 과격한 퍼포먼스, 손승원에겐 어땠을까?
“찝찝함은 못 느껴요. 끝나고 나서는 느끼는데 공연 중에는 집중하고 있으니까 짜릿함이 더 크죠. 특히 공연 중에 저 스스로를 가장 깨는 장면이라 저도 해소되는 걸 많이 느껴요. 물론 공연이 끝난 뒤에는 냄새도 많이 나고 찝찝하지만 하는 중에는 잘 못 느껴요.”
무대 위 퍼포먼스라 하면 사실 토마토보다는 헤드윅의 노출이 압권이다. 뭐 객석 점유율 80% 이상일 것 같은 여성관객들에겐 절대 감사 이벤트지만.
“아무래도 느끼죠. 팬티만 입고 서는데. 그런데 사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은 없어요. 저는 연기를 하고 있으니까 당당하죠. 그리고 이젠 그런 시선도 즐기게 된 것 같아요.”
이 대목에서 관객들의 시선이 위아래로 빠르게 스캐닝 중인 건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기자 역시 다만 미소 지을 뿐.
조진아 씨가 뭐라고 안 하던가요?
헤드윅들은 늘 고충이 따른다. 무대 위 여성으로 변하기 직전의 과정은 거의 고통에 가깝다. 미모라면 뒤지지 않았던 박건형 역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제모와 다이어트, 오랜 시간을 요하는 분장, 긴 머리 가발, 뾰족 구두는 모두 남성배우들에게 고문 수준이다.
“처음에는 제가 면도기로 제모를 하면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뭐하는 짓인가’ 싶었어요. 먹고 살기 힘들다 생각했죠. 분장하면서도 그렇고요. 제 성격이랑 안 맞았거든요. 그런데 주변에서 ‘예쁘다, 예쁘다’ 해주니까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더 예뻐질 수 없을까 싶어서 제가 ‘조금 더 이렇게 해봐’ 하죠.”
여자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조금씩 화장이며, 머리손질이며, 의상에 신경 쓰다 안 되겠다 싶으면 성형까지 가는 법. 그런데 손승원은 기자가 보기에도 다소 짜증이 날 정도로 몸매도, 얼굴도 완벽하게 예뻤다.
“이츠학 누나들이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해요. ‘너 때문에 드레스 입기 싫다’고 말하기도 해요. 살 좀 찌라고. 관객 중에는 제가 등장하면 인상 쓰고 계신 분들도 있어요.”
인상 쓴 관객 중 하나가 기자였는지도. 사실 외모도 외모지만 신경질적으로 이츠학에게, 관객에게 앙탈부리는 그녀의 말투는 정말 여성스럽다!
5년차 배우에게 찾아온 운명적 작품
여타 배우들이 보기에 5년차라고 하면 혀부터 끌끌 찰 일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에겐 지금, 배우생활 5년 만에 행운이 찾아왔다.
“배우로서 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던 작품이죠.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죠. 천천히 올라가다가 확 바뀌었으니까요. 제가 가장 열심히 한 작품이 <헤드윅>이거든요. 그래서 더 제가 후회가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했거든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작품을 하면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지 않았을까 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작은 작품도 하나하나 이렇게 열심히 했으면 더 좋은 소리도 듣고 후회도 없을 텐데...그래서 이제부터는 어떤 작품을 해도 <헤드윅>을 하는 것처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24살에 찾아온 터닝포인트, 어쩌면 너무 빠르지만 그는 충분히 감당할 그릇이 되어보였다.
그래서 다음 작품을 더 고심하고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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