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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話頭, 그 실마리 : <길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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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재 감독은 다큐멘터리 <길위에서>의 촬영을 위해 비구니 수행도량인 백흥암에서 300여일을 보냈다. 금기를 깨고, 금기의 공간에 들어선 카메라는 내밀하게 비구니들의 일상으로 파고들지만, 비구니들의 삶은 전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더 드라마틱한 과거, 고뇌를 품은 비장한 삶과 거리가 멀다. 그리고 결이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낸 다큐멘터리는 촬영 자체를 수행의 과정에 녹여낸다.


화두(話頭).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서>를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한 첫 번째 단어라, 이 칼럼을 시작하는 첫 번째 단어로 사용하고 싶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이야기의 첫머리, 불교용어로는 참선 수행을 위한 실마리를 이르는 말이다. 즉, 화두(話頭)란 참선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그 해답을 찾고 싶어 하는 근본적인 문제인 셈이다. <길위에서>의 이창재 감독이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꺼낸 ‘화두’는 비구니가 된 그녀들의 ‘화두’, 그 실마리를 찾는 과정이다.

이창재 감독은 다큐멘터리 <길위에서>의 촬영을 위해 비구니 수행도량인 백흥암에서 300여일을 보냈다. 여성 무속인의 삶을 그려낸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이후 7년, 치열하게 정진하는 비구니 스님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금기를 깨고, 금기의 공간에 들어선 카메라는 내밀하게 비구니들의 일상으로 파고들지만, 비구니들의 삶은 전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더 드라마틱한 과거, 고뇌를 품은 비장한 삶과 거리가 멀다. 그리고 결이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낸 다큐멘터리는 촬영 자체를 수행의 과정에 녹여낸다. 떠들지 않는 감독의 묵묵한 접근법은 문 없는 방안에 갇혀 오직 기도에만 정진하는 무언수행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경북 영천시 팔공산 자락의 법흥암은 1년에 딱 두 번, 부처님 오신 날과 백중날에만 일반인에게 개방되는 공간이다. <길위에서>를 통해 법흥암 내부가 공개된 것은 정확하게 14년, 비구니들의 수행 과정을 담아낸 것은 최초라고 한다. 이창재 감독은 출가를 결심하고 비구니가 되어 ‘도’를 깨달아가는 수행의 과정을 묵묵하게 바라본다. 감정의 개입 없이, 그의 카메라는 새벽 3시를 울리는 목탁 소리와 함께 깨어나고 저녁 9시까지 이어지는 예불과 명상에 참여한다. 그렇다고 그 속에 오롯한 수행의 과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행자스님들의 깨알 수다와 장난, 윷놀이 장면도 맑게 담아낸다. 또한 해외 유학 후 교수 임용을 앞두고 불연 듯 출가한 상욱 스님, 어릴 때 절에 버려져 동진 출가한 선우 스님, 그 어떤 종교도 ‘나’를 찾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데 불교만이 ‘나’를 고민하게 한다며 출가했다는 사차원 민재 스님, 37년이나 수행에 정진했으면서 ‘밥값’에 대해 고민하고 ‘밥값’을 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울컥하는 영운스님 등 다양한 비구니들의 모습을 담는다. 카메라는 멀찍이 풍경 속에 물러나 있다가 내밀한 고백 속으로 깊이 파고든다. 하지만, 사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만한 이야기를 캐내는 법은 없다. 관객들은 어쩌면 비구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기구한 사연을 더 궁금해 하겠지만 <길위에서>가 보여주는 것은 수행의 과정이며, 그 수행의 과정에 참여한 비구니라는 ‘사람’이다.

<길위에서>에 상욱 스님이 정말 비구니로서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지 노스님과 면접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절에도 시시비비가 있고, 미운 사람도 있다. 속세와 완전 인연을 끊고 수행만 할 수 있는 안온한 삶만이 존재하는 초월의 공간이 아니라 삶에 밀착된 또 다른 삶의 터전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길위에서>에 나오는 스님들의 삶은 엄격한 규율 속에 갇혀 있지만, 사찰은 그들은 과거의 틀에 가둬두진 않는다. 한층 젊어진 스님들은 휴대폰도 소유하며, 기념촬영도 하고 만행을 떠나 만난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면서 외딴 곳에 존재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으로도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불교의 현재를 보여준다. 여기에 동정어린 시선이나, 비판적인 시선, 혹은 꾸미려는 감독의 시선이 머물지 않기에 관객들은 보이는 비구니들의 삶을 그저 보여주는 대로 묵도하게 된다. 평생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수행의 어려움이 밥값의 어려움이라는, 그리고 내가 과연 밥값을 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고민은 비록 비구니가 아니라도 지금, 삶을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금기된 곳에 들이댄 카메라 속에 금기된 일은 담기지 않았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만한 장면도, 그녀들이 비구니가 된 이유도 밝혀지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을 사색하게 만들지만, 맑고 가볍게 툭툭 털어낼 수도 있다. 그녀들의 삶은 우리보다 무겁지 않았고, 우리의 삶이 그녀들 보다 결코 가볍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영화의 서두에 스님은 감독에게 묻는다. 무엇을 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가 끝난 시점에도 밝혀지지 않는다. 감독이 보고 싶었던 것, 심지어는 보았던 것까지 감독은 얘기하지 않는다. “한 절에서 들은 여성 행자의 대성통곡이 나를 백흥암으로 들어서게 했다”는 이창재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되지만, 영화는 질문도 해답도 그 어떤 것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실제로 상욱 스님의 부모님은 자신들이 출연한 부분을 빼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영화에는 법흥암에 찾아와 상욱 스님을 집으로 보내달라며 울고 불며 통곡하는 그 어머니와 묵묵히 곁을 지키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상욱 스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놓아야만 하는 상욱 스님의 모습도 담겨있다. 하지만 그 현상 이면에 상욱 스님의 그 소용돌이치는 내면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지 않는다. 200시간이 넘는 촬영 분량을 1시간 45분으로 축약하면서 배급사와 백흥암 측의 의견을 조율해야만 했던 일은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순순히 백흥암 측의 의견을 대부분 다 수용하여 원하던 장면도 다큐멘터리에서 제외했다고 한다. 감독은 차기작으로 호스피스 요양원 사람들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신과 인간의 매개자인 무당을 다룬 <사이에서>, 수행의 형벌을 짊어진 비구니를 그린 <길위에서>에 이어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이야기에 이르면 감독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지 또 다른 단서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길위에서>의 개봉 이후 평론가와 관객, 불교계의 반응은 호의적이다. 소규모 개봉에도 불구하고 25,000명의 관객이 이 영화를 보았다. 반가운 일이지만 또 다른 고민은 남았다. 다큐멘터리 이후 법흥암의 삶을 여전히 속세와 분리된 공간으로 지켜주는 예의가 필요하다. 영화 <집으로>의 김을분 할머니는 찾아오는 관광객들 때문에 결국 자신이 살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사를 가야했다. <워낭소리> 이후 관광지가 된 삶의 터전 앞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 할아버지의 사연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실제로 영화 개봉 이후 법흥암 입구에는 커다란 문이 하나 더 생겼다고 한다. 관장지가 되어 수행에 어려움을 겪을지 모를 스님들의 의견에 따라 덧문을 하나 더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디 관객들이 자연 속 법흥암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곳을 관광지로 만들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속세의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살기로 한 그들에게 지켜야 할 예의는 같은 길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지켜 삶의 영역을 분리해 주는 것이다. 그들의 삶이 우리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고, 그들의 삶이 우리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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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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